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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주의] (Stalinism)

스탈린주의 Stalinism

주로 스탈린이 최고 권력을 장악한 1920년대 후반부터 195년 사망할 때까지의 소련 정권의 본질을 말한다. ꡐ스탈린주의ꡑ란 말은 그의 생존시 소련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았고, 더욱이 그가 죽은 후에도 소련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죄과를 공공연히 비난한 1956년 제 20차 소련 공산당 전당 대회 이래로 ꡐ스탈린주의ꡑ나 ꡐ스탈린주의자ꡑ라는 말은 조잡하면서도 매우 경멸적인 의미와, 특히 좌파 쪽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고 또한 이 말들은 좌익 편향의 개인이나 정권에 의한 독재적, 임의적, 억압적 행위 양식을 의도적으로 나타낸다.
스탈린주의의 첫 번째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4반세기 동안 스탈린이 휘두른 절대권력이다. 스탈린주의는 명백히 스탈린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었고 따라서 러시아 역사의 맥락,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조건, 볼셰비키 정권이 전술한 스탈린의 절대권력 획득에 앞서 수년 동안 직면했던 문제들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볼셰비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이름을 가진 정권의 특수한 성격을 규정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그리고 그가 지배했던 말년에 가서는 광대놀음으로까지 발전해버린 ꡐ개인숭배ꡑ는 그가 휘두른 권력의 범위에서 빚어진 예리한 반영 결과이다.
1929년부터 1933년까지의 초기 국면에서 스탈린주의는 소련 사회 변혁의 기초를 공업국가에 두도록 계획된, 스탈린 자신이 ꡐ위로부터의 혁명ꡑ이라고 부른 것을 뜻했다. 그 ꡐ위로부터의 혁명ꡑ의 한 단면은 대다수 농민을 곡가 집단농장으로 데려온 소련 농업의 ꡐ집단화ꡑ로 나타났다. 이 정책은 농촌에서 맹렬한 저항에 부딪혔으나 거침없는 결정과 놀랄만한 인적, 물적 대가를 치르고 수행되었다. ꡐ위로부터의 혁명ꡑ의 또 다른 측면은 1929년에 채택되고 다음 해에 추진된 제1차 5개년 계획에서 제안된, 지나치게 야심적인 중공업화 계획으로 나타났다.
이 정책은 극도의 권력집중, 모든 불평에 대한 억압, 그리고 국가명령에 대한 사회의 모든 면에서의 완전한 복종이 없었다면 실행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향으로 기울 경향은 스탈린이 최고 권력을 양도박기 전에 이미 gut보이고 있었다. 결국 스탈린주의는 이것을 엄청나게 강조하였던 것뿐이었다. 공산당 자체는 스탈린의 의지에 따르는 복종적인 기구로 전환되었고, 외국 공산당들도 스탈린이나 그의 참모에 의해 결정된 정책이면 무엇이든 간에 따르거나 방어하도록 요구되었다.
스탈린 혁명의 최초 국면은 1934년에 가서야 끝났다. 바로 그 전해의 소동 이후 시간은 보다 더 교묘히 예정된 형태의 전개와 국가권력의 임의적 억압으로 환원되기에 성숙한 때를 맞이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수백만의 소련 시민이 ꡐ전면적인 테러ꡑ에 휘말려서 볼섹비키 혁명을 주도했던 거의 대부분의 주요 인물들이 몰살당한 것은 바로 그 다음해의 일이다. 이 해에 가장 장관을 이루었던 모습(죽음이라는 문자 그대로)은 일련의 재판이었다. 이 재판에서 부하린,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등과 같은 ꡐ볼셰비키의 제1세대ꡑ들은 트로츠키(1929년 이래 소련에서 망명)나 외국 정보기관과 함께 소련저어권의 전복, 자본주의의 회복과 소련의 해체를 계획하는 데 공모하였다 등 터무니없이 많은 좌파를 공개법정에서 자백한 것이었다.
