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오웬 (1771-1851)(Owen, Robert) - [노동자의 책 : 마르크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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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오웬 (1771-1851)] (Owen, Robert)

웨일즈의 기업가이자 사업개혁가. 스코틀랜드의 뉴라나크에서 산업공동체 모델을 구상하였고 협동 조합을 개척했다. “사회에 대한 새로운 견해A New View Of Society(1816)라는 책을 썼다.
엥겔스는 “사회주의: 공상에서 과학으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때 29세의 한 공장주가 개혁가로서 등장했다. 그는 어린애처럼 순진하고도 고상한 품성을 지녔으며 보기 드물게 타고난 지도자였다. 로버트 오언은 인간의 성격이 타고난 체질의 산물인 동시에 인간의 일생, 특히 그의 발육기의 여러 환경 조건의 산물이라고 하는 유물론적 계몽주의의 학설을 채택했다. 오언과 같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업 혁명을, 단지 흐린 물에서 고기 잡기 좋듯 졸부가 되기에 알맞은 무질서와 혼돈으로밖에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오언은 산업 혁명을 자신이 동경하는 사상을 실현하여 이 혼돈 속에 질서를 세우기에 좋은 기회로 보았다. 맨체스터에서 이미 그는 5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일하는 공장의 지배인으로서 이 사상을 적용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1800년부터 1829년까지, 그는 지배인인 동시에 동업자의 한 사람으로서 스코틀랜드 뉴라나크의 커다란 방직 공장을 관리하는 데서도 똑같은 노선을 취했다. 이번에는 훨씬 더 자유롭게 활동하여 오래지 않아 그의 이름이 전유럽에 알려질 만큼 큰 성과를 거두었다. 뉴라나크의 주민은 점점 늘어나 2500명에 이르렀고, 처음에는 아주 잡다하고 대부분 몹시 타락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오언은 이를 완전히 모범적인 주민 집단으로 변화시켰다. 여기서는 폭음, 경찰, 형사 재판, 소송 사건, 빈민 구제와 자선 사업 등등이 전혀 필요 없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을 좀 더 인간에 알맞은 환경에 두고 특히 자라나는 세대를 잘 교육하도록 배려했기 때문이다. 오언이 창안한 유치원이 뉴라나크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거기서는 2세 이상의 어린이들을 받았는데, 어린이들은 이 유치원에서 어찌나 잘 지냈던지 부모들이 그 애들을 집으로 데려가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오언의 경쟁자들은 자기 노동자들에게 매일 13시간 또는 14시간 작업할 것을 강요했는데, 뉴라나크에서는 노동 시간이 10시간 반밖에 디지 않았다. 면화 공황으로 하는 수 없이 4개월간 휴업하게 되었을 때에도 휴업 노동자들에게 임금의 전액을 계속 지불했다. 그런데도 공장의 가치는 2배 넘게 늘어났고 끝까지 소유자에게 많은 이득을 보장했다.

그러나 오언은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노동자들을 위해 만들어 준 생활 조건도 그의 눈에는 아직 인간에 알맞은 것이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나의 노예였다.” 그가 말한 것은, 자신이 뉴라나크 노동자들에게 만들어 준 비교적 좋은 조건이란, 자유로운 생산 활동은 제쳐놓고라도 그들의 성격과 지능을 올바르고도 전면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아직 대단히 불충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2500명의 노동 부대는 사회를 위해, 불과 반세기 전에는 60만 명을 가지고서야 겨우 생산할 수 있었던 대량의 현실적 부를 만들어 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2500명이 소비하는 부와 60만 명이 소비했을 부의 차액은 어디로 갔느냐고.”

대답은 명백했다. 그 차액은 기업에 투하된 자본에 대한 5%의 이자와, 그 밖에도 30만 파운드가 넘는 이득을 얻은 공장 소유주들의 주머니에 들어갔다. 이 사실은 뉴라나크에서보다 훨씬 더 크게 영국의 다른 모든 공장들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 이 새로운 부가 없었다면, 나폴레옹을 타도하고 귀족적 사회 제도의 원칙을 보존하기 위한 전쟁을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힘은 노동자 계급의 창조물이었다.”

따라서 그 성과도 반드시 노동자 계급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었다. 지금까지 다만 개인의 부유와 대중의 예속화에 봉사해 온 데 지나지 않은 이 새로운 강대한 생산력이 오언에게는 사회 개조의 기초로 생각되었으며, 따라서 그것은 반드시 모든 이의 공동 재산으로서 모든 이의 공동 복리를 위해서만 쓰여야 할 것이었다.

