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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 (philosophy)

사회주의의 한 형식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실천적인 정치 운동이다. 사회주의 안에서 마르크스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급진적이고 포괄적인 사회 이론과 혁명적 실천이 결합된다는 데 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목표로 하며 또 요구하는 것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철학이 아닐 사회과학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한편으로 그처럼 결합된 과학과 정치적 실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철학과의 관계란 무엇인가?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는 이러한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마르크스 자신은 《자본론》에서 절정을 이룬 사적 유물론이라는 과학으로 전이하기 이전에 철학자로서의 지적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전이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리고 전체로서 이러한 전의는 유럽 문화에서 나타난 거대한 전의-이를 통하여 철학은 전반적으로 자신의 지적 우월성이라는 위치를 과학에, 즉 처음에는 17세기 자연과학에 그리고 다음에는 마르크스가 속했던 시대의 사회과학에 물려주었던-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마르크스주의는 실천적으로 부르조아 정치에 대립되는 까닭에 부르조아 이론 및 사상과도 대립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부르조아 이론들은 단순하게 거부되는 것이 오히려 변증법적으로 흡수되고 전화(轉化)된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주로 사회과학인 까닭에 부르조아 사회과학을 공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자연과학을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보고, 특히 자연은 역사성을 인지하고 이론화함으로써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되듯이, 실제로 자연과학에서 부르조아 문화에 의해 이룩된 과학적 전통을 계승하려고 노력한다.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는 부르조아 철학의 세 가지 조류, 즉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과학적 혁명과 계몽주의 시대의 유물론, 그리고 헤겔의 변증법에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이때 이러한 철학의 핵심적인 요소는 전용(專用)된 것이면서도 또한 그 요소들은 부르조아 철학에 대립하는 이론의 본체로 변형된다. 마르크스주의에 의하면 부르조아 철학은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주된 문제로 삼는 것은 마르크스 철학은 부르조아 철학을 흡수함으로써 부르조아 철학에 반대하여 결국은 이를 전유(專有)하는가? 마르크스주의 과학 안에 내재하든 혹은 그것에 부차적이든 간에 도대체 독특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있는가? 혹은 사적 유물론은 철학에 반대하면서 이를 대신하는가? 등등의 것이다. 마르크스의 죽음 이후,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제시한 위력적인 대답은, 부르조아 철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반대로 이해될 수 있는 그런 철학이라는 의미에서, 실로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제까지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은 그 발전에 지속적 지배력을 행사해왔던 두 가지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준거하여 전반적으로 이론화되었던 바, 그것은 엥겔스의 후기 작업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과 연관된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 Dialectical Materialism

마르크스주의가 내놓은 가장 중요한 철학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즉 과학적 유물론과 헤겔 변증법의 결합으로서 이것은 구체적인 현실은 모순의 통합을 의미하고, 이때 모순이야말로 현실을 끊임없는 역사적 변화, 발전 그리고 혁명의 과정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모순을 안고 있는 이 현실은 오직 모순 명제에 의해서만 올바르게 묘사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형식논리와 그 모순율을 대신하는 하나의 특수한 변증법적 논리를 요구한다. 이러한 견해를 지닌 유물론은 물질적인 것이 근원적인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는 가운데 정신과 물질이 스스로 대립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바로 '세계관'(world outlook)(엥겔스《반듀링론》2판 서문), 즉 현실의 총체적인 본질에 관한 이론이다. 특히 변증법적 유물론은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과 같은 특수 과학에 대하여 이들이 진보하는 한 '과학의 통일'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는 점이 실증되기를 요구한다. 또한 변증법적 유물론은 사적 유물론의 과학성을 위한 논의의 과정에서 실증되기를 요구한다. 그것만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은 제 과학의 발전에 의하여 그 자체가 보편성을 띠면서 타당화될 것으로 본다. 그러면 변증법적 유물론은 과연 어떤 철학인가 과학인가?
