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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 (Judaism)

유대교 Judaism

유대교의 실제적인 내용이 논쟁에서 문제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에서는 중요한 문제를 제시된다. 첫째로, 유대교는 마르크스에게 사회에 있어서의 종교의 역할-정부의 부속물인 기독교를 제외하고서-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그 당시에 민주적 급진주의로부터 사적 유물론으로 이행하고 있었다. 둘째로, 마르크스는 유대인이었으나 그 자신은 유대 사회로부터 거리를 두길 원했기 때문이다. 셋째로, 마르크스는 종종 반유대적이라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대부분의 문헌들은 뒷 부분의 두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
점차적으로 유력한 자유 로비활동으로부터 강한 지지를 받은 독일의 유대인들이 반세기 동안 그들의 유달리 억압된 지위를 폐지하고, 시민적 해방을 위한 운동을 펴기 시작한 후에 마르크스는 유대인과 유대교에 관한 논쟁에 끼어들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독일에서의 종교비판이 완성되었을 때 유대인들의 시민권에 대한 요구를 지지했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는 기독교 정부 체제 하에서 어떠한 구조적 변화도 사회질서의 기반을 닦는 데 있어 바람직하며, 부분적으로는 시민의 권리가 정치적 해방을 의미하므로 인간해방을 성취하는 데 있어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논쟁에는 자발적으로 끼어들지 않았다. 그는 슈트라우쓰[D.F. Strauss]의 저서인 《예수의 생애》(1837)에서 시작된 기독교의 탈신화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었다. 바로 여기에 이어 포이에르바하의 《기독교의 본질》(1841)과 바우어의 체계적인 신학비판이 뒤따랐다. 포이에르바하는 기독교신학을 본래대로 남겨두면서 논쟁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즉 그는 인간학적 개념에서 인간이 그의 영적인 자아를 상상의 신에 투사시켜 만든 것이 기독교적 신이라고 했다. 모제스 헤쓰는 ‘신학적 의’을 거부하고 인간조건을 사회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청년 헤겔파들에 대한 이러한 맥락의 종교적인 비판을 완성하였다(Hess 1843).
바우어가 유대인 해방에 대한 논쟁에 접하게 되었을 때, 그는 독일의 철학적 전통에 의한 추론방식을 따랐다. 18세기 후반기의 해방에 대한 요구에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던 피히테는 유대인들의 고립이 거의 그들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인간 존재로서 유대인들은 인간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정부 아래서 이교도로서의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이교에 대한 권리를 부정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이교에 대한 영식적 수용을 주장할 수는 없다. 《법철학》(1821)에 대한 유명한 주석에서 헤겔은 유대인들의 인간적 지위를 강조했다. 그러나 시민권리의 문제와 시민적 의무를 수용하는 것을 연결시켰다. 예를 들어, 만약에 유대인들이 군복무를 받아들이고자 하고 퀘이커인들은 그렇지 않다면 유대인들이 해방될 수 있는 우선권을 갖게 된다. 그러나 바우어는 피히테 따랐다. 두 편의 잘 알려진 논문에서(Bauer 183) 그는 부분적으로는 유대인들이 유대교로부터 스스로 벗어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그들 스스로가 자유로워지기를 원치 않으므로,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자유를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대인의 해방에 반대했다. 바로 이 점에서 마르크스는 바우어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 논쟁에 참여하게 된다. 헤쓰와 같이 그도 종교를 사회적으로 분석하기를 요구했으며, 유대인들이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는 유대교를 포기해야 한다는 바우어의 생각을 거부했다. 종교는 사적인 문제이고, 국가는 시민으로서의 개인에 관한 문제를 제외한 어떠한 것에도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바우어의 반론은 신학적인 것이었고 따라서 타당하지 못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회적인 문제도 있다. 마르크스는 수적인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1%) 유대인들이 그들의 인구비율을 훨씬 넘어서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면, 이것은 무역이나 상업에 대한 그들의 전통적인 관심, 즉 그들에게 실제적인 정치권력을 주는 데 대한 전통적인 관심 때문이라는 바우어의 견해에 동의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면들을 정리하여 경제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재력만이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을 줄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조직에 사회적이고 상업적인 가치들을 침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유대인들의 상업적 기능을 필요로 하게 되고 돈을 벌기 위해 ‘유대인화’될 것이다. 