[김창만(金昌滿, 1913~?) 金昌濟 장춘산] ()
(조선의용대 流動宣傳隊長) 함남 영흥 출신으로, 서울 중동학교를 중퇴한 후 중국 광동(廣東) 중산대학(中山大學)에 입학했다. 광동에서 한국국민청년단을 결성했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 김구(金九)진영에서 이탈하여 조선 민족혁명당과 그 안의 지하조직인 조선청년전위동맹에 가담했다. 1937년 12월 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星子) 강릉분교(江陵分校)에 입학하여 1938년 5월 졸업했다. 군관학교에서 한만(韓滿)국경유격대의 활동을 찬양하고 학생들에게 동북(東北) 진출을 호소하는 「도문강변의 활극」이라는 연극대본을 썼다. 10월 조선의용대에 가담하여 항일선전활동에 종사했다. 1939년 말 조선의용대 유동선전대장을 맡아 호북성(湖北省)의 제5전구와 서안(西安) 일대에서 활동했다.
(조선의용군 華北支隊 정치위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1940년 2월 조선의용대 정치조 활동선전주임, 조선청년전위동맹 중앙간부로 활동했다. 1942년 7월 화북조선독립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집행위원 겸 경제부장,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정치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4년 초 일본군 후방지역의 조선인에 대한 선전조직활동을 위해 건립된 적구공작반(敵區工作班) 선전책임자가 되었다. 해방 후 38선 이북으로 귀국했다. 1946년 북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장, 1949년 중앙위원, 1953년 조선노동당 황해도당 위원장, 1956년 1월 교육상, 1957년 8월과 1962년 10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부수상(제3차 내각)을 지냈다. 1966년 숙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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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접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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