이 문제에 대한 엥겔스의 논거는 《반듀링론》의 2판 서문에서, 그리고 본래는 1판에 쓰여졌으나 그 후에 이것이 제거되면서 《자연변증법》의 내용 속에 포함된 소위 구(舊)서문에서 나타난다. 그의 논점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철학으로 간주하는 전통적 경향을 거의 정당화하지 않는 데 있다. 그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확증해 가는 자연과학의 발전은 이론적 자연과학의 발전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론적'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엥겔스는 과학의 개념적 발전을 지칭하고 있으며, 특히 직접적으로 경험적 증거에 의해 확증되는 (그러한 경험적 증거를 넘어섬에도 불구하고) 개념들이 이룩하는 상대적으로 사변적인 발전을 지칭한다. 그는 그러한 개념들이 분리된 여러 특수 과학을 통합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경험적인 개념적 통합은 노련함과, 그리고 지금까지는 철학의 영역이었던 관념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비록 엥겔스가 스스로 철학, 즉 유물론과 변증법의 철학으로부터 문제에 접근한다 할지라도 그는 자연과학의 발전 자체는 아마도 결국에는 '나의 작업을 … 불필요하게 만드는'(《반듀링론》2판 서문) 것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의 '자연 철학'은 '이론적 자연과학'이 될 것이다. 그 자체로서의 철학은 스스로 무용한 것이 될 것이며, 여전히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에 의하여 원용되고 또 과학 속으로 변형되어 버릴 것이다.

마르크스적 휴머니즘과 서구 마르크스주의 Marxist humanism and Western Marxism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러시아 혁명이 퇴색되면서 변증법적 유물론이 (요즈음 특히 소련에서는 'dialectical materialism'을 줄여서 'Diamat'라고 한다.) 공산당의 정통성의 기초가 됨에 따라, 이러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주도권은 두 번째 단계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하나라기 보다는 오히려 느슨하게 통합된 경향을 띤 일련의 이론은 그 최초의 이론가들인 루카치와 코르쉬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이와 거의 동시에 마르크스의 초기 저술들이 재발견되었는데 그것은 변증법적 유물론보다는 이러한 새로운 철학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였다. 변증법적 유물론이 전체로서의 현실에 관한 이론으로서 무엇보다도 사회과학을 사회의 자연과학으로 보는 것과 함께, 인민과 사회를 보편적 자연 과정을 실증하는 것으로 보는 점에서 이 새로운 경향은 인간주의적이었다. 그것은 인민과 사회의 중심성과 차별성을 주장하면서, 사회 이해의 자연과학적 모델뿐만 아니라 과학과 기술까지도 부르조아적이고, 따라서 탐구와 실천의 소외되고 교묘한 양식이라고 논박하면서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오랜 인간주의적 원리를 재확인하였다. 실로 《반듀링론》에서는 완전히 제외되었지만 《경제학 및 철학 수고》(1844)에서는 그 토대가 되었던 헤겔적인 소외개념은 이제 이 마르크스의 저서와 마찬가지로 주도적인 위치로 옮겨갔다. 이것을 통하여 명백히 평가적이고 윤리적인 물화와 물신숭배 같은 상호관련된 개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초점은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의 인민의 개념, 즉 의식과 가치의 중심이며, 따라서 과학에 의해 묘사된 자연적 질서의 잔여(殘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현저히 과학적이다. 그리고 변증법적 유물론 자체는 '자연철학'이란 의미에서 과학철학인 바, 그것은 그 철학적 특성을 잃고 '이론적 자연과학'이 발전하는 정도로 충분히 과학적이 될 것이다. 이와는 달리 마르크스주의적 휴머니즘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모든 과학이 인본주의 철학의 전체적인 전망 안에 포함된 부분으로서 발생하듯, 철학적인 것을 뿐 결코 과학적인 것은 아니다. 그 주제들은 계몽주의적 합리론에 반대하는 낭만주의적 반응에서 오는 일반적 문화풍토와 낭만주의에 가장 가까운 철학을 대체적으로 물려주는 철학적 전통으로서의 칸트(→칸트주의) 및 헤겔의 독일 관념론, 그리고 정신과학(Geisteswissenshaften)을 위한 해석학적 철학 등을 반영한다. 이상의 모든 경향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이란 인식과 별도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바로 이 인식에 의하여 구성된다는 점에서 견해가 일치되고 있다. 특히 해석학은 과학의 통일에 대한 경험론적 이론을 거부하고, 인간과 사회적 사건의 이해는 경험적 자연과학과 같은 논리와 방법론으로는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사회의 언어를 이해하는 데 있어, 참여자는 어떠한 과학도 할 수 없는 사회에 대한 이해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해의 이론적 명료화는 경험적 관찰의 분리된 객관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탐구되는 사회적 행위에의 참여 혹은 '감정이입(感情移入)'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는 경험적이며 과학적이기보다는 좀 더 개념적이고 철학적이다.
