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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Aesthetics)

맑스와 엥겔스의 저서들에서 체계적 예술 이론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일찍부터 전 생애에 걸쳐 미학과 예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그들의 다양한 단편적 논의들은 최근 10여 년 동안 특히 맑스주의 미학을 창출하려는 수많은 시도의 기반이 되었다. 예술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산발적 언명의 내용은 최근 편집된 저작집에 모아졌으며, 맑스주의 미학 사상의 발전을 개관하는 책들(Arvon, 1973; Laing, 1978 ) 속에서 언급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러한 논평들의 단편적 성격때문에 그들 책 속에서 각기 다양하게 문제의 중요성에 대한 견해들이 표출되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지금 이 글의 서두에서는 맑스와 엥겔스의 작업과 또 그밖에 많은 저술가들에게 시사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던 방법에서 몇 가지 출발점들을 간단하게나마 밝혀내는 일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그런 다음 이 글에서 맑스주의 미학의 역사와 이 분야에서 이루어진 최근의 중요한 연구 주제들을 고찰할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 속 미학
Aesthetics in the work of Marx and Engels

인본주의적 미학은 소외되지 않은 노동과 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창조적 노동과 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창조적 노동으로서의 예술의 본질에 대한 맑스의 논평을 토대로 구성되었다(Vazquez, 1973). 맑스가(《자본론》제Ⅰ권, 제5장, 제1절에서) 건축가와 꿀벌을 비교하면서, 노동이 지닌 근본적 인간주의적 성격에 대하여 말하였을 때, 여기서 건축가는 단지 노동자의 한 예로서 다루어졌을 뿐, 결코 예술가라는 특권이 주어진 범주로서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모든 소외되지 않은 노동은 창조적이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예술적 노동과 동일하다는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역사적 발전과 그 외의 다른 행위와 분리하여 볼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줌으로써, 예술의 신비성을 올바르게 제거해 주는 인본주의 미학의 근거를 제공한 것이 된다.
이러한 견해가 낳은 당연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예술은 다른 형태의 노동과 마찬가지로 점진적으로 소외된 노동에 해당한다는 인식이다. 여기서 예술 그 자체가 상품이 되며 또한 예술적 생산관계에서 보면 예술가의 위치는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착취당하는 노동자로 환원된다. 맑스가 자본주의적 생산은 예술이나 시와 같은 정신적 생산의 특정한 영역에 냉담하다(《잉여가치론》, 제1부, 부록‘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고 말함으로써 자본주의사회에서 예술적 노동의 변형을 분명히 해주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5파운드를 받고《실락원》(失樂園)을 썼던 밀튼[Milton]은 비생산적인 노동자였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제품 형식으로 출판업자를 위해 작품을 만들어 내는 작가는 생산적 노동자인 셈이다.…출판업자의 의도에 따라 책을 꾸며낸 라이프찌히의 노동자계급적 문학 종사자는 생산적 노동자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생산은 처음부터 자본에 포함되었고 오직 그 자본의 증식을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보탬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노래를 파는 가수는 비생산적인 노동자이다. 그러나 흥행주에 고용되어 흥행주의 돈을 벌어주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생산적인 노동자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가수는 자본을 이루어 놓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문화적 생산과 예술적 노동이 왜곡되는 데 대한 이러한 분석은‘문화산업’(culture industry)의 비판 (예를 들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의해서)을 위한 전제가 된다. 즉 이러한 문화산업에서 가치의 법칙과 문화적 생산을 상품으로 변형시키기 위한 조정은 문화와 예술을 정치적 안정의 보장 역할을 하는 타협적이며, 반복적인 무가치한 사물들로 환원하는 것이 된다. 맑스주의 미학자인 루카치는 그의 예술이론을 맑스의 상품 물신주의 일반이론으로부터 발전시켰다. 그의 주요 철학 저서인《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루카치는 의식에 미치는 상품의 물신숭배의 영향을 분석하면서, 자본주의사회에서 물화(物化)되고 단편화되는 인간의 삶과 그의 경험을 묘사하였다. 물화주의적 사고는 사회적 및 경제적 관계의 총체성을 파악할 수가 없다. 루카치의 전 생애는‘총체성’개념을 중심으로 한 문학과 미학에 바쳐졌다. 루카치의 견해에 따르면, 위대한 문학은 표면적 현상을 꿰뚫는, 사회적 총체성을 그 조건들과 함께 파악하고 노출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에서 사실주의(realism) 이론이 바로 이 점과 관련된다. 