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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에르바하 ] (Feuerbach, Ludwig)

포이에르바하는 1840년 7월 28일 바바리아의 란즈후트에서 태어나 1872년 9월 13일 뉘른베르크에서 사망하였다. 저명한 유물론적 철학자였던 그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종교는 인간 욕망의 투영이며 소외의 한 형태라고 서술하여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다. 또한 그의 헤겔과 종교에 대한 비판은 청년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당대의 진보적이고 유명한 법률가이면서 범죄학자(Paul Johann Anselm von Feuerbach)의 아들인 포이에르바하는 1823년에 하이델베르크에서 학문을 시작하여 신학을 거쳐 철학에 이르게 되었다. 1824년 그는 베를린으로 옮겨 헤겔의 철학 강의를 들었으며 1825년에는 자신의 종교적 신앙을 버렸다. 그 뒤 헤겔주의자가 되면서 철학부로 옮겨 1828년에 에어랑겐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의 《죽음과 불멸에 관한 사유》(1830)는 영혼불멸성을 부정함으로써 커다란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1829년에 에어랑겐에서 철학강사가 되었다. 그의 강의는, 반종교적인 견해를 이유로 대학 당국이 교수로 임명하지 않는 데 대한 항의로서 이것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던 1832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남은 여생을 개인교수로 지내면서 1830년대에는 현대철학사에 있어서 선구적인 연구저서들을 여러 권 출판하였고, '유물론적' 관점에서 헤겔의 관념론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적 논고들을 집필했다. 《기독교의 본질》(1841), 《미래 철학의 기본 명제들》 및 《철학의 개혁을 위한 예비 테제》(1843)는 포이에르바하 추종자들의 한 세대를 형성했다. 이들은 절대군주제와 절대이성 및 종교를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힘을 거세하고, 인간의 사유 행위를 상상력으로 대치하며 이것을 통하여 인간을 지배하려는 불합리한 시도라고 거부하면서 포이에르바하를 추종했다.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계속하였으며, 1848년 혁명의 발발로 적어도 하이델베르크의 학생들에게는, 혁명의 아버지이며 영웅으로서 환영받았다. 그러나 그 자신은 독일이 하나의 공화국이 되기 위해서는 신학적 환상으로부터 아직도 충분하게 해방되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혁명에 대하여 소극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었다. 1850년 포이에르바하는 몰레숏트[Moleschott]의 생리적(生理的) 유물론으로 전향하여 '인간은 먹는 존재이다.'라는 독일의 속담처럼 인간은 죄에 대한 설교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인간이 섭취하는 음식물의 종류와 질에 의해 결정된다는 자신의 관점을 정리하였다. 그는 이후 윤리학에 관한 몇 개의 단편적인 소고를 제외하고는 중요한 것은 별로 남기지 못했으며 더 이상 사회적인 관심을 끌지 못했다. 1868년에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비인간적이고 끔찍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그 책을 극찬하였으며 1870년에 사회민주당에 참가했다.
포이에르바하는 결코 체계적이거나 치밀하고 일관성 있는 철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통념과 관념을 내던져 버렸으며, 그의 저작의 중심적인, 철학의 어떠한 주요 문제들에 대해서 조리 있게 산출해 내거나 주의 깊게 분석한 견해를 남겨 놓지도 않았다. 그의 '유물론'(아마 자연주의적이고 비원자론적인 경험론으로 더 잘 표현되는)과 인식론은 모두 그 해석에 있어서 몇 가지 문제가 있고, 논쟁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에서 정신의 적극적인 측면을 소홀히 했던 관조적 유물론자라는 마르크스의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논의는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포이에르바하가 실천을 '더러운 유대인'(마르크스의 용어로서는 속되게 실제적인)의 측면에서만 보았다는 비난이 그러한 것이다. 1840년대에는 독일에서, 1850∼60년대까지는 러시아 및 프랑스에서 그가 끼친 큰 영향력으로 인하여, 그 후 포이에르바하는 환영을 받으면서 소생하였고, 19세기의 지도적인 반신학적 인물이 됨으로써, 종교의 내용을 통하여 신학에서 다루는 인간의 지위를 향상시킨 20세기 신학의 중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인간 사이의 결합원리로서의 사랑에 대한 포이에르바하의 강조와, 모든 진실된 인간적 활동들(사유, 언어,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내용으로서의 나와 너의 원리는 현대 신학자들과 과학기술 발달의 주변에 서 있는 몇몇 다른 철학자들에게는 호응을 받았으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포이에르바하의 종교에 대한 비판, 소외에 대한 개념, 그의 '유물론'과 헤겔에 대한 비판은 최근 몇 년 동안에 새로운 연구 대상으로 등장하였으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논법의 한 부분이 되었다. 마르크스 자신은 헤겔에 대한 포이에르바하의 비판을,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가장 고귀한 존재라는 명제로 귀결지어 하나의 참된 혁명적인 철학을 위한 출발점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헤겔이 주관과 객관의 역할을 전도시켜, 사상을 인간의 부속물로서가 아니라 인간을 사상의 부속물로서 취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포이에르바하의 주장은 분명히 마르크스가 '헤겔을 전도시키도록' 결정을 내리게 했던 하나의 계기이며, 종교와 같은 사회 제도의 기능과 기원을 탐구한 포이에르바하의 발생론적인 비판적 연구방법은 마르크스에 의해 1843년에 국가에 적용되었고,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견해의 여러 요소들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포이에르바하의 관계가 철저하게 연구되고 잘 이해되었던 것은 마르크스의 초기 철학 저작들에 대한 발견과 재발견이 이루어짐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졌다. 마르크스는 비록 1860년대에 런던으로부터 포이에르바하의 전집 7권을 주문했지만, 그 자신은 포이에르바하가 자신의 지적 발전에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긴 했으나, 다만 하나의 지나가는 과정으로서 보았으며 그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엥겔스의 《포이에르바하론》은 비록 공인된 소비에트 변증법적 유물론의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교재이지만, 포이에르바하의 철학에 대한 가치 있는 연구는 아니며 세련된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관점에 중요한 기여도 하지 못했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최근까지 소련에서 연구하고 있는 철학자들은 포이에르바하를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로 보기는 하지만 중요한 철학자라는, 말뿐인 호의를 베풀어 왔다. 그러나 단지 데보린에 의해서만 일련의 진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1923) 포이에르바하가 진실로 중요한 철학자이며, 마르크스주의는 포이에르바하주의의 변종이라는 데보린의 주장은 그의 책 초판에서일 뿐, 초판 이후의 책에서는 삭제되었다. 포이에르바하와 마르크스의 관계에 대한 그의 잘못된 평가는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비판받았고 그의 철학적 입장이 무시당할 때 그에게 가해진 비난들 중의 하나이다. 카멘카[Kamenka]의 연구(1970)는 포이에르바하를 정신에 대한 적극적인 이론과 종교에 대한 비판, 비원자론적인 경험주의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중요하고 기본적으로 건전한 철학자로 취급했다. 그러나 그도 포이에르바하를 체계적이고 위대한 철학자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바르토프스키[Wartofsky](1977)는 포이에르바하를 한층 더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기하였던 철학자로 취급했고, 포이에르바하의 철학적 발전이 사상의 진보에 대한 변증법적 이해를 위해 가장 의미가 깊은 것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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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견
[문제제기] rudcks9102 (2018-05-23 03:29:16)
태어난 년도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수정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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