이러한 경향들은 프랑크푸르트 학파, 싸르트르, 그리고 현대 유고슬라비아의 반체제 철학자들이 표방하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실천(Praxis)'지(誌)에 표현되었던) 등에서 상당히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그러나 최근 20년 동안 마르크스의 초기 철학 사상에 대한 높은 평가와 함께 마르크스주의적 휴머니즘은 마르크스주의 철학 안에서, 특히 알뛰세[Althusser]와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아왔다. 델라 볼페의 이탈리아 학파와 마찬가지로 알뛰세는 마르크스주의적 휴머니즘의 헤겔적 내지 관념론적인 경향에 반대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과학이 중심이 되어 있긴 하지만, 그러나 사적 유물론에 내재하면서 마침내 분석에 의해 명확하게 만들어진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변증법적 유물론과 함께 이러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과학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알뛰세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자연철학', 즉 마르크스주의가 진보된 자연과학과 함께 공유하는 그러한 세계관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과학철학의 정통적 개념, 즉 인식론-과학은 '이론적 실천'이고 철학은 '이론적 실천의 이론'인-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알뛰세는 만년의 자기비판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아직 과학철학이기는 하지만, 규범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며 더욱이 정치적이기 때문에 과학과 다르다고 하면서 이러한 개념을 제한한다. 마르크스주의 과학과는 반대로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역사의 영역에서의 정치', 즉 '이론에서의 계급 투쟁'이다.(Althusser 1976, p. 68, 142)
철학, 관념론 그리고 유물론 Philosophy, idealism, and materialism

마르크스는 사상 분야에서의 지적인 주도권에 대한 철학의 전통적이며 결정적인 요구를 인정하고 철학자로서의 지적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곧 그러한 요구와 함께 철학 자체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갖게 되었다. 그는 '철학의 종말'이라는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것은 선험적 형이상학을 경험과학으로 교체하는 경험주의적 형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철학의 목적이나 목표를 곧 그의 실현으로서, 따라서 철학의 목적이나 폐지를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현실 자체가 아닌 이론의 다른 형식, 즉 과학 안에서 '실현된' 것으로서 철학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론의 모든 형식들 중에서 현실에 가장 가깝고 또 그것을 가장 잘 묘사할 수 있는 것은 과학인 반면에, 철학은 그의 예민한 통찰력까지도 고의적인 뒤틀림을 당하기 쉬운 그러한 이론의 한 형식이다. 왜냐하면 철학은 관념 자체에서 모든 다른 관념의 근거를 찾는, 따라서 일반적으로 사유의 영원히 타당하고 선험적인 기반을 형성하는 관념을 추구하는 가운데 정교하게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탐구욕이야말로 철학으로 하여금 선험적인 독단론과 완전한 회의론 사이에서 갈피를 못잡게 하는 이유이다. 철학을 통하여 근거를 찾는다는 것은 과학으로는 할 수도 없고, 또한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과학은 그 이론 자체에 근거를 갖지 않는다. 