루카치의 견해에 따르면 훌륭한‘사실주의’문학은‘전형적’인물을 통하여 총체성을 묘사하게 마련이다. 사실주의 개념은 맑스주의자들의 저서, 특히 엥겔스가 1880년대에 소설가를 열망하는 여류인들을 위해서 쓴 중요한 두 편의 편지에서 뒷받침되고 있다. 그 편지에서 엥겔스는 아직도 정확한 정치적 분석, 평가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던‘사실주의적’주제를 옹호하면서 소위‘경향문학’(tendancy-literature)―분명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문학―을 확실히 거부하였다.‘작자의 견해가 감추어진 것일수록 그러한 예술 작품은 그만큼 더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언급하는 사실주의는 작가의 분명한 의견 표명에도 불구하고 잘 드러날 수가 있는 성질의 것이다’(마가렛 하크네스에게 보낸 편지, 1888년 4월 ; 맑스와 엥겔스의《문학과 예술》1973, p.116). 그는 계속해서‘프랑스“사회”의 가장 아름다운 사실주의 역사를 선물할’발자크의 예를 든다. 사회와 사회의 구조적(계급) 갈등의 정교한 반영으로서의 사실주의 개념은‘전형성’의 사용을 통하여 맑스주의 미학의 핵심적 개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좀더 일반적으로는, 예술 또는 미학과 그것이 발생하는 사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론은 1859년《정치경제학 비판 서설》의 서문에서 상부구조와 토대를 비유한 맑스의 형식화에 의존하는데, 미학은 상부구조의 한 부분으로 그리고 계급투쟁이 일어나는‘이데올로기적 형식’의 하나로 명백하게 지적된다. 시대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으로서의 이러한 예술관의 초기형태는‘문학과 예술은 사회적 삶의 거울이다’라고 한 플레하노프[Plekhanov]에게서 나타난다(Arvon 1973, p.12). 이러한 설명을 위한 가장 소박한 표현은 예술은 사회관계와 계급 구조의 반영으로서 이러한 물질적 특징에서 자동적으로 산출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경우에 해당된다. 이데올로기로서의 예술에 대한 좀더 복합적 설명은 골드만[Goldmann]과 같은 최근의 학자들의 저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맑스주의 미학이 지녀온 서로 다른 전통은 모두가 예술의 혁명적 위상과 예술가에 대한 실천의 문제를 강조한다. 사실주의에 대한 엥겔스의 논평이 분명히 시사하듯, 그는 분명한 참여보다는 객관적 묘사에 더 중요성을 부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자들은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 가운데서 예술의 급진주의 이론을 도출해냈던 것이다. 레닌은 작가는 당에 대한 의무로 작품을 제출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1905(1970) pp.22∼7). 그러나 이 점을 두고 레닌이 교양이 없다는 증거로 삼으려는 사람은 톨스토이에 관한 연구(같은 책, pp.48∼62)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예술과 문학에 대한 그의 다른 논문들을 모르는 데서 비롯되었다.‘인간은 스스로의 역사를 만든다’는 맑스의 개념이나 더 나아가서 의식은 정치적 개혁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는 명제에 따라서, 그 뒤로 마야코브스키[Mayakovsky], 브레히트[Brecht] 그리고 벤야민[Benjamin]으로부터 고다르[Godard]와 파솔리니[Pasolini]에 이르는 오늘날의 영화제작자들까지를 포함하는, 미학자들과 예술가들이 혁명적이며 미학적인 작업에 관한 계획을 이끌어 냈던 것이다.

맑스주의 미학의 기본적 주제들
Major themes in Marxist aesthetics

사실주의 개념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여러 가지 변형(소련 및 중국의 공식적인 변형이나 또는 서구 맑스주의와 관련된 그 어떤 경우이든 ; →Laing 1978, Arvon 1973)을 포함한 거의 모든 맑스주의 미학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또한 이것은 두 가지 종류의 공격의 초점이 되어오기도 했다. 그 첫 번째 공격은 루카치와 브레히트의 초기의 논쟁(Bloch, 1977 ; Arvon, 1973)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브레히트는 19세기의 고전적 사실주의 문학은 20세기의 독자나 청중들에게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으며, 특히 그들로 하여금 확고한 개혁의지를 갖도록 해주지도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오늘날 예술이나 문학이 사회의 정교하고 비판적 반영이라는 견지에서 평가되어야만 할 것인지, 아니면 혁명적 위상의 견지에서 평가되어야만 할 것인지가 문제로 되어있다. 이 논쟁에서 나타난 현대적 시각 예술, 문학 그리고 연극의 전통적 화법에 대한 형식적으로 혁신적인 것과 전위적인 것의 대조로서 나타나는바, 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전자가 수동적이고 무비판적이면서도 그 작업의 내용은 급진적이라고 주장한다. 사실주의에 대한 두 번째 공격은 이 논쟁과 관계되는데, 이 경우에는 전통적 사실주의는, 사실은 단일한 그리고 일관된 화법에 근거하는, 바로 그것이 반영하는 실재의 모순과 대립을 모호하게 하면서, 세계를 묘사하는 데 인위적 일치의 조작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서 현대적 작품은 원문의 분석 기술에 의하여 모순된 것을 찾아낼 수도 있고, 또 감추어진 것과 무언의 것을 말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경향은 알뛰세의 동료 피에르 마셰리[Pierre Macherey]의 영향을 받았고 그리고 바르트[R. Barthes]와 크리스티바[J. Kristeva] 같은 프랑스 기호언어학자들의 영향도 받았다.
