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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토] (Tito, Josip Broz)

토착농민과 슬로베니아 어머니 사이에서 892년 5월 25일 크로티아에서 태어났다. 쿠므로베크는 크로티아 자고로예에 있고, 크로티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 아래 있었다. 브로즈는 작은 일터들에서 기계처럼 일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에서 일했다. 그는 전쟁포로가 되었고, 러시아 오지로 유형에 처해졌다. 0월 혁명이 일어나기 몇 달 전 그는 자유로워졌고, 볼세비키 적군에 입대했다.
그는 공산당원으로 등록했다. 유고슬라비아로 돌아와서 그는 금속노조의 비서로서 그의 혁명적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체포되어 감옥에서 6년 동안을 보냈다. 그는 1934년에 풀려났고,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에 가입했다. 여러 번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1937년에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비서에 임명되었다.그의 성공은 공산당 지도자들의 내부 라이벌 다툼에 부분적 원인이 있었다. 1939년 1월에 그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총비서에 공식적으로 임명되었다.
나치 침략 이후, 1941년 남부 세르비아에서 그의 빨치산 활동이 시작되었고,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레지스탕스 운동을 이끌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티토의 권력은 전체 국가를 통제했다. 스탈린의 지시를 거부했고, 1948년에 코민포름으로부터 축출되었다. 1980년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지도자로 머물렀다. 그로부터 티토는 계속해서 유고슬라비아의 모든 혁명들에서 가장 중요한 목소리를 가졌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는 무장한 빨치산 군대의 최고 위원회에서 사령관이 되었다. 1943년에 유고슬라비아 민족전선의 반파시스트 의회의 제2차 회기는 6개 공화국들의 하나의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서 두번재 유고슬라비아를 세웠다. 티토는 자신의 모든 카리스마의 사용을 자신의 빨치산 동료들을 납득시키는데 사용했으며, 유고슬라비아의 모든 민중은 한결같은 권리로 승낙했다. 빨치산 투쟁은 공산주의자들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다당제를 위한 몇 가지 요구들을 정식으로 수용하고, 서양과 동양의 그들의 동맹국들에 의해서 전략적으로 지지를 받으면서 티토는 1945년 3월 7일 자신의 첫 정부를 세웠다. 이전 왕정의 정치가들과 해방전선에서 잘 싸웠던 몇 몇 빨치산들은 완전히 중립을 지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공산당의 강력한 정책에 의해서 무시되었다.
티토의 정치 경력에서 보다 위험스러운 것은 소련과의 충돌이었다. 코민포름과의 갈등은 모스크바와의 단절을 만들어 냈다. 티토의 내적 권력의 토대는 상당히 위협받았고, 당에서 상당한 규모의 추방은 매우 절실해졌다. 또한 그러한 절실한 필요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950년대 초에 시작된 자주관리는 맑스의 저서들 속에서 재발견되어졌고, 유고슬라비아에서 단계별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소심한 민주화는 내부로부터 다시 당조직을 위협했다. 1952년에 티토는 한 때 유고슬라비아 부통령이었던 밀로반 질라스와 그의 밀접한 지원을 일부러 피하려 했다. 그의 다른 후계자인 알렉산더 란코비치를 수년 동안 비밀경찰과 내무장관에 임명했다. 궁극적으로 그는 티토 자신을 통제했고, 그의 전화를 녹취했다. 1966년에 티토는 서열 2위였으며, 그의 보수적 동료를 불신하게 되었다.
강경파 란코비치의 몰락 이후, 경제적-정치적 해방이 일어났고, 이것은 독점 정당을 새롭게 할 듯 했다. 크로티아 봄과 다른 공화국들에서 일어나는 이와 비슷한 반대운동은 예상치 못하게 격렬하게 일어났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카라도르데보 위기 이후 1970년대에 티토에 의해서 억압되었다. 동시에 카르델리(슬로베니 에드바르드 카르델리)의 충고에 따라서, 그는 민족주의 항해의 바람을 타고 입헌적인 개혁들을 밀고 나갔다. 공화국들에 형식적 자치정부와 책임성, 보다 더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그는 연방정부의 구성원들 사이의 긴장들이 감소되기를 희망했다. 이와같은 정신으로 그는 그의 죽음 이후 체제의 연속성을 확보할 수 있는 하나의 연방 대통령직을 세웠다.
국제적 사건들 속에서, 티토는 냉전 기간동안 두 개 블럭으리 경쟁과 대항들로부터 많은 이익을 얻었다. 이른바 그는 비동맹 국가들의 운동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다.
티토는 1980년 5월에 죽었고, 그 구조들은 수년 동안 다소 만족스럽게 계속해서 안전하게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세워졌다. 그래서 나눠지는 열망들은 더 이상 화해할 수 없었고, 연방구조는 폭발했다. 외부 서구의 관심은 소련에서 공산주의 체제의 몰락에 의해서 침식되어지는 것이었다. 그의 출생 날자의 시작과 함께, 티토에 대한 많은 신화들이 있다.
서로 다른 이름들을 사용해서 그는 그의 것이 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어 이름으로 자신의 공식적 생활의 부분들을 제어하거나 끝맺었다. 아마도 이러한 모든 역사들은 유고슬라비아 역사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지 않다. 어쨋든 새로운 이야기들은 스스로 나타날 것이고, 모든 티토의 자서전들은 주의깊고 의심을 가지고 읽어야만 할 것이다.
티토에 대한 많은 자서전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Phyllis Auty의 "20세기의 정치 지도자 티토"이다.(Harmondsworth, Penguin Books,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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