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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학 ] (political economy)

이 용어는 종종 자원의 배분과 총경제활동의 결정을 연구하는 영역을 가리키는 경제학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마르크스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정치경제학의 보다 특별한 의미는 경제적 잉여의 분배와 축적, 가격, 임금, 고용, 그리고 축적의 촉진을 위한 정치적 배려의 효율성이나 비효율성을 결정하는 부수적인 문제들을 다룬 저술가들의 연구를 종합한 점과 연관된다.
그것은 주로 아담 스미스와 리카르도의 연구, 맬더스, 제임스와 존 스튜어트 밀, 맥컬로치, 씨니어와 같은 저술가들의 연구와 연관된다. 마르크스 자신은 과학적 정치경제학(아담 스미스, 리카르도, 그러나 주로 후자를 가리킨다;→리카르도와 마르크스)과 1830년대 이후 발전한 속류 경제학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마르크스는 그의 주저인 《자본론》을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최근 마르크스주의에 공감하는 학계의 경제학자들에 의하면, 부르조아, 또는 신고전경제학과 구분되는 급진적 경제학에 대한 표시로서 정치경제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스스로를 정치경제학이라고 부르는 이론 경제학의 다른 흐름은 민주주의적 정치과정과 시장결정적 경제관계의 상호작용을 연구한다. 이 연구의 골자는 시장(상품)관계에 근거하지 않는 한, 정치적 과정을 시장경제의 왜곡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들은 외견상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 다 아담 스미스의 저서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결국 이러한 저서들의 핵심은 시민사회라고 기술되는 자율적인 자기조절 경제 개념이다. 정치적 영역(국가)으로부터의 시민사회 독립의 가능성이 만약 방해받지만 않는다면 스스로를 조절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능력, 자유로운 모든 참여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최대 이익 획득의 그 잠재력으로 인해 시민사회가 국가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상태가 실현되리라는 철학적 희망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 아담 스미스의 천재서이 있다.
아담 스미스는 후속적인 발전과 분기(分岐)가 발생하는 근거를 정의하는 가운데, 그의 연구는 이들과의 적절한 관계 하에서 보여진다. 고립된 초기 경제학자들(특히 존 로크나 리차드 켄티론)과는 무관하게 정치경제학의 기원은 18세기의 계몽기에 나타난다. 종교적 권위에 대한 파괴가 사회적 사건들을 새롭게 설명할 필요를 제기했으며, 특히 아이작 뉴튼의 저서를 통해 나타난 17세기 자연과학의 성장은 과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그러한 설에 도달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사회적 사건들에 대한 과학을 구성하려는 노력의 한 줄기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이다. 분류학적 성격을 지닌 그의 저서들은 인간 사회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모델’을 제시했으나 역동적인 설명을 가하지는 못했다. 한 세기를 통해 사제관계로 이어져온 스코틀랜드 철학자들의 집단은 정치경제학이라고 그들 스스로 명명한, 사회과학의 기원이 되는 연구를 수행하였다. 프란시스 허치슨, 아담 훼거슨, 데이비드 흄, 아담 스미스, 존 밀러, 로드 케임즈는 이 집단의 중요한 구성원들이다. 그들은 전(全)사회의 생계획득 양식은 하나의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이행하고, 인간의 역사는 각 단계를 거치면서 성장해 나간다는 생각을 집단적이고 누적적으로 창조하였다. 사냥, 목축, 농업, 상업이 4개의 주요 양식으로 확인되었고, 다양한 사회적 조건, 즉 정치적 권위의 본성, 도덕의 성장, 여성의 지위와 ‘계급구조’는 모두 생존양식의 관점에서 설명되었다. 이것은 역사적 과정을 단일한 원인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며, 역사적 과정의 단선적, 일향적, 결정론적 모델도 아니다. 그것은 여행자들에 의해서 기록된 다양한 사회의 조건에 대한 광범한 자료와 그리스와 로마 이래의 다양한 국가들에 대한 역사적 설명에 의해서 지지되는 대담한 추론인 것이다.(→발전단계)
아담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유물론적’이라 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존 밀러가 보다 유물론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가장 유명했던 사람이다. 《국부론》에서 제시한 4단계 이론이 획기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그 이론의 논리는 스미스로 하여금 상업과 자유를 연결시키도록 유도했다. 상업의 성장과 자유의 성장은 상호 규정한다. 상업은 부와 번영의 열쇠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상업이 방해받지 않는 경우에만 최대의 번영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상업의 성장으로 나아가는 열쇠이다. 세계 각지에 퍼져 있고 가능한 한 유동적인 (이전할 수 있는) 형식으로 부를 축적하는 상업은 상인들을 정치적 전제로부터 독립시킴으로써 자유가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대시킨다.