이러한 순전히 실무적인 원칙 위에서, 말하자면 상인적 계산의 결과로서 오언의 공산주의가 생겨났다. 그는 자기의 이러한 실천적 성격을 언제 어디서나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1823년에 오언은 공산주의 이민지를 창설하여 아일랜드의 빈궁을 없앨 안을 작성하고, 거기에 필요한 투자액, 매년 지출과 수입 예상액에 관한 상세한 계산서를 덧붙였다. 오언은 미래의 제도에 대한 자기의 마지막 계획에서 평면도와 정면도, 조감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술적 세목을 작성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깊은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수행되었기 때문에, 일단 그의 사회 개조 방법이 채용된다면 심지어 전문가의 입장에서도 그 세목에 대해 반박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산주의로 옮아 간 것은 오언의 생애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가 단순히 박애주의에 머물렀던 동안, 그는 오직 부와 칭송과 존경과 명예를 거두었을 뿐이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명성 높은 사람이었다. 그와 비슷한 사회적 처지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ㅏ 정치가들과 군주들까지 그의 말에는 호의를 가지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공산주의 이론을 들고 나타나자 사태는 급변했다. 그의 의견에 의하면 사회 변혁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세 개의 큰 장애물, 즉 사적 소유, 종교, 현존 결혼 제도였다. 이러한 장애물과 투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자기가 공적인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잃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언은 이 점을 고려해서 그 장애물에 대한 자신의 가차없는 공격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가 예견했던 그대로 되었다. 공적인 사회에서는 내쫓기고 신문에서는 묵살되었으며, 자신의 모든 재산을 희생하여 미국에서 실시해 본 공산주의적 실험에 실패한 결과 가난해진 오언은 직접 노동자 계급에 의거하여 그들 속에서 30년 동안이나 확동을 계속했다.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영국에서 진행된 모든 사회 운동과 이 사회 운동의 모든 실제 성과는 오언의 이름과 연결되어 있다. 예컨대 1819년에는, 5년간에 걸쳐 그가 애쓴 덕택에 공장에서의 여성과 아동 노동을 제한하는 최초의 법안이 통과되었다. 그는 영국의 모든 노동 조합이 하나의 노동 총동맹으로 결집한 제1차 대회의 의장이었다. 또 그는 완전히 공산주의적인 사회 조직으로 넘어가기 위한 과도적 방책으로, 한편으로는 협동 단체(소비 조합과 생산 조합)를 조직했다. 이것은 그 뒤 적어도 상인이나 공장주들이 사회적으로 전혀 필요없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증명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그는 노동자 시장을 조직했는데 여기서는 노동 시간 한 시간을 단위로 하는 노동 증권으로 노동 생산물이 교환되었다. 이 시장은 어쩔 수 없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훨씬 뒤에 나타난 프루동의 교환 은행의 선구자였으며, 그 차이점은 전자가 모든 사회악에 대한 만능약으로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 전체를 훨씬 더 급진적으로 개혁해 나갈 하나의 첫 조치로 제시되었을 따름이라는 점이다.

이 공상가들의 사고 방식은 19세기 사회주의 사상을 오랫동안 지배했으며 또 부분적으로는 지금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와 영국의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바이틀링을 포함한 이전의 독일 공산주의는 이 사고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그들 모두에게 사회주의는 절대적 진리․이성․정의의 표현으로서, 발견되기만 하면 그 자체의 힘으로 전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절대적 진리는 시간과 공간과 인류 역사 발전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그것이 발견될 것인가는 실로 순전히 하나의 우연으로 여겨졌다. 동시에 절대적 진리와 이성과 정의도 각 학파의 창시자에 따라 서로 다르며, 각 학파 창시자의 절대적 진리․이성․정의의 특수한 형태는 그 학파 창시자의 주관적인 오성․생활 조건․인식의 넓이와 사고의 발전 정도에 따라 제약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절대적 진리들간에 충돌이 있을 때 이 충돌은 그 서로간의 차이를 마멸시킴으로써만(즉 절충과 타협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고 방식에서는,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와 영국의 대다수 사회주의 노동자들의 머리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특수한 종류의 절충적이고 평균적인 사회주의 이외에 아무것도 나올 수 없었다. 이 절충적 사회주의는 갖가지 분파 창시자들의 더 온건한 비판적 논평, 경제학적 명제와 미래 사회관이 마구 뒤섞인, 갖가지 색채로 가득 찬 혼합물이었다. 이 혼합물은 그 각 구성 부분이 논쟁의 물결 속에서 마치 시내의 조약돌처럼 그 날카로움을 잃으면 잃을수록 더욱 쉽게 얻어진다.

사회주의를 과학으로 만들려면 우선 그것을 현실의 토대 위에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사회주의: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내용은 임승수의 홈페이지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엥겔스) (http://reltih.cafe24.com/reading/utopia_science.hwp)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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