이데올로기로서 예술 이론은 최근 서구 맑스주의에서는 물론, 동독과 소련에서도 크게 다듬어지고 수정되었다. 예술은 아직도 중요한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이해되어 오면서 사회적 삶의 단순한 반영으로 배척되지는 않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간접적 형식으로 이데올로기를 표현한 것으로 인정된다. 특히, 묘사의 형식과 규칙은, 이데올로기가 그것을 통해 문학과 예술적 형식에서 창출되는 중심적인 과정과 양식으로서 정당하게 취급되어 왔다.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의 작업에서 관심이 되살아났듯, 구조주의와 기호학의 영향은 중요성을 지녔다.(Bennett 1979). 예술의 관례와 제도는 ―예를 들어 출판사, 화랑, 평론 등과 같은 매개자의 역할―주제의 이해가 기본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 점은 소수의 작가들 ―그들 대부분은 예술 혹은 매체의 맑스주의적 사회학자들이다―에 의해 진지하게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결국 '소비는 생산을 창출한다'는 맑스의 논평(《요강》서문)을 지지하여 이를 인용하는 학자들에 의하여 청중과 독자들의 역할은 예술 자체의 작업에 부분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해석학적 이론, 기호학 그리고 수용(受容)미학은―대부분은 맑스적 전통을 따르지 않은― 문화적 작업과 그 의미의 산출에 있어 능동적인 수용의 역할 분석에 도구와 통찰력을 제공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작품의‘의미’는 더 이상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의 감상자에 의존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미학과 정치학의 문제는 계속해서 오늘날 맑스주의 미학의 중심문제가 되고 있다(Baxandall, 1972). 이 문제는 앞에서 언급한 사실주의에 관한 논쟁과 연관되어있는데, 이 점과 관련하여 벤야민의 작품에서 또다시 나타났던 관심은 문화적 산물의 급진적 형식이나 내용의 문제에 전적으로 집중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행위와 전략으로서 예술적 산물의 수단을 혁명화하는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이밖에도 오늘의 논쟁이 안고 있는 또 다른 측면은, 예를 들어 사회주의적 극작가들에 의한 것인데, 즉 여기서는 급진적 사상이 잠재적인 다수의 시청자는 물론 기술적인 혁신에 대한 전망과 '브레히트적인' 의지를 갖는 텔레비전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되는지, 아니면 (공동사회나 거리의 극장처럼) 훨씬 적은 청중을 가지면서도 구조적이고 전문적이며, 또한 이데올로기적 속박으로부터 상대적 자유가 있는 극장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끝으로, 맑스주의 자체의 여성해방론적 비판의 발전에 수반하여, 사회주의적 여성해방론의 문화적 실천과 이론은 최근까지 발견되어 오고 있는데, 여기서 계급과 이데올로기 문제에 가장 중점을 두고, 예술의 가부장적(patriarchal) 주제, 극장과 그 밖의 문화적 기구에서의 가부장 관계들이 비판의 주제가 된다.
결국 맑스주의 미학의 발전은 미학적 가치 개념을 숙제로 남겨 놓은 셈이 된다. 예술 자체는 물론 예술 비평의 실제와 제도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그리고 이해관계에 의해서 해석해야만 한다는 인식은 예술 작품에 대한 가치 부여의 상대적이며 인위적 성격을 노출시킨다. 최근까지 이 문제는 맑스주의의 미학자들에게서 중요하게 다루어질 만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으며, 또 루카치와 같은 저자들은 특정한 정치적-미학적 기준들을 들고 나옴으로써, 시민계급 비평론의 주된 전통과 놀랍게도 비슷한 문학의 '위대한 전통'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고급' 예술과 대중 예술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비평가의 부분적 시각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가치의 문제는 오늘날 맑스주의자들에게 이데올로기 비판의 상대주의적 의미를 내포한 자발적 수용으로부터, 인류학적 또는 심리학적 성질에 의하여 가정된 인간 보편성에 근거하는 아름다움과 가치의 절대적 기준을 재강조하려는 시도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방법들로 제기된다.
[관련자료]
Avron, Henri 1973: Marxist Esthetics
Baxandall, Lee(ed.) 1972: Radical Perspectives in the Arts.
Bennett, Tony 1979: Formalism and Marxism.
Bloch, Ernest et al. 1977: Aesthetics and Politics.
Laig, David 1978: The Marxist Theory of Art.
Lenin, V. I. 1905(1967): On Literature and Art.
Vázquez, Adolfo Sanches 1973: Art and Society. Essays in Marxist Aesthetics.
Williams, Raymond 1977: Marxism and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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