산업혁명 초기 단계를 다루고 있는 자신의 저서에서 아담 스미스는 산업 생산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산업 생산에서의 분업은 생산물과 생산성에 있어서 전례 없는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증대된 생산물을 넓은 시장에 팔 수 있을 때, 분업은 이윤을 창출하게 되고, 여기서 생기는 이윤은 보다 많은 이윤이 남는 행위에 투자된다. 부의 성장을 분업과 시장 성장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면서, 스미스는 중농주의자들이 주장했던 토지에 대한 편견과 상인들이 주장했던 좁은 의미의 상업적 편견으로부터 경제를 해방시켰다. 잉여가치는 오직 토지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고 금전의 획득만이 경제적 부의 척도는 아니다. 그러므로 부는 팔 수 있는 상품의 형태를 띤다. 만약에 재산을 갖고 있는 사람이 그 재산을 생산적으로 투자한다면 부는 성장할 것이다.
아담 스미스 이론의 다른 측면은 개인들이 외적(정치적) 간섭에 방해받지 않고 그들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게 하는 방임의 필요성이다. 스미스는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 추구과정에서 간접적이고 비의도적으로 부의 축적을 촉진한다고 주장하면서, 시민사회의 개념을 자기조정 능력이 있고 자애로운 집단으로 규정했다. 개인적인 합리성은 집단적인 선(善)을 추구한다. 즉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무정부성이 질서 있는 세계로 인도된다고 간주하면서, 질서는 의도적인 정치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많은 개인들의 행위에 의해서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사적 이익의 영역은 공적 이익에 대하여 자율적인 것으로 되고 사적 개인은 시민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러나 질서의 붕괴와 경제적 영역을 감독하는 정부가 없는 상태에서 사적 이익을 둘러싼 내전에 대한 (예전에 가졌던) 공포와 대조적으로 스미스는 바로 사적 영역에서의 정부의 부재에 근거하여 조화와 선행, 그리고 번영의 청사진을 제공했다.
그래서 시민사회는 자율적이고 편리하며 진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부는 팔 수 있는, 즉 재생산할 수 있는 상품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생산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노동(과 생산성 향상의 열쇠가 되는 분업)이 이러한 상품들의 가치척도로서 선택되었다. 그러나 노동은 모든 가치의 원천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두 가지 중요한 불로 소득의 범주로서 지대와 이윤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넓은 의미에서 사회과학을 포괄하는 것으로 규정되는 이후의 정치경제학 연구는 이러한 스미스의 줄기들로부터 성장했다. 이들은 (ⅰ) 역사적 과정에 대한 경제적 이론, (ⅱ) 분업과 교환의 확대를 통한 축적과 경제성장의 이론, (ⅲ) 재산으로서만이 아니라 상품을 의미하는 것으로서의 부를 재정의한 것-그리하여 중상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과 자유무역의 옹호가 고취되었다. (ⅳ) 개인들의 자기이익 추구를 자유방임(laissez-faire)과 최소 정부를 위한 계획을 제공하는 집단적 선(善)으로 조화시킨 개인행위 이론, 그리고 (ⅴ) 노동을 가치의 척도, 때로는 그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노동가치설이다.
