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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편찬 ] (historiography)

민족국가와 역사에 대한 기록이 부족한 독일인들은,《독일 이데올로기》(Ⅰ부 IA절)에서 언급되었듯이, 프랑스인들 이나 영국인들처럼 과거에 대한 실제적 사고를 하지 않았던 까닭에, 역사의 동인을 종교로 생각하였다. 마르크스는 계속해서, 랑케와 같은 독일의 가장 저명한 역사학자조차도, '튀어나온 작은 뿌리나 캐고, 값싼 일화나 파는 등, 모든 거대한 사건들을 왜소화하고 이를 천박한 원인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빈약한 시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1864년 9월 7일). 독일인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 기조[Guizot]는 영국 혁명에 대한 연구에서 1789년 혁명과의 유사성을 인식함으로써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주었던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는 곧 기조의 취급 방식에서 너무나 편협하고 정치적이라는 단점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역사를 기술하는 것뿐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론에 있어서도 엥겔스는 분명히 그의 친구인 마르크스에 비하여 좀더 천부적인 역사가였다. 그가 듀링을 비판한 데서도 나타나듯이, 역사가들의 역사 과정에 대한 몰이해는 그 당시에 범해진 많은 오류 중의 하나였다. 엥겔스는 듀링의 저술을, '무대의 시끄러운 장면의 배후에서' 드러나지 않은 계속적인 진화를 간과하는, 무지와 결점투성이의 혐오스러운 기록이라고 비난했다(《반듀링론》1부 11장, 2부 2장). 이 책에서 그는 또한 정치경제학은 부단한 물질적 변화를 취급하는 것이므로 역사과학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앞의 책, 2부 1장). 엥겔스는 메링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컨대 영국의 몇몇 역사가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역사를 종교적이나, 법률적, 정치적인 것 등 몇몇의 독립적인 부분들로 결합된 것으로 이해했던 나쁜 습관을 깨닫게 되었다고 불평하였다. 엥겔스는 1524∼25년 사이에 독일 농민전쟁에 대한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 기존의 접근방식을 통해서는 과거의 출판물들과 마찬가지로 예견된 명제들을 입증할 수 있는 어떠한 진리도 찾아질 수 없다고, 스스로를 비판했다. 후에 그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절차상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함으로써 생애의 말년에 와서《농민전쟁》을 완전히 수정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에게는, 사려 깊은 준비를 무시했던 오스트리아 학파에 의해 더욱 악화된, 경솔한 작업방식으로 인해 신랄한 비판을 받아야만 할 카우츠키라는 제자가 있었다. 엥겔스는 1885년 7월에 베벨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사실적이고 과학적인 작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갖고 있지 못했다고 썼다. 카우츠키는 엥겔스의 지도 하에 많은 도움을 받았고, 중요한 저서들도 쓰게 되었다. 엥겔스는 사건들, 그 중에서도 특히 군사적 사건을 대하는 데 있어서, 역사적 지식이 매우 실제적인 영향력을 끼친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또한 비마르크스주의자들이 쓴 역사 기술방법에 대하여 통찰력 있는 기술을 하였다.
파리 노동자들의 봉기가 일어나고,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나폴레옹 Ⅲ세를 추방했던 1848년의 6년 후인 1854년에, 시이저의 애국심을 찬미하는 몸젠[Mommsen]의 작품이 나왔는데, 엥겔스는 이것이 독일 사회를 구하기 위해 줄리어스 시이저를 숭배하도록 고무하였다고 논평하였다.(1908, p.168)
러시아에서는 레닌과 같은 지도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역사를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취급하였다. 신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위하여 과거를 기록한 보쑤에[Bossuet]로부터 레싱, 피히테, 셀링, 헤겔 뿐만 아니라, 노골적인 신부주의나, 너절한 것들도 모든 것을 애매모호하게 했던 사료 편찬과 다른 사회과학을 통해 지속된 관념론에 대해 부하린은 자주 언급하였다. 1917년의 혁명 이후에는, 다른 모든 분야에서처럼,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정리되어야만 했다. 1925년에, 기존의 볼세비키와 역사가 포크로프스키[Pokrovsky]의 지도적인 역할로, 학자들과 정부를 중개하여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협회(a Society of Marxist Historians)를 결성하였다. 1978년에 엔튼[Enteen]은 포크로프스키가 기존 학파의 영향력을 통제하여 마르크스주의자와 비마르크스주의자들 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성숙시켜 나갔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1928년 경부터 이것은 극히 어렵게 되었고, 도이처도 말하였듯이, 1931년부터는 스탈린의 과도한 개입으로 공존의 희망은 사라지고, 야심적이고 열정적인 계획의 일환으로서 소련의 사료 편찬은 시작되었으며, 기묘하고 조잡한 스탈린주의 신화의 개요를 모델로 하여 직접 스탈린의 후원으로 볼세비키 당사가 쓰여졌다. 도이처는 계속해서 '서구의 사료 편찬이 전적으로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소련권 최초의 공정한 역사가'로서―비록 처음에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받을 수 있는 지원에 못 미치는 대우를 받았으나―특히 카아[E. H. Carr]를 존경했다.
