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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 ] (Hinduism)

마르크스는 힌두교에 대하여 정식으로 연구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관심은 그 자신의 문제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에게 있어 힌두교는 억압받고 피폐된 사회의 이데올로기였으며, 또한 대부분의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그 섬뜩한 모습에 혐오감을 느꼈다. '살세테 사원에서의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그 어느 종교적인 괴물보다도 더 소름끼치는 결합', 이것이 아시아적 전제정치에 대한 그의 요약이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인도의 동료들만큼이나 과거 힌두의 '황금 시대'에 대한 그 어떤 생각에도 회의적이었다.(《제1차 인도 독립전쟁》p. 156) 20세기에 들어서 인도의 외부에서, 마르크스주의는 힌두교를 주로 종교의 한 형태로서 관심을 가졌다. 최근에 이르러 인도 내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무엇보다도 힌두교에 관한 실제적인 문제-즉 국민운동에서의 힌두교의 위치, 그리고 (독립에서 결과된) 분할과 대량학살을 수반하는 각 종파로 분열된 부락마다의 열정 등-에 몰두하였다.
로미라 타파르[Romila Thapar]가 기록하고 있듯이, '힌두교'라는 이름은 고대 인도에서 사용되었던 시대착오적인 것이지만, 약 2천년 전 아리아 침략자들의 베디[Vedic] 숭배에서 벗어나 성장하던 종교에 대해 붙여진 편리한 명칭이었다. 그것은 믿음이라는 말로는 정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을 만큼 매우 복합적인 것으로서 아리아적 사유, 드라비드적 사유 그리고 불교와 자이나교의 약간의 영향 등이 함께 혼합된 것이었다.
타파르는 절대 개념을, 우파니샤드[Upanishads] 혹은 후기 베딕 구성에 나타나는, 그리고 그것 안에서의 자연, 탄생, 삶 그리고 죽음의 질서에 대한 반성을 인식할 수 있는 창조자(creator), 유지자(sustainer), 그리고 파괴자(destroyer)의 삼위일체인 듯한 것으로 지칭한다. 그 후 세 가지 신들 중에서 첫 번째 신인 브라마[Brahma]가 이면으로 빠지게 된 것과는 달리 나머지 두 신 비슈누[Vishnu]와 쉬바[Shiva]-쉬바는 풍부한 의식(儀式)과 결합된 아리아-드라비드적 혼혈이다.-는 힌두 사람의 복종을 나누어 갖는 최고의 두 신으로 남게 되었다. 그 후 의례적인 관습은 '후기 힌두교의 역동적인 형식'으로서 바크티(bhakti)로, 혹은 신과의 개인적 교섭과 그에 대한 무아경의 헌신으로 바뀌었다. 중세가 끝날 무렵에 카비르[Kabir]와 나나크[Nanak]와 같은 지도자들은 바크티에 이슬람적 사상을 혼합시킴으로써 바크티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왔다. 이 때 이들이 비천한 도시인과 도시 생활과 관련된 시골출신의 기능공들이 겪는 괴로운 시대적 감정의 토로에 얼마나 귀기울였는지는 분명치 않다.(p. 308)
어떠한 형태의 미신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헌신은 보기에 따라서 성직자의 헤게모니로부터의 탈출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브라만[Brahman]의 주도권은 유지되어 왔고 강화되기까지 하였다. 그 체제의 한 모습은 풍부한 재정적 자원을 소유한 기관으로서의 사원이었다. 중세의 남부 인도 연구는, 정신적인 축복은 물론 사회적 지위와 시주(施主)로서의 위신을 지키기 위하여 상인들과 상업조합에서 사원에 큰 규모의 희사(喜捨)를 하였음을 보여준다.(Jha 1976)