그 당시와 또 그 이후에 행해진 억압의 독특한 양상은 그것이 소련의 모든 ꡐ권력엘리트ꡑ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그 광범위함에서 찾아지는데, 여기에는 행정, 군사, 과학, 문화 그리고 그 외의 간부들, 적지 않은 경찰과 보안기구 그 자체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련 엘리트는 정권에 의해 상당한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특권에 대해 지불한 대가는 그동안의 잘못에 대한 갑작스런 체포, 유형, 죽음의 위험이었다. 이러한 체계 하에서, 소련 사회의 관료주의적 수직체제의 비정상적인 급속한 발전이 가능하게 됐는데, 이는 탄압에 의해 공백이 생긴 방대한 수의 자리들을 채우기 위한 필요성 때문에 빚어진 결과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채워진 사람도 똑같이 억압당하기가 십상이었다. 역사상 어떤 정권도 그 정권이 전에 등장시켰던 사람들 중 그렇게 많은 수를, 그토록 살인적인 잔학성을 띠고 내팽개친 적은 없었다.
그러나 1939년까지는 많은 경제?사회적 발전과, 적어도 해외에서 보면 소련 정권의 억압적이고 임의적인 면을 희미하게 하도록 하는데 크게 도움을 준, 눈에 띄는 업적을 남겼다. 1936년 스탈린 헌법(ꡐ세상에서 가장 민주적 헌법ꡑ인)의 공포와 같은 사례가 거기에 속한다. 그러나 아마도 그 정권의 부정적인 면을 감추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의해 취해진 공격의 위협과 소련 정권의 파시즘 반대입장이었다.
ꡐ스탈린화ꡑ된 코민테른(→공산주의:인터내셔날)은 1928년에서 1935년까지 모든 공산당에게 사회민주주의자는 노동계급의 가장 위험한 적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ꡐ사회적 파시스트ꡑ이다라고 선언하는 정책을 제시했다. 이것이 모든 곳에서 노동계급운동을 크게 분열시켰으며, 독일에서는 나치즘의 승리에 기여했다. 그러나 1934년 소련은 국제연맹에 가입했으며, 공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급진주의자, 자유주의자, 그리고 선한 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들은 파시즘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수호하는데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ꡐ인민전선ꡑ의 필요성을 1935년에 선언한 코민테른에 의해 채택된 새로운 ꡐ노선ꡑ과 결합시켰다. 4년 안에 반복된 파시스트 공격에 의해 주목받게 되자 소련은 많은 사람에게 파시즘에 대항하는 가장 견고한 보루로 보였다. 사실상 이것은 거의 유일한 경우였으며, 영국과 프랑에서는 유화정책을 펴고 있었다.
이 이미지는 1939년 8월에 체결된 나치-소련 불가침 조약에 의해 심한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히틀러가 1941년 6월에 소련을 공격했을 때 곧 잊혀졌다. 소련군과 소련 인민의 영웅적인 투쟁은 파시즘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이 전쟁으로 소련은 약 2천만 명의 인명 피해와 말할 수 없는 참화를 입었다. 다른 한편으로 전쟁에서의 승리는 소련의 안전보장에 대한스탈린의 관심이, 인접한 국가 중에 소련에 우호적인 정권이 수립되기를 바라는 입장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동쪽의 폴란드와 발틱 국가들은 이미 1939년에 소련과 합병되었다. 스탈린의 호감을 살 수 있는 정권들은 전쟁이 끝날 무렵 폴란드, 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그리고 동독에서 나타났다. 정식 과정을 거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적어도 냉전의 충격 아래서 이들 정권은 전체적으로 ꡐ스탈린화된ꡑ 형태를 띠게 되었다.