참으로 모든 이론은 물질적 실재에 그 기반을 두고 있지만, 과학은 그것을 알고 있는 이론의 유일한 형식이며, 따라서 적절하게 실재를 묘사할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이다. 그 물질적 구조 때문에 철학과 같은 이론의 다른 형식들은 물질적 실재가 무엇인가를 단지 미혹된 방식으로 묘사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철학을 대신함에 있어, 과학은 그 통찰 내용을 전유하지만 다시금 이것을 자신의 보다 적절한 형식으로 개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찰과 논의에서, 마르크스는 관념론에 대한 유물론의 옹호로 철학과 과학을 집약시켰으며, 또한 그 자신에 의한 사적 유물론의 사회과학이라는 구성체제 안에서 철학과 과학을 실례로 든다. 마르크스가 유물론을 하나의 철학으로서 옹호한다는 견해는 부분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존재한다는 확신 때문이다. 물론 전통적인 유물론도 하나의 철학이긴 하지만 그러나 역시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견해, 즉 철학은 다소 유동성이 있는 관념론을 종교로부터 보존하는 까닭에 철학도 유물론도 비록 그 자체가 철학적 관념론에 대한 진보이긴 하지만, 아직도 그 자체 철학으로서는 관념론적이며, 따라서 여기서는 사유의 토대를 물질적 실재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으로) 물질적 실재에 필수적인 관념으로 파악한다는 견해와 상당한 일치점을 갖는 듯이 보인다. 모든 회의론에 대한 철학적 대안은 언제나 존재론, 형이상학, 혹은 인식론이며 또한 물질적 실재 자체 내에 회의주의의 인정된 기반을 갖는 비철학적 대안은 과학이다. 과학에 있어서는 실재에 대한 인식은 가능하지만 그러나 개념적 준거 틀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어떤 관념이 아무리 과학적으로 간접적이고, 실재와의 일치를 내세워서 궁극적으로 확증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그 어떤 관념도 확실한 것일 수는 없다.
전통적 인식론은 지식을 인식된 대상과의 관계 속에 있는 어떤 주관의 소유로 간주한다. 그 지식은 주관의 마음 안에 있는 대상의 관념이지만, 유물론에 따르면 대상은 전형적으로 '물질적 실체' 혹은 '물질'이 된다. 철학의 고전적 출발점이 주관의 관념과 그 '관념의 방식'에의 일반적인 위임에 있다고 가정하면, 그러한 관념이 어떻게 관념 그 자체에 독립하여 있고, 외부에 있는 물질적 대상의 인식을 구성할 수 있는가 하는 회의적 문제가 야기된다. 철학적 관념론은 그러한 대상은 없다고 주장한다. 헤겔의 관념론에 따르면, 인식의 대상은 물질적이 아닌 관념적인, 즉 정신이 대상화하고 스스로 소외하는 행위 안에 있는 마음, 혹은 정신의 산물이다. 이 때 소외는 상실과 환상을 수반하는데, 즉 자아의 상실과 상실된 것이 정신 자체의 산물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라는 환상이 그것이다. 이것이 곧 헤겔에 의한 복귀와 조화라는 역사적 계도(系圖), 즉 의식 속에서 절대치를 목적으로 이어나가는 인식의 계도라는 무대를 장만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철학적 관념론을 그 철학적 반대물인 철학적 유물론으로 변형시키지 않고 사회과학의 요소로 변형시킨다. 그 과정에서 물질적인 것의 개념을 물질로부터 물질적인 실천으로 전이하면서 특히 사회적 유물론을 전개한다. 자연과학에 의해 획득된 자연의 지식은 그 지식 자체가 의식과 독립되어 있고, 의식 밖에 있음을 보여주는 대상의 지식이다. 그러나 철학적 유물론의 많은 부분을 수용하는 데 있어, 마르크스는 그의 근거가 되는 개체론적인 주객관계를 거부한다. 그는 헤겔을 추종하면서 생산의 능동적인 사회-역사적 과정으로서의 인식의 획득을 강조하지만 인식의 내용으로서 그것은 곧 정신적 행위로부터의 추상이며, 따라서 정신적 행위는 물질적 실천으로부터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물질적 재화의 경제적 생산으로부터의 추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유물론적 해석을 제시한다. 따라서 사유와 물질의 전통적인 이원성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항구적 조건인 물질적인 실천에 의해서 매개된다. 