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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金泳植, 1899~1930)] ()

(―月會 간부) 전남 목포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재학 당시부터 사회운동에 투신했다. 1923년 7월 조선인유학생학우회 강연단의 일원으로 귀국하여 ‘문화운동의 기조’ ‘현대사회의 근본적 결함’ 등의 제목으로 순회강연을 했다. 1925년 1월 토오꾜오(東京)에서 사회주의 사상단체 일월회 간부가 되었고 3월 기관지 『사상운동(思想運動)』에 「조선 사회운동의 신기운에 임하야」를 기고했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했다.
(조공 중앙위원 후보) 1925년 8월 목포에서 사상단체 전위동맹(前衛同盟) 결성에 참여했다. 9월 목포무산청년회를 개편하고 무목노농연맹(務木勞農聯盟)을 조직했으며, 전위동맹 회원과 함께 10여 개의 직업별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10월 목포노동총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1월 목포 제유공파업이 발생하자 목포노동총동맹 간부들과 함께 파업지도부를 구성했다. 3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월 석방되었다. 이 무렵 사상단체 정우회(正友會) 간부로 활동했고 12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후보로 선임되었다. 1927년 2월 『동아일보』에 「전환기에 직면한 조선신홍운동」을 연재했고 5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의안작성위원으로서 ‘방향전환론’을 주도했으며, 11월 『조선지광(朝鮮之光)』에 「현하의 국제정세와 전쟁의 위기』를 발표했다. 12월 신간회 목포지회 제1차 정기대회에서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8년 ‘제3차 조공 검거사건’을 피해 소련으로 탈출했다.
(조공재건설준비위 정치부 책임) 1929년 6월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에서 결성된 조공재건설준비위원회에 참여하고 정치부를 맡았다. 10월 조공재건설준비위 대표로서 재동만공산주의선인열성자대회(在東滿共産主麵人熱誠者大會)에 참석했다. 1930년 봄부터 조공재건설준비위 중앙간부와 함께 운동의 중심을 국내로 옮기기 위해 입국을 시도했으나 급성폐결핵으로 귀국하지 못했다. 요양중 길림성 연길현(延吉縣) 숭례향(崇禮鄕)으로 피신했다가 그해 7월 6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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