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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Benjamin, Walter)

1892년 6월 15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1940년 9월 27일 스페인의 포르트부에서 사망하였다. 벤야민은 아마도 마르크스주의 전통 내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 이론가일 것이다. 그는 생전에 거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2차 대전 이후 폭넓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의 저서에 나타난 엄밀한 함축성은 그를 거의 신비적인 재능을 부여받은 초세속적인 비극적 인물로 보는 사람들과, 그의 빈틈없는 마르크스주의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 사이에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벤야민의 최초의 저서는 신학에 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의 최초의 주요 논문인 괴테의 소설《선택적 친화력》에 관한 논문은 20세기 초 문화이론의 초(超)도덕주의적 상징주의를 자신의 청교도적 윤리학과 대비시키려는 시도였다. 이것은 박사 논문인 '독일 비극의 기원'에서 17세기의 루터 교회식의 드라마에 비교되는 것으로 보였던 지적 생활의 비정치적 '금욕주의'에 대한 원숙한 비판으로 발전하였다. 벤야민이 33세 때에 완성한 이 논문은 그의 저서 중에서 가장 포괄적인 이론서였다. 그러나 그가 말했듯이 그것은 '독일문학의 순환의 마지막'이였다.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벤야민은 거의 전적으로 문화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이해로부터 제기된 문제들에 전념하였다. 그 관점으로부터 학문적인 문학사의 정전(正典)은 단지 부수적인 역할을 할 뿐이었다. 이러한 변화에는 외부적인 요인이 작용을 했는데, 벤야민이 논문을 제출한 프랑크푸르트 대학이 그 논문을 거부함으로써 대학 강단에의 희망이 깨지게 된 것이었다.
1925년과 1933년 사이에 벤야민은 잡지의 문예란에 기고하여 주로 그것으로 생활하였으며, 브레히트와 그 당시의 여러 좌익지식인들과 친분을 갖게 되었다. 그는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기로 결정은 했지만 1926∼27년 겨울에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새로운 소비에트 국가의 문화생활에 대해 깊은 관심과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그 당시 쓰여진 그의 활기차고 논쟁적인 기고문(주로 평론)에 반영되어 있다. 나치가 집권하자 벤야민은 베를린을 떠났으며 따라서 대부분 기고문의 원고료에 의존하던 생계수단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프랑크푸르트 사회문제연구소의 연구위원직을 얻을 수 있었으며, 여기서의 수입과 다른 곳에서 나오는 약간의 수입으로 파리에서 저술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연구소가 발행하는 간행물에 여러 편의 이론적 논문을 발표하였다. 첫 번째 논문 '프랑스 작가의 현 사회적 위치'는 조직화된 정치적 관련 속에서 순수한 문화적 선구자들로부터 부르주아 지식인들―벤야민 자신과 같은―의 발전과정을 분석하였다. 연구소를 위한 그의 논문의 나머지 대부분은 그가 계획한 19세기 프랑스 이데올로기, 즉 소위 '아케이드'(Arcades) 콤플렉스와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기계적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논문은 '예술'은 기술 및 사회계급의 환경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 논문과 에드워드 푸치에 관한 기고문에서 벤야민이 전개한 기술 이론은 그가 이념과 문화는 별개의 역사를 가지지 않는다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을 이해하는데 근본적인 것이었다. 보들레르에 관한 두 편의 논문―그 중 '보들레르에 있어서 몇몇의 주제에 관하여' 만이 그 당시에 출판되었다―은 계급과 기술 그리고 문화에 대한 그의 이해를 파시즘과 반동적 이데올로기 일반에 대한 폭넓은 비판으로 완결짓고 있다. 벤야민은 후기의 주요 단편 논문을 주로 프로이드와, 루드비히 클라제의 파시스트적 인류학에 의존하였다.
따라서 벤야민 자신이 출판할 목적으로 작성한 단 한 편의 논문―벤야민의 사상의 일관된 발전을 보여주는 논문―만이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그가 가장 직접적으로 쉽게 동화될 수 있었던, 마르크스주의적 및 브레히트적 입장으로부터 그를 분리하도록 상당한 압력이 있었다. '독일 비극의 기원'의 모호성과 초기의 비공개 단편 논문들을 이용하여, 아도르노와 게르숌 숄렘과 같은 친구들은 그를, 그의 정치운동이 항상 공상적 메시아주의에 종속된 음모가로 표현하려고 하였다. 그 당시의 주요 논문이 계속 출판되는 한 그러한 해석은 지속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지막 논문 '역사철학에 관한 테제'는 마르크스적 이해로는 상당한 어려움을 던져 주었다. 1939년, 나치와 소련의 협정으로 참담한 충격을 받은 후 쓰여진 그 논문은 조직화된 정치적 관계에 완전히 비관적이며 지적 행위를 마법과 같은 회상으로, 혁명을 공상적인 시간의 정지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벤야민의 논문에 나타난 어떠한 모순도 성숙한 시기의 주요 논문에서 정립된 마르크스주의적 문화 분석의 기본적인 원리를 손상시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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