그러나 사회과학에서 사회-역사적 실천은 피할 수 없는 조건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인식의 대상이기도 하다.(→인식론) 과학적 지식의 대상으로서의 사회는 물질적 실천을 그 토대에 두고 있는 실천의 구조물이다. 비록 우리가 자연을 산출하는 것은 아니며, 특히 관념론이 주장하듯이 순수한 정신적 행위에 의해서 자연이 산출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재화와 인공물을 산출하며 그럼으로써 또한 우리는 고의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의 사회적 관계와 바로 사회 그 자체를 생산하거나 재생산한다. 여기서 실로 자연적이 아닌, 사회적 대상과 행위에 소외, 즉 상실, 환상 그리고 종속의 관계가 나타난다. 예를 들어 노동은 상품을 산출하는데, 그 상품은 자본에 의해 전유되면서 이 때부터 그것은 자본가의 것일 뿐 생산자의 것은 아니며, 또한 산물이 생산자를 조정할 뿐 그 반대의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다. 사회 자체는 이와 같이 소외된 산물이며, 이 사회는 자연적 대상으로서 그 구성원들에게 이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초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소외는 인간 조건의 영원한 측면이라는 뜻에서 철학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지배를 받는 어떤 것으로서, 더욱이 그 안에서 과학이 효과적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사회구조의 통일성은 모순적인 바, 즉 그 토대에 모순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갖고 있는 모순적 계급구조이다. 이러한 모순의 압력 아래서 사회는 그 이론적 이데올로기로서의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노동자 계급이 사회질서를 인간의 통제 하에 두면서, 이 과정에서 자신들과 인류를 자유롭게 하는 가운데 이러한 모순들을 제거해나가는 혁명적 상황을 향해 움직인다.

과학적 실재론과 변증법 Scientific realism and dialectic

전통적 인식론의 주객관계를 거부하는 데 있어 마르크스는 경험론에서 나타나는 그 특수한 형식을 거부한다. 이를 위하여 그는 근대 과학철학에서 근거를 찾음으로써 경험주의는 물론 해석학적 대안과, 더 나아가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이론에서 이 철학적 방법까지도 동시에 뿌리채 흔들어 놓은 하나의 개념을 마련하였다. 가장 널리 알려진 플라톤에서 나타나는 고대 철학 이론을 전유하고 변형함으로써, 마르크스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경험적 현상도 피상적인 것이며 그 배후에 깔려있는 실재의 성질과 모순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사회에 참여되는 자발적 관념 속에 기록되면서 일상언어로 개념화되고, 사회의 이론적 작업에 어느 정도나마 결정적으로 참여하고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이렇듯 실제적이면서도 표면적인 현상들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과학적 이론의 참된 기능은 현실의 경험적 표면을 꿰뚫어 보면서 '현상적 형식'과 현실의 근본적인 역사적 경향들을 산출하는 근본에 있는 구조와, 힘으로서의 '현실적 관계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에서의 이론적 개념들은 경험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관찰 개념으로 환원 가능한 것도 아니고, 관념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론가들에 의해서 실재에 부과된 주관적 구성도 아니다. 그 이론적 개념들은, 좀 더 정확하게, (물질적) 실재의 관찰될 수 없는 모습을 묘사한다. 마르크스의 과학 개념은 (→사실주의) 최근에 구성된 영국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그룹에서 논의되었듯이 실재론적이다.(→Bhaskar 1979 ; Mepham and Ruben 1979)
