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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 (violence)

광범위한 폭력이 사회주의적 변형을 완수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는 수단을 목적에 연결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하나의 영원한 숙제이며, 오랫동안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분열시키는 주요 문제 중의 하나였다. 이 문제는 변화하는 역사적 환경과 맥을 같이 한다. 급진적 변화는 폭력적 갈등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다는 비법은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유래했다. 이 비법은 바뵈프와 블랑키의 사회주의 전통 속에서 영속되었으며, 1848년 유럽 혁명으로 또 다른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노동자 계급에게 선거권을 보장해주려는 유럽 혁명이 실패하고, 노동자의 생활수준이 눈에 띠게 악화되자 마르크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노동해방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혁명적인 폭력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평화적 변형에 대한 추구가 공상적 사회주의의 특징이라고 결론지었다. 때때로(1872년 9월 헤이그 연설에서처럼) 마르크스는 관료제와 상비군이 국가를 지배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노동자들이 평화적인 수단으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또한 '대부분 대륙 국가들에서 혁명의 지렛대는 작동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인지하였다.
선거권의 점진적인 확대, 현대 군대의 제고된 효율성, 규율 그리고 화력과 함께 노동자계급의 지지 동원에 있어 독일 사회민주당의 놀랄만한 성공 등은 엥겔스로 하여금 (1895년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서문) '가두 투쟁에서 군대에 대한 반란의 실질적 승리는 … 아주 드문 경우 중의 하나이다.'라고 결론짓게 했다. 그는 지지를 구축하기 위해 신중하고 인내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렇지만 운동은 '비합법적인 방법과 전복보다는 합법적 방법 위에서 훨씬 더 성공하고 있었다.' 혁명에 대한 추상적인 설득력이 존속되고 있는 동안에도 제2 인터내셔날의 주요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혁명을 위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다. 혁명적 운동 이론이 개량주의적 실천과 거의 아무런 관계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베른슈타인의 경우가 지닌 장점의 일부이다.
비합법과 민주적 구조의 부재라는 조건 속에서 활동해 왔던 러시아 당은 무장투쟁에서 정점을 이룰 대중적 정치 스트라이크의 조직화를 홀로 수행하였고 1905년에는 거의 성공을 보았다. 1917년의 볼세비키의 10월 혁명의 성공은 폭력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논쟁을 야기시켰고 국제적 운동의 분열을 가져왔다. 사회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어떠한 경우에도 다수의 지지기반 위에서만 의미있을 뿐 아니라, 지속될 수 있는 평화적인 사회주의적 변형으로 수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심각하게 위협받자 곧 민주적 자유를 속박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유럽 파시즘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제국주의 국가는 본질적으로 폭력의 도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통해 러시아의 경험은 보편화되었고, 다른 계급에 대항하여 한 계급에 의한 무제한의 권력 사용을 의미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유일한 형태로 주장되었다. 더욱이 사회 내부의 적대적 계급 세력의 변증법적 대립-그런데 이들 계급 집단은 폭력적 투쟁과 내전을 통해서만 그들이 모순된 이해(혹은 적대적 모순)를 해소할 수 있다.-은 이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무장된 진영의 대결 속에서 세계적 규모로 반복된다고 주장하였다. 스탈린 시대와 접목된 것이 바로 이러한 개념 구조였다.
흐루시초프는 소련이 반(反)사회적 집단을 제거한 후로 국가는 이제 더 이상 강압적 독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국제적 측면에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힘의 균형이 사회주의에 유리하게 변화하므로 경쟁과 평화공존을 통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핵무기가 갖는 파괴력의 질적 증대로 인해 이것이야말로 단 하나의 가능한 과정이라고 전망했다. 이 점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이익이 위협받는 것으로 느꼈으며, 수십년의 내전의 게릴라 지도자로서 모택동의 경험은 이 새로운 공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동남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민족해방 투쟁과 사회주의 투쟁은 무장 투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장기전에서는 현대적 무기보다 오히려 본거지의 게릴라에 의해 창출된 민중적 지지와 위임이 결정적 요인이라는 모택동의 생각은 베트남에서의 성공적인 적용으로 국제적 관심을 모았다. 레기스 데브라이와 체 게바라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혁명의 전제조건을 창출하는 데 있어 게릴라 거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폭력의 문제는 또한 각 개인과 계급이 자신들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게 되는가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인식론적 배경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폭력의 역할을 비난하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몰락을 향한 내적 필요성으로 작용하는 법칙과정으로서 역사를 강조한다.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이 역사발전 법칙을 이해하고 분명하게 말하고 공표할 수 있고, 사회주의의 타당성과 우월성을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무정부주의와 달리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 의해 생겨난 생산체계를 파괴하기보다 재구성에 착수하며, 현대 경제를 관리하고 보다 더 조화로운 사회적 단결을 시작하는 건설적 임무는 대중폭력의 임의성과 그것이 스며드는 습관과는 매우 대립된다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해 사회주의의 목적은 폭력적 수단을 통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똑같이 정통적이라 주장하면서 인간은 부딪치며 활동함으로써 세계를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적으로 계급이나 집단은 다른 집단과 대결함으로써만 그들 자신을 의식하게 되며, 이 행위의 가장 발달된 형태-계급투쟁의 종착지(→계급투쟁)는 내전을 통한 폭력적 대결이다. 폭력 그 자체는 계급적 편견과 국가의 폭력적 속성을 폭로하고 계급의식과 조직의 발전을 가속화시키는 하나의 창조적인 힘이 될 수 있다. 레닌과 룩셈부르크는 사회의 경제적 양극성과, 내전에서 번갈아 가며 조직적 거점이 되었던 적대적 정치집단들 속에서 폭로되는 발전이론의 전개에 영향력을 미쳤다.
이 대립적 해석의 상대적 인기와 유행은 마르크스주의 정당과 정권의 안정, 번영, 안보의 정도에 크게 의존하며, 혁명적 활동의 시간적 거리감과 목적 달성에 있어 비폭력적 방법이 갖는 효능의 정도에 크게 의존한다.(→쏘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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