리카르도는 아담 스미스의 경제학적 연구를 위의 (ⅱ), (ⅲ)과 (ⅴ)에 중점을 두고 보다 범위를 좁혀서 재검토하고 다듬었으나, 그는 진보의 이론을 무시했다. 《국가론》에서 헤겔은 진보이론과 시민사회라는 개념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스미스로부터 도출한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국가철학 비판》을 통하여 스미스의 경제학에 접근했다. 시민사회와 정치적 사회로부터 시민사회의 분리가 근본적인 사회분열의 원인이며 역사적 발전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프러시아 세습군주제를 이상적인 국가로 합리화하려고 했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시민사회와 공적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적 사회 간의 모순은 헤겔의 관점에서 볼 때 시민사회의 위에, 또는 밖에 위치하는 정치적 조정자, 즉 ‘초계급적’ 중재자에 의해서만 조화될 수 있다. 이것이 계급제도, 관료제와 세습군주제였다. 헤겔이론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 마르크스는 헤겔과는 달리 공산주의를 추구했고, 인간의 자기 실현을 촉진함으로써 시민사회의 모순을 대치할 수 있다고 하는 3요소를 들고 있는 바, 그것은 보통선거권,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 증거로서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들었다. 그의 이후의 연구는 국가론에서 벗어나 시민사회의 기능론, 즉 정치경제학의 비판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실제로 발전이론은 마르크스의 손을 거쳐 사적 유물론이 되었다. 그의 가치론은 가치의 근원이자 가치의 척도라는 노동의 이중적 본질에 포함되어 있는 모순을 첨예화했다. 마르크스는 축적이론을 받아들인 반면에 내적 비판의 방법으로 자본주의 기능의 자선적인 측면을 문제시했다. 그는 자본주의의 역사성, 즉 역사적 단계로서의 자본주의를 증명하기 위하여 사적 유물론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본주의에 있어서 노동과 자본의 적대형태를 취하는 계급투쟁 이론을 체계화하기 위하여 가치 이론에 모순을 사용하였다. 그는 집단적인 합리성이나 공공의 이익과는 거리가 먼 개인적인 자기 이익의 추구가 어떻게 다시 위기로 순환되며,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려는 자본가들의 시도가 어떻게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붕괴시키고 정치적 투쟁에 의해서 사회주의로 넘어가게 되는지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들을 정치경제학 비판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는 정치경제학의 기본 범주가 역사적인 것이지 결코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경제는 저마다의 특정한 시기에 따라서 상대적인 이행을 하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경제학에 있어서의 발전을 보면,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마르크스의 비판을 간과했다. 1870년 이후의 신고전 경제학은 아담 스미스의 저서에서 (ⅰ)과 (ⅴ)를 무시했으나 그로부터 행위 이론과 자유무역 이론을 받아들여 순수경제학을 만들려고 했다. 축적이론은 슘페터와 후기 케인즈 학파가 부활시키기 이전까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제외한) 그 누구의 관심사도 되지 못했다. 마르셀과 피구[Pigou]의 영향 하에 있던 영국 경제학은 개인의 이익과 공공 이익의 단순한 일치에 대한 많은 예외들을 지적했으며, 경제적 부를 증진시키기 위한 정부 개입에 대해 논의하였다. 자원을 충분히 이용하기 위해서 경제적 능력이라는 옷을 입고 있는 시민사회의 자율성은 세이의 법칙에 대한 케인즈 비판 이후 다시 논쟁거리가 되었다.(→과소소비) 최근에 또 다시 자유방임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시카고 학파는 특정한 경제행위에 대한 개입이 ‘보이지 않는 손’의 실패를 바로잡을 것이라는 마르셀과 피구의 주장, 그리고 경제의 자기 통제적 본성을 반대하는 케인즈의 논의를 동시에 공격하는 무기로 이것을 이용한다. 이러한 신고전학파는 스미스의 주장에 복귀함으로써 정치경제학이라는 표제를 달고 있으나 고전적인 정치경제학의 역사적 차원을 간과하고 있다. 이러한 재생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하나의 경향은 민주주의를 자유시장의 효과적인 작용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하며, 정치를 경제에 종속시켜서 시민사회의 형식으로 국가를 세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경제학을 시민사회 이론으로 정의하는 것은 아직도 상당한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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