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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 프리드리히] (Engels, Friedrich)

(1820년 11월 28일~1895년 8월 5일) 혁명적이며 천재적인 사상가. 과학적 공산주의의 창시자들 중 한 명이며 마르크스의 친구이자 친숙한 동지(「마르크스, 칼」참조). 엥겔스는 섬유제조업자의 아들로 바르멘(Barmen ; 프러시아에 있는 라인지역으로 후에 부퍼탈로 바뀜)에서 태어났다. 1837년 엥겔스는 아버지의 강요로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그 뒤에는 로이폴트(H. Leupold)라는 대규모 수출회사에서 경영훈련을 시작했다. 엥겔스는 청년시절에 문학과 저널리즘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독학으로 외국어를 공부했다. 당시 라인지방에서 광범위하게 제기되고 있던 프러시아 절대주의에 대한 반대 움직임으로 인해서 엥겔스는 일찍이 정치의식과 혁명적 민주주의관을 갖게 되었다. 1842년 11월 중순, 그는 그의 아버지와 공동소유하고 있던 방적공장의 사업상의 일로 영국의 맨체스터로 갔다. 그는 꼴로뉴에 있는 「라인신문 Rheinische Zeitung」의 사무실에서 마르크스를 처음 만났다. 그는 영국에 2년동안 머무르면서 선진적인 노동운동을 경험했는데 이러한 경험들이 그가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철학적 견해를 형성하고 유물론과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라인신문」에 기고할 목적으로 영국에서 쓴 자신의 논문(1842년 말)에서, 영국의 프롤레타리아들이 완수―그는 이를 확신했다―하게 될 사회혁명이란 사상을 처음으로 얘기했다. 1844년 2월에 출간된 『독불연보 Deutsch-Französis Jahrbücher』에 게재되었던 「정치경제학 비판개요 Outline of political Economy」에서 그는 처음으로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하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입장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부르조아 정치경제학을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사회전반의 물질적이고 문화적인 생활의 기반인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비합리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사회적 생산의 조정자로서의 자본주의적 경쟁에 대한 비판이나 부르조아 사회의 적대적 모순들에 대한 분석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는 또한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정치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범주들―즉 가치, 지대 그리고 생산의 정신적 구성요소인 과학의 역할―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는 본질적으로 엥겔스가 공산주의에 대한 예견―이후에 그는 마르크스의 접근방식의 토대를 보다 발전시킨 견해를 『반뒤링론 Anti-dühring』에서 제시하고 있다.―을 최초로 시도한 글이었다. 「개요」는 마르크스에게―그는 이미 1843년 가을부터 정치경제학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수년간의 협력은 1844년 8월말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의 핵심 목표는 변증법적 유물사관을 정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신성가족 Die Heilige Familie』(1845년)은 이러한 진로에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 공동저작에서 그들은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역사적 임무를 부여받는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사상을 명확히 정식화했다. 엘버펠트(Elberfeld)에서 행한 연설(1845년2월)에서 엥겔스는 공산주의의 역사적이고 경제적인 필연성을 증명했다. 『영국에서의 노동자계급의 상태 Die lage der arbeitenden Klasse in England』(1845년)에서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여러 법칙들(주기적 성격의 경제공황, 실업 하에 있는 산업예비군의 형성, 공장제도의 발전에 따른 자본주의적 착취의 고도화)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그는 영국의 예를 들면서 산업혁명과 사회의 계급구조 간의 연관을 확인하였고, 대공업의 발전과 노동자계급운동의 발전 간의 관계를 입증하였다. 그는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이 결합되어야만 하는 필연성을 확증했고 공산주의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필연적인 결과임을 보여주었다. 『독일이데올로기 Die Deutsche Ideologie』(1845~46년)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처음으로 완성된 유물사관을 제시했으며 이는 곧 과학적 공산주의 이론에 대한 철학적 기반의 제공이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작용 및 발전에 대한 변증법을 해명하였다는 사실은 곧 프롤레타리아혁명의 필연성에 대한 철학적 입증을 의미함이며, 공산주의 사회이론에 대한 중요한 명제들을 정식화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공산주의적 신년고백에 관한 초고 Draft of a Comminist Confession of Faith』,『공산주의 원리』,『공산당 선언』(1847~48년) 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0년대 도달했던 과학적 공산주의의 발전과 실체화의 결과들을 집약한 저작들이다. 