마르크스에 따르면 여기서 나타난 결과는, 발전된 과학은 전적으로 경험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험적(a priori)인 것도 아닌 개념을 포함하는데, 그것은 실재에 어느 정도 일치하는 개념적 준거틀의 부분으로서, '철학적으로'가 아니라, 과학적으로 아직 유효하거나 혹은 중단된 직접적인 경험적 증거를 넘어선다. 그리고 또한 과학적 방법의 결정적인 요소는 개념적 비판과 혁신이라는 점에서 나타난다. 일정한 역사적·문화적 위치를 갖는 사회적 실천으로서 마르크스학은 일상언어와 기존의 이론 양자의 개념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바, 이것은 지적 노력에 의해 생생한 재료를 더욱 적합한 이론적 산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한 시대의 관념은 곧 사회의 한 부분인 까닭에, 비록 자연과학이 아닌 사회과학에 있어서도 그 대상은 이해되고 설명되어야 하며, 따라서 마르크스가 과학은 그 관념들의 비판적 반대편에서 그 관념들을 그들의 물질적 조건에까지 추적함으로써 설명하고자 노력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사유의 유물론적 설명은 그 인식론적 평가와 모순된 것이며, 따라서 이것과 논리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회의적 상대론을 채택한다고 추정하는 '지식사회학'에서의 강력한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반대로 인식면에서 결함이 있는 관념을 여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그 물질적 조건까지 추적함으로써, 마르크스는 대상을 신비화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근저에 있는 실재를 숨기고 그 참여자들을 혼란시키며 신비화하는 현상을 산출하는 대상으로서 사회와, 특히 지배적인 생산 양식을 들추어낸다.(마르크스 《자본론》Ⅰ권 1장 4절, '상품의 물신숭배') 이 객관적인 신비화는 사회가 자신을 재생산하는 과정이 차지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그 신비화는 계급투쟁에서 지배계급을 지지하는 정치적 기능을 갖는다는 점에서 결국 다른 관념이나 이론에 관한 마르크스의 과학적 비판은 그 자체가 정치적이다. 그는 이런 관념 및 이론들을 부르조아 이데올로기로서 폭로하면서 또한 이들이 그 비판에 있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물질적 조건을 비판한다. 즉 '그들에게 그들의 조건에 관한 환상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헤겔 법철학 비판》서문) 이러한 방식으로 마르크스의 과학은 부르조아 과학철학의 기본적인 원리, 즉 그 대상과의 관계에서의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부인한다. 이것 역시 부르조아 이데올로기로서 폭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이렇듯 결함이 있는 관념이나 그들의 신비화된 물질적 조건이 오직 이론적 비판에 의해서만 변경될 수 있다는 가설과 결코 양립될 수는 없다. 그의 과학은 바로 그가 '혁명적인' 것과 동일시한 '실천적-비판적'(practical-critical)인 행위의 한 부분이다.(《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제1 테제) 즉 그것은 자본주의와 부르조아 사회의 실천적 전복을 초래하는 사회주의 운동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다. 마르크스의 과학은 노동계급의 관점에 선 과학이며, 그러한 과학은 성장하는 어떤 계급에도, 그리고 특히 또 다시 폐지돼야만 할 어떤 다른 계급으로서도 가질 수 없는, 그야말로 모든 계급에 공통되는 인식상의 우월성을 내세울 수 있다. 그것의 과학성은 단순히 그 위치와 조화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적 이데올로기로서의 그 위치를 실증적으로 요구하는 데 있다. 알뛰세와는 달리 '이론에서의 계급 투쟁'의 마르크스주의적 측면을 구성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과학이다.