전쟁의 호된 시련이나 승리도 소련 자체 내 스탈린 정권의 속성에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했다. 반대로 그 정권은 여전히 억압적이었고, 노동력 분야에서는 다시 전쟁에서 돌아온 포로로부터 새로이 충원을 하였는데 노동자들은 독일의 강제 노동에서 본국으로 돌아왔다. 전쟁이 끝난 바로 다음 해는 지식인과 모호한 사상의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와 함께 지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분야에 스탈린주의의 정통성을 부과하도록 계회된, 더욱 심한 캠페인으로 두드러졌던 해였다. 그들 중에서 특히 유대인, 지식인, 예술가 등 ꡐ뿌리없는 코스모폴리탄ꡑ으로 비난받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억압과 테러가 더 이상 광범위하게 번지지 않도록 방지한 것은 1953년 5월의 스탈린의 죽음뿐이었다.
교의적인 표현으로,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공식적인 국가 이데올로기로 전화시키려는 시도에 의해 특징지워지는데, 그 주요 교의와 규범은 스탈린에 의해 권위주의적으로 규정되었으며, 이것은 무조건적으로 의문을 배제하는 복종을 강요하였다. 이 스탈린주의의 정통성이 표현되어 있는 가장 유명한 문서는 《소련 공산당 소사》로서 1938년에 처음 발간되고 상황이 요구하는대로 적당한 변화와 함께 자주 재출판되었다. 발간할 당신 ꡐ변증법적 및 사적 유물론ꡑ에 관한 부분만 스탈린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전쟁 후 스탈린이 그 책 전체의 저자로 알려졌다. 어쨌든 이 책은 스탈린 시대의 공식적 진리에 대한 역사적, 철학적, 정치적 대요를 제공하였다. 스탈린은 또한 때때로 역사와 경제학에서 언어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론적인 분야에 관여했다. 그의 막료들도 역시 그러했다. 스탈린의 의견과 그들의 의견은 역시 모든 소련 시민을 구속하고도 남았다.
스탈린주의에 대해서는 수많은 교의가 지적될 수 있다. 아마도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ꡐ일국 사회주의ꡑ 건설이 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트로츠키가 주장한 모험주의적인 국제주의와도 상호 반대되었다. ꡐ일국 사회주의ꡑ는 강한 민족주의적 함축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레닌이 일찍이 ꡐ대 러시아 국수주의ꡑ라고 비난했던 것을 오히려 앙양시켰다. 또 다른 스탈린 교의는 국가는 마르크스 교리대로 ꡐ소멸돼 가도록ꡑ 기대하기 전에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두 번째 문제와 관련되는 스탈린주의의 세 번째 교의는 계급투쟁은 사회주의가 진보함에 따라 격렬하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스탈린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관련성에 관한 문제는 격렬한 논쟁의 주제가 되어오고 있다. 스탈린주의자와 그리고 또한 우익에 속하는 마르크스주의 반대자에 의해서 다같이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직접적 계승이거나 혹은 ꡐ응용ꡑ이라는 주장이 일곤 한다. 이 주장이 수용되는 듯이 보일 수 있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스탈린이 정권의 ꡐ사회주의적ꡑ 기초를 유지하고 확대했다는 점, 즉 경제활동 수단의 공적인 소유에 있다. 이것은 또한 스탈린주의를 반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 정권의 본질을 설명하거나, 그 정권이 ꡐ불구의 노동자 국가ꡑ, ꡐ국가 자본주의ꡑ의 한 형태로 간주되어져야 할 것인가, 혹은 ꡐ관료적 집단주의ꡑ로 간주되어야 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데서 겪었던 어려움의 주된 이유였다(→트로츠키주의). 마르크스주의의 계승 혹은 ꡐ응용ꡑ으로서의 스탈린주의라는 관점에 반대하여, 스탈린주의는 모든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기초저긴 전제와 모순되며 그 중에서도 특히 사회를 전제적인 국가에 총체적으로 종속시켰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모순된다고 말할 수가 있겠다.
스탈린의 후계자들은 스탈린으로부터 상속받은 정권의 주요한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대중탄압과 테러에 종지부를 찍었다. 결국 스탈린주의가 스탈린의 죽음과 함께 끝나버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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