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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사상(開化思想)] ()

개화사상의 형성시기는 일반적으로 1870년대 중엽으로 보는 것이 상례이다. 당시 조선은 서구의 동점에 대해서 부분적이든 단계적이든 수용해야 된다는 견해가 사회일각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한 움직임을 주동한 사람들이 朴珪壽 · 吳慶錫 · 劉大致 등으로서, 이들은 어느 정도 조직화되어 1876년 이래의 개항, 군국기무처 성립,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설치 등을 내면적으로 추진하는 세력으로 발전되어 갔다.
이러한 개화사상의 형성은, 세계사적으로 보아 근대 서구의 사조, 특히〈지구구형설〉·ᅳ〈진화론〉등의 자연과학 사상, 루소의 『민약론』이나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같은 민권사상,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과 같은 자본주의 사상 등의 영향을 멀리 받아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으나, 그러나 그러한 서구사조에 직접 부딪친 것은 오히려 1890년대 이후라 하겠고, 1870년대 후반 내지 1880년대 전반의 시기에는 그러한 근대 서구사조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면이 현실적으로는 압도적이었다. 최근에 청말(清末) 양무운동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구체적인 예증으로서는 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誌)와 鄭觀應의 『역언』(易言),黄遵憲의 『조선책략』 등이 조선에 전해졌다는 사실 등에 주목하는 연구성과가 발표되었다. 이러한 영향 아래 개화사상가 중에서 소위 온건적 입장을 내세우는 金允植 ∙閔泳翊 등의 자강주의 및 이른바 동도서기(東道西器) 사상 등이 전개되고 정치적으로는 친청세력으로 등장하였다고 보고 있다. 다른 한편 명치 일본측으로부터는 무엇보다도 福澤輸吉의 『문명론의 개략』∙ 『학문에의 권유』 등을 비롯한 일련의 저술의 영향이 지적되고 있으며, 이러한 영향 아래서 金玉均, 朴泳孝 등의 급진개혁파가 형성되어 〈개화〉∙〈독립〉등을 표방하는 사상적 전개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계열은 사상 자체의 성격으로 보아 양무사상(洋務思想) 보다 한 단계 후에 나타난 일종의 변법적인 성격의 것이었고, 따라서 보다 진보적인 입장에 놓여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들은 국제정치적으로는 친일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되는데, 뒤에 일본의 식민정책이 현실화됨에 따라 결국 진보주의가 종속주의로 귀결되는 비극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개화사상은 멀리는 서양의 근대 자본주의의 아시아 진출과정과 함께 들어온 근대 시민사상과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가까이는 청의 양무사상과 일본의 문명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밖으로부터〉 수입되어 왔다는 외래적 측면이 일반적으로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그 후 개화사상은 〈안으로부터〉의 실학사상이 전화되어 형성 발전되어 왔다는 내재적 측면이 중시되었다. 따라서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관문제가 연구되어 朴趾源 중심의 북학파 계열, 丁若鏞 중심의 개혁파 계열, 徐有渠 중심의 개량파 계열 등이 각각 개화사상으로 전환하는 과정이 분석되었고, 그 교량적 인물로서 朴珪壽 · 姜瑋 · 申櫶 · 瑜宰焕 · 崔腥焕 · 吳慶錫 등의 인물이 부각되어, 그것이 예외적 특수현상이 아니라 일정한 역사적 추세였음을 보여주었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박규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이는 劉大致 · 吳慶錫 등을 중심으로 한 중인층 역할의 대두가 주목되었으며, 또한 불교 역할의 대두가 주목되었는데, 그것은 艸衣∙ 李東仁∙卓挺植 등 승려들의 개입이 매우 많았고, 후기 실학자와 초기 개화파 인사들 간에 호불인사(好佛人士)가 많아 1870년대를 전후한 시기의 사상계에 일정한 선풍(禪風)이 일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개화사상이 한편으로는 실학사상으로부터 전개되는 내재적 측면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 서양사조의 영향에 의한 타율적 측면이 함께 있어 자율과 타율의 갈등을 스스로 안고 있으면서 실제 1880년대 및 1890년대를 경과하는 동안 타율성의 일방적 강요로 자율성은 타율성을 불러들이는 유인 역할을 하기조차 하였다.
아울러 개화사상이 전통과 연속되는 내재적 측면에서 보수성이 생기고 근대서양 자본주의와 연결되는 외래적 측면에서 진보성이 생겨, 결국 이 양면을 하나로 종합한 것이 소위 〈동도서기〉 사상이다. 전통적인 도(道)는 지키고 근대서구적인 기(器)는 받아들이자는 논리이다. 이 논리는 온건 개화파들을 주류로 하여 거의 모든 개화사상가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러한 평가는 다소 환상적이다. 사실 전통적 도를 사회화하면 결국 양반사회요 경제화하면 지주 · 상인 체제이다. 또한 서양적 기는 서양의 근대를 이룩한 기본정신, 가령 합리주의∙민주주의 혹은 민족주의와 같은 가치가 아니라 외형적 결과로 나타난 국부와 강병이었다. 따라서 〈동도서기〉란 결국 전통적 지배질서와 이해관계를 온존시키면서 외형적 부국 강병을 이룩하려는 개량주의를 논리화한 것이었다. 이같은 기본시각 때문에 개화세력은 한편으로 위정척사파와 대립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학농민 세력과 대립되게 된다. 그러나 1890년대를 경과하면서 개화사상은 서서히 서양 근대의 기본가치로서의 민주주의∙민족주의를 이해 수용하게 되고, 민권운동에로 전진하여 가게 된다.
개화사상을 시기적으로 정리하자면, ⑴1870년대의 해외에 대한 지식을 가 져야 된다는 시기,⑵1880년대의 기술도입과 국가부강시기, ⑶1890년대에서 1900년대의 국권의 확립과 민권의 신장시기로 나눌 수 있을 듯하다.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를 중심으로 비롯되었던 개화의식 및 사상은 갑신정변, 갑오개 혁을 거치고 독립협회(獨立協會) ·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운동에 이르면 한 국민족주의 및 민주주의의 역사적 사상적 수원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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