이러한 관계들은 변증법이 갖는 유물론적 형식 안에서 바로 이 변증법에 의해 이론화된다. 부르조아 철학의 관점에서 마르크스가 취한 중요하고도 과격한 단계는 모순의 논리적 범주의 적용을 사유로부터 물질적 실재로까지 확대한 데 있다. 이 단계는 전진적인 논의의 한 부분이며, 또한 소외와 물신숭배 개념의 일반화라는 점에서 모두가 지적인 것이 된다. 이들의 유사성이 무엇이건 간에 사회과학은, 사유 그 자체는 사회과학의 대상인 사회라고 하는 현실의 한 부분이며, 따라서 인식상으로 (과학적으로) 평가되고 비판될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물질적 조건들과의 관계에서 설명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는 관점에서 비유기적인 실재를 연구하는 자연과학과 구별된다. 물질적 생활과 노동을 모양짓는 기본적 구조와 힘은 또한 정신적 생활과 지적 노동에 어떤 형태를 가한다. 따라서 그 명백한 내용 안에서 실재를 반영하려고 추구하는 사유는 물질적 실천의 현실을 그것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함축적이고 구조적인 방법을 통하여 반영할 것이다. 사유와 행위 사이의 이러한 설명적인 연결은 어느 정도 실재의 비밀을 판독할 관념 분석 가능성에 대한 어떤 전망을 제공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관념의 비판이 바로 이 관념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물질적) 실천의 비판과 통합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합은 소외가 특수한 경우를 이루는 모순의 변증법적 개념에 의해 범주화되는 것이다. 과학에서 모순은 비판적 범주, 즉 그것이 적용되는 것의 비논리성과 비합리성을 의미하는 논리의 범주이다. 그러나 실천은 물론 사유도 또한 다소 비합리적일 수 있다. 변증법적 과학에서 환상과 신비화를 구체화하는 모순된 사유의 체계는 역시 모순된 (물질적) 실천 체계의 구조적 비합리성들을 자신과의 갈등 안에서 반영한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참여자들의 관념을 신비화하고 혼란시키는 그러한 실천적 비합리성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비판은 도덕성의 범주가 아닌 합리성의 범주에 속하는 평가 유형을 내포한다.
그러나 이렇듯 실재하는 사회적 모순은 '철학적', 즉 인간적 조건의 영원한 부분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특수한 것이다. 다른 연관된 철학적 이념들이 이와 같은 주장을 한다. 혁명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제거하듯이, 구조는 보다 합리적으로 참여자들의 통제에 보다 접근할 수 있고, 또한 그 자발적인 사유는 보다 지적으로 될 것이다.(《자본론》Ⅰ권 1장 4절, '상품의 물신숭배') 물론 그 철학적 형식에서는 아니라 하더라도 해석학의 진리는 실현될 것이다. 또한 과학적 실재론의 진리가 폐기되면서 경험주의의 진리는 실현될 것이다. 사회적 현상과 실재 사이의 모순이 사라지면서 이와 함께 사회의 신비화된 성질도 사라질 것이다. 또한 더 이상 이론, 즉 사회과학의 필요성이나 가능성마저도 없어질 것이다.(Cahen 1978, p. 326)
이러한 도식은 실행되면서 동시에 철학에 대한, 그리고 철학과 이것이 유물론 및 관념론에 대해서 지니는 관계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 양자가 지닌 견해의 궁극적인 의미를 보여준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따르면 종교와 철학은 물론, 사회과학마저도 포함한 모든 이론은 그 마지막 분석에서 관념론적일 수밖에 없다. 즉 그것은 모든 노동의 분업형식 중에서 가장 중심을 이루는 것, 즉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와 그리고 이와 함께 신비화되거나 소외된 사회를 필요로 한다. 이제 과학이 철학을 흡수하며 또 폐기하고, 그 철학의 내용을 좀 더 유물론적인 내용, 형식, 그리고 존재 방식을 지닌 이론의 유형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현대의 특징이다. 그러나 완전한 사회적 유물론은 실천 안에서, 그리고 실천으로서 역사적으로 실현된 어떤 것이며, 더 나아가서 이것의 가해성(可解性)과 명료성은 이론이 없이도 그 행위자의 자발적인 사유에 납득되도록 해주는 사회적 실천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완전한 사회적 유물론은 아무리 찌꺼기로 남을지언정, 실천 생활로부터의 어떤 격리를 요구하는 행위 양식과 분리될 수 없는, 관념론이 없는 상태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특히 8번째 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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