역사가 선전을 위해서 왜곡되는 경우는 비단 소련에서만 있던 일은 아니었다. 그람시를 투옥시켰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19세기의 유럽과 이탈리아에 관한 크로체의 중요한 역사학적 저술에서 표현된 경향을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람시는 크로체가 1815년에서 1871년 사이의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 그리고 절대주의 시대의 투쟁들을 생략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했다. 현재에 관해 독자들이 비혁명적인 생각을 갖도록 조종하려는 의도 하에 고안된 그러한 선택은 독자들을 파시즘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비록 냉전 시기에 있어서 서구 학자들이 자부했던 객관성이 미국에서, 그리고 또 이보다는 미미한 정도로 유럽에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서서히 회복되어 갈 때 이루어졌던 서구의 비판에 대해서 소련의 대변인들이 응수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에 대한 반격은 소련의 다민족 정책에 대해 미국에서 번져나가는 문헌들에 모아졌다. 우크라이나인들에 대한 선전이나 중앙아시아의 민족주의자를 이주시켰던 사실들을 왜곡하는 것, 그리고 미국의 서부에서 인디언들을 희생시켜 이룩한 '식민지화'처럼 곡물생산에 있어서 코자크인들을 동원한 것에 대한 왜곡된 표현들이 비난을 퍼부었던 한 저술가도, 다른 한편으로 1920년대의 혼란기에 쓰여진 소련의 저술도 역시 흔히 무비판적이었음을 인정한다. 과학으로서의 소련역사는 아직 유아기에 놓여있다. 보다 일반적으로, 소련 작가 콘[I. S. Kon]은 1960년에 선험(先驗)적인 것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서의 기독교적 역사 철학을 희생시키려 한 자끄 마리뗑[Jacques Maritain]이나, 세계를 비관론적으로 평가 절하하여 이를 영원히 비교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 베르자예프[Berdyaev] 등 서구의 사가들을 반동적이며 종교적인 사상에 굴복한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집합적이고, 독립적이며, 자기 내포적인 "문화"(슈펭글러), "문명화"(토인비)나, 로탁커[Rothacker]의 표현처럼 "삶의 유형" 이라는 개념들을 선호하는 것, 그리고 모든 역사가나 모든 세대는 과거에 대해 개인적인 이미지를 가질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베어드[Beard] 류(類)의 상대주의를 선호하는 한, 서구에 있어서의 진보적인 전망은 포기될 수밖에 없다고 콘은 주장했다(Kon, 1960).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베버주의자들 사이의 계속되는 논쟁을 결합시키려고 한 소련의 비평가 글레저만[Glezerman]은, 이들 추상적인 개념이나 정신적 구조물은 봉건주의나 자본주의에서 보다 더 나아진 것이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마르크스의 생산양식이라는 역사구분에 대항하기 위해 계획된, 세계역사에 대한 토인비의 이론은 사회경제 구성론과는 독립적으로 이에 대체된 '문명화'라는 개념으로 간주한다. 또한 그는 한 예로, 1956년의 제3세계 사회학회에서 일련의 부르주아 학자들이 어떠한 역사적 과정에 대한 사상이나 발전도 포기하고, 다만 이를 '변화'라는 중립적 개념으로 대치시켰다고 지적하고 있다(Glezerman, 1960, pp.179, 183∼4).
프랑스를 역사 편찬국들 중 지도적 위치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 잡지 애널스《Annales》에 의해 어떠한 반계몽주의나, 흐름을 정지시키려는 타성이나 경향성들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형성되었다. 이 잡지는 내전 시기에 마르크 블로흐[Marc Bloch]와 루시엥 페브르[Lucien Febvre]의 노력으로 창간되어,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의 알찬 운영으로 1950년대와 60년대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 잡지는, 지도적인 사회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이 지니는 원대한 전망을 제시하면서, 모든 무지하고 편협한 사유방식에 대항하여 투쟁하였다. 또한 이 잡지는 탐구정신을 강하게 촉진시켰고, 모든 종류의 새로운 사색과 실험적 방법에 용기를 주었으며, 마르크스주의가 독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소련의 판에 박힌 사고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짐으로써 신선한 영양분을 받아들였다. 영국에서도 1952년에 역사와 역사사상에 대한 잡지인《과거와 현재》가 발간됨으로써, 비슷하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였다. 이 잡지는 한 공산주의자 그룹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특정한 마르크스주의 조직은 아니었고, 냉전으로부터 죄어들어오는 편견들을 이성적이고 진보적으로 극복하였다. 후기에 이르러 이 잡지는 초창기보다 좀더 자유주의적으로 발전하였고, 영어권 국가들간에 특별한 지위와 명성을 얻으면서 마르크스주의 서적들을 자국에 번영하는 잡지로 남게 되었다. 폭넓은 토론과 사상의 교환에 힘입어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서구적인 사료 편찬에서 나타난 다른 입장들 사이의 간격은 매우 줄어들었으며, 이제는 특히 전자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후자가 '생명의 역사'나 '정신분석의 역사'와 같은 어떤 새로운 접근점에서 일치하고 있으나, 마르크스주의적 방법론에서는 이것이 거의 조정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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