바우어가 주장했던 것처럼 유대인들의 민족적 우월주의를 지지하는 유대인의 배타성은 역사에 있어서의 어떤 입장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것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이와는 반대로 시민사회의 구조에서 근본적인 요인으로 유대인을 규정하는 역사적인 산물이다. 상인이나 혹은 도부장수로서의 그들의 사회적 역할을 포기하게 되거나 또는 국가 상업주의의 필요로부터 유대인들을 해방시키면, 유대주의나 그들의 종교적 전통의 신비한 이기주의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의 주요 주장은 《독불연감》(1844)의 중요한 문제로서 바우어에 관한 두 편의 논문에서 출발한다. 첫째 논문은 바우어의 신학적 입장이 좌절된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하여 예리하게 관찰한 것이다. 유대인과 유대교의 사회적 역할을 다루고 있는 두 번째 논문은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문제로 쓰여졌으며 19세기 상반기 동안에 유대인들의 삶의 경험적 문체로 쓰여졌으며 19세기 상반기 동안에 유대인들의 삶의 경험적 실제성이나 유대교의 지적 전통과 아무런 상관없는 가정과 주장들로 가득차 있다. 이 논문들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이것은 아무런 파문도 일으키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취한 관점은 그 당시의 유대인 신문에서 널리 알려진 관점으로서 해방에 대한 유대인의 주장에 대한 마르크스의 지지를 확인하였을 뿐이다(→Carlebach 1978). 매우 부정적이었던 두 번째 논문이 아무런 파문도 일으키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불손한 언어가 1940년대 당시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 같다. 19세기 후반의 유대인 해방투쟁의 성공적인 성과에 뒤이어 형식적인 반(反)셈족 운동의 출현과 더불어 새로워진 관심이, 마르크스주의의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에 의해서, 마르크스의 논문에 집약되었다. 마르크스의 논문에서는 특히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던 유대인들이 일정한 위치를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저서들이 쓰여졌으며, 그것은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노력을 쏟았다. 마르크스는 단순히 생물학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보다 의미있는 차원에서 유대인인가? 아니면 그는 반유대주의, 즉 유대인과 유대교가 국가나 사회계급의 이익과 부에 해를 끼친다는 반유대교 로비활동에 확신을 갖고 있었던 사람인가?
첫째 문제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를 규약에서 말하는 ‘예언자’나 유대교의 종족주의적 전통에 빠져 있는 세속적인 유대인으로 묘사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유대인, 즉 유대인 변절자로 묘사하기도 했다. 마르크스는 종종 종족 이론에 나타나는 모든 특징을 지닌, ‘종족’으로서의 유대인으로 기술되었다. 마르크스 자신은 그의 출생을 인정한 것 이외에는 이 문제에 대하여 전혀 언급한 바 없다. 히브리 예언자에 대한 문학적 평가를 제외하고는 마르크스가 유대인이었다는, 즉 유대적인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나치 시대의 출현과 유럽에 거주하는 유대인에 대한 대량학살이 감행됨으로써, 반유대주의에 관한 문제에 마르크스는 더욱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느 유대인 사회주의자가 말했듯이 143년에 있었던 유대교의 인간해방에 대한 요구는 도무지 일반화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1943년의 사건을 일으키는 데 하나의 처방전이 된 셈이었다. 비록 마르크스가 거리낌 없이 몇몇 유대인들에 대하여 모욕적이고 야비한 말을 사용했음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그를 반유대주의자로 간주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동시에 유대인에 대한 그의 두 번째 논문이 유대인을 반대하는 다양한 비난을 지지하는, 반유대적 견해를 선전하는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어 왔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마르크스 주장이나 대변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의 논문을 오용한 예는 그가 살아 있는 때부터 시작되었다.
유대인 및 유대교와 마르크스와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유대교에 대하여 제기한 가장 흥미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된 바가 없는데 그것은, 즉 유대교가 역사를 통하여 또는 역사와 무관하게 존속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헤쓰에 의해 정리되었는데, 그는 1862년에 유대인 문제에 대한 민족적 해결책을 부활시켰다(《로마와 예루살렘》). 그러나 19세기 말에 정치적인 시온주의가 출현할 때까지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것은 비록 적대적으로까지는 발전하지 않았다 해도, 민족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의 발전에 실질적인 공헌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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