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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적 사회] (Asiatic society)

아시아적 사회 Asiatic society

19세기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과 경험에서 볼 때 아시아 사회 분석은 중심적인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ꡐ아시아적 사회ꡑ 또는 좀 더 학술적으로 아시아적 생산양식(AMP, Asiatic mode of production)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주요한 개념적, 정치적 의의를 지닌다.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은 비유럽지역에 마르크스주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외에, 계급사회 및 혁명적 변혁과 세계사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의 특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ꡐ아시아적 사회ꡑ라는 개념은 매우 혼미한 상태에 빠져 있다. 만약 아시아적 사회의 사회경제적 특수성이 받아들여진다면 관례적인 역사적 이행단계-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학술상의 가설은 포기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타당성을 인정할 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서구의 역사가 동양에 비해 우월하다는 생각에 빠질 수도 있다. 이 경우 서구의 동적이고진보적인 특성이 정적이고 퇴보하는 동양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또 ꡐ동양적 전제군주에ꡑ라는 전통적 관념과 마르크스주의적 범주들을 구별하기 어렵게 된다. 아시아적 사회는 전횡적이고, 전체적이며 정체적이라는 믿음은 외부의 개입이 그 아무리 불행한 일이라 해도 그것이 내적인 변혁에 필수조건이 된다는 점에서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53년 영국의 외교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신문에기고하면서 처음으로 아시아적 사회의 분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뉴욕 데일리 트리뷴》지에 실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논문은 제임스 밀(《대영제국 지배 하의 인도 역사》, 1821), 프랑소와 베르니에(《대몽고제국 기행문》, 1670)와 리차드 존스(《부의 분배와 조세 부과 자료에 관한 소론》)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자료들을 근거로 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적 소유, 특히 토지의 사적 소유권 결여가 아시아적 사회에서 사회적 정체를 낳은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하였다. 아시아적 사회의 정치조직은 왕조 간의 투쟁과 군사적 정복으로 주기적으로 변화하였지만, 이것은 경제조직의 급진적 변동을 가져오지 못했다. 왜냐하면 토지 소유권과 농경활동 조직이 실제의 토지 소유자인 국가에 여전히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아적 사회의 정태적 본질은 농업과 수공업이 결합되어 경제적으로 자급자족 상태에 있는 고대 촌락 공동체의 강고한 공존에 근거한다. 이 공동체는 지리적, 기후적 요인 때문에 대규모 소로공사를 조정하고 개발하기 위한 중앙집권적인 통치기구를 필요로 하는 관개사업을 기반으로 하였다. 따라서 전제군주제와 정체성은 공공사업에서 지배적 역할을 하는 국가의 자급자족적이고 고립적인 촌락공동체의 존재에 의해 설명되었다. 이러한 아시아적 사회의 기초적인 설명은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완성된 저서를 통해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대해 보다 복잡한 견해를 제시함으로써 수정되고 확대된다. 《요강》에서 마르크스는 동양과 서양의 도시 역사에서의 중요한 차이점에 주목했다. 봉건제에서의 교환가치는 생산의 증대를 위한 지역으로서의 정치적으로 독립된 도시의 존재가 부르주아 계급과 산업자본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반면에 동양의 도시는 국가의 인위적 창조물이며 농업과 농촌에 종속적이었다. 즉 동양에서의 도시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에서 강요된 단순한 ꡐ왕족의 거주지ꡑ였다. 마르크스는 국가에 의해 상징되는 사회적 통일체의 실제 기반으로서, 자급자족적이고 폐쇄적인 촌락에 의한 토지의 공동체적 소유를 특히 강조했다.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원칙적으로 아시아 지역 밖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공동체적 소유의 한 형태로서 인식되었다. 공동체적 소유의 변형태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대해 《자본론》에서도 비슷한 접근을 하였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동양의 전제군제와 사회적 불변성의 궁극적 기반으로서, 아시아적 촌락의 자급자족성, 수공업과 농업의 일치로 되돌아갔다. 마르크스는 아시아적 정체성의 본질적인 특성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촌락 수준에서 행해진 생산의 단순성이며, 이것이 ꡐ아시아적 사회의 불변성에 내재된 비밀ꡑ이었다고 말한다. 이 공동체들의 잉여생산은 조세의 형태로 국가에 의해 전유되었으며, 결국 지대와 조세는 일치하였다.