샤르마[R.S. Sharma](1966, 1장)가 쓴 논문은 현대의 저작들에서 구(舊)인도와 힌두교에 관한 견해의 흐름을 도표로 보여주는데, 그 중 일부는 사적 유물론의 영향을 받았다. 다른 논문에서 그는 리그 베다[Rig Veda]에서 '기도의 주된 내용은 아리아인의 물질적 풍요'(1976, p. 39)임을 주목한다. 그가 적어도 다르마[dharma], 혹은 힌두교의 종교적 법전의 한가지 주요 관심이, 하층민이나 여자에 비하여 높은 카스트 사람들의 번영이었음을 추가했다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가 어디서나 지적하듯이 카스트 제도에서의 노동자인 수드라(sudras)와 여자는 '같은 범주로 묶여져 있는', 즉 '사회의 가장 저주받는 계층'임을 주장하였다. 챠토파드야야[D. Chattopadhyaya]는 다르마의 원리를 형식화했던 입법자 마누[Manu]와 같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상, 혹은 합리주의에 격렬한 적대감을' 나타냈는데, 그 이유는 '고생하는 수백만의 대중들이 노예상태를 달게 받는 곳에서'(1976, p. 83)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강압은 물론 미신이 당연히 필요하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챠토파드야야는 그 반대로 인도사상에서의 불가지론적 전통에 탁월성을 부여하였고, 불교에 대해서는 초기 삼크야[Samkya] 학파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몇몇 학자들과 의견을 같이 하였다.(1969, p. 95)
이와 어느 정도 관련된 문제들이 남부드리파드[Namboodripad]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그는 공산당의 지도자였으며 또한 자신의 출신지 케라라 남부 지방의 역사가였다. 이 지역은 브라만교의 지배를 받았으나, 자신들의 오랜 사회적 관습을 유지하였고, 북부 인도와는 달리 중세를 통해 토지 사유(私有)의 봉건 형식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러한 변천 과정에서 광범위한 논쟁적인 문학이 지배적인 계급과 그 계급의 종교적인 이데올로기를 옹호하여 포기되었다. 여기서 하나의 목적이 된 것은 불교의 배척이었다.(1952, 3장)
저명한 인도의 불교 공산주의자인 라훌산크리트야야나[Rahul Sankrityayana]는 일세기에 걸친 힌두교의 발전에 관하여 가공적 형식을 빌어서 비판적인 논술을 하고 있다. 근년에 와서 자신의 종교나, 혹은 다른 종교의 역사적 실마리를 찾는 양심적인 작가들에 의해서 마르크스주의적 연구 방법은 어느 정도 유용해졌다. 그 좋은 실례는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활동하는 두 가톨릭교도인 휴타르트[Houtart]와 레머시니어[Lemercinier]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애초에는 아리아족의 베다 신화를 이동생활의 필요를 반영한 것으로 간주하였으나, 후에 그들은 이 신화가 정착된 농업으로의 변화를 나타내는 독특한 신으로 발전된 것으로 간주했다. 중재자로서 성직자의 역할로부터 '오직 신만이 신들에게 말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으며, 따라서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는 집단의 무능함을 표출하는' 기능을 가진 브라만은 스스로 신적 존재가 되었다. 하층 계급의 개인들은 지위가 오를 수는 있었으나, 단지 완전히 수용된 사회 질서의 조건에 의거한 것이었다. 따라서 '종교에 기반을 둔 어떠한 사회 운동도 불가능했다.'(1980, pp. 36∼8, 45) 여기에 힌두교와 기독교 사이의 현격한 차이가 있다.