여기서 그들은 자본주의 발전의 일반적 경로를 서술하고 ; 그것의 주요법칙들의 특징을 나타내고 ; 자본주의 사회적 적대적 모순들(무엇보다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들)에 대한 분석을 하고 ; 사적 소유의 폐지를 위해 필요한 자본주의의 발전수준에 대한 문제를 검토하고 ; 프롤레타리아 독재시기의 역사적인 과제(자본주의의 경제적 지배 철폐, 생산수단의 사회화, 생산력의 발전, 도시과 농촌 간의 그리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간의 모순제거)를 정식화하고 ; 공산주의 사회의 주요한 특징들을 밝혀내고 ; 노동자계급의 공산당에 대한 필요성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유럽에서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1849년 프랑스 혁명―역주)이 패배한 후, 엥겔스는 1849년 영국으로 이주해서 「신라인신문」과 『정치경제학 평론 Politische-Ôkonomische Revue』을 출판하는데 정력을 쏟았다. 1850년에 출판된 저작인 『독일에서의 농민전쟁』에서 엥겔스는 1848~49년 혁명의 경험을 일반화시켜서 분석하고 있다. 독일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대 중 하나를 연구하는데 변증법적 유물론의 방법을 적용함으로써, 그는 농민전쟁의 특징을 초기 부르조아혁명으로 규정하고, 프롤레타리아의 동맹자로서의 농민의 혁명적 잠재력을 밝혀냈다. 1851~52년 미국의 진보적 신문인「뉴욕 데일리 트리뷴 New York Daily Tribune」에 실렸던 「독일의 혁명과 반혁명 Revolution and Counter Revolution in Germany」이라는 제목의 일련의 글에서 독일에서 나타났던 제계급 및 제정당들 간의 투쟁경험을 일반화함으로써, 유물사관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보다 구체화시켰다. 경제이론발전의 전기간(1850년대~1870) 동안 그는 마르크스와 밀접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마르크스의 저작인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와 『자본론』제 1권에 대한 엥겔스의 논평은 『자본론』의 내용과 그것의 공산주의적 지향성을 명백히 함으로써 노동운동 속으로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이 확산되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반뒤링론』(1878)에서 엥겔스는 뒤링의 쁘띠부르조아적 사회주의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중요한 명제들, 특히 마르크스주의 경제이론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모든 세 가지 구성요소들에 대한 해박한 해설을 이런 분석의 결과로서 그는 제시하고 있다(1872~73년에 쓰여진 엥겔스의 연속된 논문인 「주택문제」또한 쁘띠부르조아적 그리고 부르조아적 사회주의의 비판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반뒤링론』에서 그는 『자본론』제 1권의 내용을 광범하게 인용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자본론』을 공산주의경제에 적용시킨 것으로서 그것(자본론-역주)의 대중화와 구체화에 많은 기여를 했다. 이 책에서는 공산주의적 분배방식, 공산주의사회에서 사회의식의 기본적인 역할 등과 관련된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의 결론들이 집약된 형태로 정식화되었다. 『반뒤링론』에서 그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한 경제연구방법을 구체화하고 정치경제학의 주제와 방법(광의와 협의의 정치경제학 등)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명제들을 정식화했다. 1883년 마르크스가 죽은 후, 『자본론』 제 1권의 독일어본 3판과 4판(1883년과 1890년) 간행을 준비했다. 그는 이 저작의 영어번역판을 편집(1887)했다. 마르크스의 미완성 노트에 기초하여, 그는 『자본론』제 2권과 3권의 간행을 준비하는 거대한 작업을 했다 그러므로 그가 공동저자로서 간주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엥겔스가 1895년에 썼지만 사후에 출판된 『자본론』 제 3권에 대한 부기―「가치법칙과 이윤율」과「증권거래」(이는 미완임)―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첫 번째 부기에서 그는 단순상품생산으로부터 자본주의적 생산으로의 역사적 발전을 추적함으로써 가치법칙의 객관적 성격을 입증했다. 두 번째 부기에서는 독점자본주의 발전단계에 근접한 자본주의 경제의 어떤 새로운 현상들의 특징을 제시했다. 그는 자신이 의도했던 『자본론』제 4권의 출판에 착수하기도 전에 질병사하고 말았다. 그는 1873~83년에 『자연변증법』을 저술했다. 거기서 그는 19세기 중반 자연과학의 가장 중요한 업적들ㅇ르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해서 일반화했다. 풍부한 철학적, 자연과학적 사상을 포함하고 있는 이 저서는 1925년 출판되었다. 그는 1884년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 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s』을 썼는데, 거기서 오랫동안 발전해 왔던 전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에 대한 마르크스와 그의 견해를 집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 저작에서 제시된 국가론은 이후에 레닌에게 계승―무엇보다도 새롭게 변화된 역사적 상황에 그것을 적용시킨 『국가와 혁명』(1918)을 보라―되었다.『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와 독이고전철학의 종말』(1886)과 사적 유물론에 대한 그의 편지들(1890~94)에서 유물사관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서술했다. 마르크스와 함RP 엥겔스는 국제노동자연맹의 지도자였으며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친구이자 조언자였다. “엥겔스의 모든 저작들을 충분히 고려해야 비로소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하고 그것을 서술하는 것이 가능해진다”(V.1. 레닌, 『전집』제 21권,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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