비록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분석에 사적 소유의 결여, 관개사업에 있어서 국가의 지배적 지위, 촌락의 자급자족 경제, 수공업과 농업의 일치, 생산방법의 단순성 등 아시아적 사회의 본질적 특성에 대하여 상당한 정도의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이러한 다양한 특징의 초점은, 서구의 발전과 관련하여 아시아적 사회의 정체성을 인정하면서 자본주의적 발전을 초래하였던 유럽의 봉건제에 내재했던 요소들과는 동일시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동양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아시아적 사회는 과잉 발전된 국가기구와 벌전이 뒤진 ꡐ시민사회ꡑ라는 특징을 갖는 반면에, 유럽은 그 반대의 특징을 나타낸다. 아시아적 사회에서는 부르주아의 계급의 출현과 밀접히 연관된 사회적 장치들, 즉 자유시장, 사적 소유, 길드구조와 부르주아적 법제 등이 중앙집권적 국가의 시민사회 지배로 인하여 결여되어 있었다. 사적 소유의 결여는 사회변동의 동인으로서의 사회계급의 발전을 배제했다. 촌락 수준에서 모든 거주자들은 ꡐ총체적 노예제ꡑ국가에 존재하는 피착취계급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시아적 사회내의 지배계급을 판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계급관계의 원시적 형태로 간주했던 카스트 제도는 분명히 중국, 터키와 페르시아의 분석에는 적절하지 못했다. 사회변동의 내재적 메커니즘이 결여된, 마르크스의 인도에 대한 분석은 아무리 그의 의도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영국 제국주의가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해체를 촉진했던 주요한 외생적 힘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뉴욕 데일리 트리뷴》지의 기고문 등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토지의 사적 소유를 창출함으로써 영국이 정체된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해체시키고 인도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혁시켰다고 논했다. 철도체제, 자유언론, 근대적 군대와 근대화된 통신체제 형태가 인동에 있어 사회적 발전을 위한 제도적 틀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문들을 기초로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문들을 기초로 해서 아비네르는 1969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에서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은 제국주의 형태들이 광범위하면 할수록 근대화는 더욱 더 필연적이다 라는 가정을 이끌어낸다고 주장하였다. 아시아적 특수성은 비록 암묵적이지만, 궁극적으로 제국주의적 팽창을 정당화하는 논거를 제공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주 이러한 특수성 개념을 타파하기 위해 논쟁해온 것은 아시아적 생산양식이 강한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은 타파, 부흥 일신이라는 오랜 역사를 겪어왔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1859)의 서문에서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ꡐ사회의 경제적 발전에서 진보한 단계ꡑ의 하나로 다루었다. 반면에 엥겔스는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1884)에서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개념의 중요성은 러시아의 혁명투쟁을 배경으로 하여 벌어진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에서 다시 제기되었다. 러시아 사회의 특성을 봉건제, 자본주의 또는 아시아적 사회로서 어떻게 개념화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정치적 전략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53년 초에는 짜르 치하의 러시아를 ꡐ반(反)아시아적ꡑ이라고 언급했다. 엥겔스는 《반듀링론》(1877)에서 동양적 전제군주에의 기반으로서 고립적인 러시아 공동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1877년부터 1882년까지 마르크스는 《조국의 기록》의 편집진이던 자술리치, 그리고 엥겔스에게 러시아 사회구조와 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개괄적인 견해를 보여주는 수많은 편지를 썼다. 문제는 러시아 공체가 사회주의의 기반을 제공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정치적 발전을 사회적으로 방해하는 대표적 장애물인가 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아직 농촌지역 깊숙이 침투하지 못한 곳에서는 러시아적 공동체가 사회주의를 위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덧붙여 러시아의 혁명은 유럽의 노동자계급의 혁명과 동시에 일어나야만 한다고 했다. ꡐ반아시아적ꡑ 사회로서 러시아의 문제는 혁명 전략에 관한 논쟁에서 지속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러시아 역사에 대한 인민주의자들의 유토피아적 견해를 배격한 플레하노프, 공동체를 러시아 절재주의의 기반으로 간주했고, 토지국유화 제의를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동양적 전제군주제의 복귀라고 공격했다. 아시아적 사회에 대한 이러한 논쟁들은 결정론적인 단선적 역사관 내 복선적 역사관의 문제에 달려있었다.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타당성은 복선적인 접근에 중요한 논거를 제공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적 단계들이 필연적 법칙에 따라서 계기적으로 이어진다는 기계론적 진화 도식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원시공산제, 노예제, 봉건제, 잔본주의, 사회주의의 단선적 도식은 1931년 레닌그라드 회의에서 아시아적 사회 분석에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적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결정한 이후 우세를 보이게 되었다. 이 결정은 기계론적 단선적 역사관에 대한 스탈린의 집착에 의해 확고해졌다.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배격은 아시아적 사회들이 이후 노예제 또는 봉건제의 범주 속에 포섭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후 시기에 아시아적 사회에 대한 토론은 비트포겔[Wittfogel]의 저서 《동양적 전제군주제》에 의해 자극받았다. 비트포겔의 경험적 견지에서, 중국의 사회구조에 있어 관개(灌漑)의 중앙집권적 관리가 갖는 함축에 대하여 관심을 두었다. 《중국의 경제와 공동체》에서 비트포켈의 소력경제에 관한 연구를 고무한 것은, 베버가 중국 역사에 ꡐ가산관료제ꡑ라는 개념을 적용한 것으로부터였다. 비트포겔에 있어서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은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하게끔 했다. 첫째로, 그것은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에 대한 전체적인 문제였다. 관개사업의 공적 소유권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구저에 대한 그의 ꡐ문화지리학ꡑ적 연구는 인간집단들을 자연과 연결시키는 생산적 노동의 기초과정에 초점을 두었다. 둘째로, 지배계급이 생산수단을 소유하지는 못하면서 관료계급으로서 국가기구들과 경제를 통제하는 사회가 존재할 수 있었는지 여부의 문제였다. 이후 비트포겔은 ꡐ전체주의 권력의 비교 연구ꡑ로서 1957년에 《동양적 전제군주제》를 출간했다. 사적 소유권 없이 행정기관을 통제하는 지배계급이라는 견해는 정치권력이 짜르 시대로부터 스탈린의 러시아에까지 계승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되었던 까닭에, 1931년 이후 공산주의 지도층이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을 억눌렀다고 하는 이 연구의 주장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당의 관료체제가 전통적 전제군주제가 존석되었다는 것이다.