19세기에 람 모훈 로이[Ram Mohun Roy]를 선구자로 한 많은 진보적인 인도인들은 믿음, 인습 그리고 종교적 의식의 복합적 뒤틀림의 병적인 궁지에서 국민들의 정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그들의 첫 번째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국민적인 자유화 운동의 최고조는 동시에 모든 측면에서 힌두교의 거대한 신장을 가져왔다. 인도의 또 다른 기독교 대표자 중의 한 사람인 위렝가[Wielenga]는 인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공정한 검토의 과정에서, 인도 공산주의와 부흥 운동자 사이의 사상 논쟁을 연구하였다.(1976, pp. 133ff) 이에 대한 간명한 언질이 인도의 영국 공산당 이론가 팔메 두트[Palme Dutt]의 저작에서 나타난다. 그는 정치를 시대에 맞지 않게 이해하는 지도자들은 '아직 인도에서 사회적 보수주의의 거대한 힘'과 구(舊)인도의 근래 유럽에 대한 '가상된 정신적 우월성' 위에 국수주의를 구축하려고 노력하여 왔다고 적고 있다. 그는 티라크[Tilak]와 고쉬[Ghosh]와 같은 선전자들을 언급하였는데, 그들은 소보호협회를 창설하고 코끼리 머리를 한 지방신(地方神) 가네쉬[Ganesh]와 파멸의 여신 카리[Kali]에 경의를 표하는 국민적 축제를 개최하였다.(1940, pp. 291∼2, 294)
어쩔 수 없이 간디[Gandhi]는 부흥하는 힌두교의 새로운 현인으로서 간주되었다. 그는 정치적 문제를 종교적 표현으로 바꾸고, 기대되는 유토피아로서 람 라자[Ram Rajya], 곧 신의 통치를 이야기하고 사회주의 대신에 다시 찾아야 하는 황금시대를 말하고 있었다. 그는 기계와 근대화의 포기를 설득하면서, 또한 과거의 소박한 마을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두트[Dutt]는, 그의 추종자들이 참된 인도, 즉 소박한 농촌에의 기대를 상상하였던 반면에, 실제로 그것은 '무자비한 경제적 변화 과정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고 위험에 빠진 당황한 소수의 부르조아지'들의 향수, 그리고 오랜 확실성의 기반의 편안함에의 동경 그 이상은 아니라고 썼다.(pp. 510∼1) 네루[Jawaharlal Nehru] 자신은 간디의 제자였지만, 때로 그가 사회주의자로서 '빈곤의 영광', 인간성의 '결핍이라는 말로만 생각될 수 있는' 지나간 시대의 유물로 비춰진 것에 당혹감을 느끼고 마르크스주의적인 색체를 띠었다.(Norman 1965, vol. 1, pp. 85∼6)
간디는 특히 불촉천민(不觸賤民, Untouchable)을 위한 개혁운동으로, '점잖게 그러나 거역할 수 없을 정도로' 정통적 관행을 훼손하였으며, 탁상공론식 좌익의 어느 이론가들보다도 훨씬 더 인도를 혁신하였다는 생각으로 네루는 스스로를 위로하였다.(vol. 1, pp. 299∼300) 간디와 네루의 힌두적 신념에 대한 완고한 반대는 공산주의자들이 애국 투쟁의 주류에서 상당한 정도로 제거되었고, 그리고 그들이 아일랜드 사회주의자들의 고립과 유사한 고립의 위험에 처했음을 의미하였다. 독립이 도래한 후 무커지[Mukerjee]와 같은 많은 사람들은 마하트마와 그의 인도에 대한 봉사에 대하여 그들의 평가를 수정하여야만 된다고 느꼈으나, 그의 퇴보하는 힌두교와의 일체감은 계속 장애물로서 남아 있었다. 적어도 그들의 불안이 어느 정도는 정당화되었다. 베텔하임[Bettelheim]의 자유로운 인도에 대한 조사는 지방선거와 중앙선거에서 카스트의 부패에 대하여 많은 것을 시사한다. 아직도 상당한 수의 회교도 소수파와의 불화는 계속되고 있으며, 때로는 이것이 폭발하고 있다.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자주 이야기되는 '인도의 영혼'은 더 이상 힌두교의 정신이 아니며 '그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힌두교도가 아닌 사람들이 따돌림을 당하는 배타주의적 힌두사상으로 빠지게 된다.'고 남부드리파드는 기록하였다.(1966 p.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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