탈스탈린화 과정은 1960년대에 다시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알튀세[Althusser]와 같은 ꡐ구조주의적ꡑ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사적 유물론의 과학적 위치를 다시 강조하였다. 다양한 생산양식 속에 존재하는 축적 법칙에 대한 자세한 공식은 전통적인 사회과학의 근대화와 발전이론들에 대해 엄밀한 마르크스주의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도록 했다.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대한 관심은 주변부 경제에 대한 자본주의적 팽창의 영향을 파악하기 위해 종속(→종속이론), 불균등 발전과 저개발(→저개발과 발전)이라는 개념들을 제시한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 보다 일반적 흐름의 한 양상을 보여준다.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빈번히 단선적 발전단계론에 대한 대안으로서 유용하게 제시되었다. 더욱이 노예제와 봉건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아시아적 사회가 특수한 측면들을 갖는다는 생각은 동양적 사회의 특수성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이른바 이론적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적 사회와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은 문제점으로 남아 있다. 봉건적 생산양식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적용하는 것은 이 지역의 사회들이 갖는 경험적 복잡성과 다양성을 포괄적으로 인식하는 데 막연하다는 이유로 빈번히 비판받아 왔다. 사실 ꡐ아시아적 사회ꡑ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로 막연하고 불확실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예를 들면 비트포겔은 짜르 치하의 러시아, 송조(宋朝)의 중국, 중세 이집트, 이슬람 지배기의 스페인, 페르시아, 하와이 기타 등등, 발전과 체제면에서 극도로 다양한 차이를 나타내는 각양각색의 사회들을 ꡐ水力社會ꡑ라는 단일한 개념으로 포괄하였다. 마르크스도 역시 중국과 인도 외에 스페인, 중동, 자바와,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되기 이전의 아메리카를 설명하는 데 ꡐ아시아적 사회ꡑ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은 공동체적 소유와 자본주의적 시장관계가 결여된 자급자족적 촌락에 기반을 둔, 거의 모든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사용되어 왔다. 특정한 사회들에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적용하는 데에는 수많은 경험적 난점들이 있고, 이론적으로도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풀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예를 들면 자급자족적이고 자치적인 촌락들이 촌락경제에 개입하는 중앙집권적 국가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것 등이다. 게다가 아시아적 사회의 사회적 특징은 생산관계 의해서라기보다는 대규모 관개사업과 관련된, 순전히 기술적 요인에 기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시아적 사회에 관한 이론은, 생산관계는 생산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적 유물론과 양립할 수 없는 기술적 결정론에 관한 가정들을 내포한다. 결국 아시아적 사회에서 국가의 기원에 관한 설명은 수많은 문제를 제시한다. 계급투쟁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국가는 정복의 결과, 또는 공공사업과 관련된 국가의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설명되어야만 한다.
ꡐ아시아적 사회ꡑ의 문제는 사실 이러한 학술적 문제들이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심원하다.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그 이론적 역할이 아시아적 사회를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이론 특 내에서,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생성되는 기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소극적 중요성을 갖는다. 따라서 아시아적 사회는 역동적인 유럽과의 일련의 차이, 즉 사적 소유의 결여, 중간계급의 미성숙, 도시의 미발전, 부르주아적 제도들의 결여에 의해 정의되었다. 따라서 ꡐ아시아적 사회ꡑ는 헤겔, 몽테스키외, 홉스를 거쳐 그리스 철학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동양관에 대하여 마르크스주의입장에서 견해를 밝힌 것이 된다. 마르크스주의는 유럽의 절대주의에 관한 논쟁에서 만들어진 전제적 지배에 대한 전통적 논의상의 용어를 물려받았다. 때문에 ꡐ아시아적 사회ꡑ는 서구 철학 내에서 주목할 만하지만 끊임없이 해악을 끼쳐온 동양학의 전통 속에 흐르는 핵심적인 본질이라고 간주되어야만 한다. (→비자본주의적 생산양식, 토지소유와 지대 : 발전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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