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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 開化] ()

개화란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문화적 발전을 이루는 것, 혹은 그러한 발전을 이룬 상태를 이른다. 특히 문명개화로 사용되는 경우, 서양 의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을 받아들이는 데 그 치지 않고, 서양의 사상과 지식, 풍습 일체를 받아들여 서양 사회와 같은 선진적 문명사회 로 발전 및 진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화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 동아시아에서 서구적 근대화를 가리키는 핵심 용어로 사용되었다.

1. 개설

대한화사전에 따르면, 개화는 '인지 혹은 사물이 열려서 발전하는 것, 세상이 열리고 문 화가 발전하는 것''교화를 열고 풍화교도 風化敎導하여 세운世運의 진보를 꾀하는 것'을 의미하여 개화의 원래 의미가 정신적 . 물질적 진보를 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역사용어로서의 개화는 일반적 발전이 아니 라 서양문명이라는 구체적 목표를 달성해 가 는 것을 의미하며, 19세기 후반부터 동아시아, 그중에서도 일본과 한국에서 서구문명을 수 용해 가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개화란 용어는 문명과 짝을 이루어서 문명 개화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문명은 원래 인지가 발달하여 정치적 . 물질적 생활이 풍요 로워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문명개화에 서의 문명은 서구문명을 가리키며, 서구 사회 가 동아시아 전통사회보다 발전했다는 인식 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개화 혹은 문명개화는 영어 civilization의 번역어로 성립되었는데, civilization은 라틴 어 'civis 시민, civilis 시민의, civitas 도시'에 서 유래하는 것으로, 영어의 civil'시민과 관계 있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여기서 civilization 이 라는 용어 가 성 립되어 '문명 화된 상태', 즉 야만의 반의어로 사용된 것은 18세 기부터였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국 부론에서 civilization을 자주 언급했는데, 여 기에는 유럽 문명에 대한 우월의식이 담겨 있 었다.

일본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 福澤諭吉서양사정 외편 西洋事情外編에서 civilization 의 번역어로 '문명개화'란 표현을 처음 사용 했으며, 1870년대의 서구화 풍조가 문명개화 로 불리면서 일반화되었다. Civilization의 일 본어 번역이 '문명'이 아닌 '문명개화'로 번역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문명개화란 문명 자체 를 가리키기보다는 서양문명을 배워서 닮아 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문명개화 는 서구화의 초기 단계가 마무리된 1870년대 중반까지 주로 사용되었으며, 이후에는 '문 명이라는 용어로 대치되어 갔다.

한국에는 1880년대 초 개화파 인사들 사 이에서 개화란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들은 부국강병을 위해 서양문물 수용이 필요하다 는 입장을 취했다. 유길준은서유견문西遊見聞) (1889에서 개화란 인간의 천사만물干事萬物이 지선극미至善極美한 경지에 이름을 말함.”이라고 규정했다. 개화란 용어가 조선 사회에서 폭넓게 사용된 것은 갑오개혁 이후 로서, 특히 1905년부터 본격화된 애국계몽 운 동기에는 개화와 자강이 거의 같은 의미로 널 리 사용되었다.

개화 혹은 문명에는 '야만'이라는 반대어 가 전제되어 있다. 영어에서도 civilizationbarbarism과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근대 초기 일본에서의 개화는 야만, 반개, 미 개와 같이 '인지가 미발달된 상태'를 의미하 는 용어와 대비되면서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 모든 사회는 미개 상태에서 문명 단계로 발전 한다는 문명발전 단계론이 자리 잡았다.

문명발전 단계론은 진보관, 사회진화론과 도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먼저, 진보관은 인 간의 역사가 끊임없이 발전한다고 보고 있는 데, 개화라고 하는 관념이 전제하고 있는 미 개에서 개화로의 발전이라고 하는 주장과 일 맥상통한다. 다음으로 사회진화론은 사회관 계를 약육강식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는데, 1880년대 일본에서 개화된 문명국은 강자로, 개화가 덜 된 미개국이나 반개국은 약자로 보 는 인식을 낳으면서 강자에 의한 약자의 지배 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애국계몽기 한국에서의 개화 자강 개념은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2. 형성

서구 사회에 civilization이란 용어가 성립한 18세기는 계몽주의에 의한 이성의 발견과 서 양문명에 대한 자신감이 싹트던 시기였다. 특 히 18세기 후반 영국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경제적 . 군사적 발전에 대한 자각 으로 스스로의 상태를 civilization으로 보고, 그렇지 못한 타자를 barbarism/uncivilized와 같이 표현하였다. 서양 비서양을 문명과 야 만의 이분법으로 보는 서구중심주의가 싹튼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개화는 이러한 서양의 civilization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성립했다. 다시 말 해, 서양의 문명이 우월하다는 인식을 토대로, 그러한 문명을 받아들여서 발전시키는 것이 개화의 의미이며 도달 목표였던 것이다.

개화 관념은 일본의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가장 먼저 개진되었다. 처음 문명개화라는 표 현을 사용한 후쿠자와 유키치를 비롯한 지식 인들은 일본의 발전을 위해서는 전통문화를 과감히 탈피하고 서구문물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러한 과정을 '개화'. '문명 개화'. '개명'이라고 지칭했다. 이처럼 서구문 명의 우월성을 적극 인정하고 서구적 근대화 의 길을 당연시하는 풍조가 확산되면서 1870 년대 일본은 문명개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 었다.

1870년대 후반 일본의 문명개화에 대한 자 신감이 커가면서 일본을 문명국의 일원으로 보는 시각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일본이 개 화라는 목표를 달성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서 개화라는 용어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이후 서양의 선진 문물을 가리키는 용어로 '문명이 사용되었으며, 일본의 발전상 태도 '문명'의 상태로 보는 시각이 일반화되 었다.

1880년대 이후 일본에서 개화는 조선 청 과 같은 주변국을 평가하는 잣대로서 사용되 었다. 일본이 개화의 상태에 접어든 데 비해, 조선 청은 반개 혹은 미개라고 하는 인식이

일반화되었다. 특히 조선에 대해서는 일본의 세력 확장을 위한 명분으로 1910년 한일합방 시점에까지 문명 미개의 이분법이 지속적으 로 적용되었다.

개화 개념은 1880년대 들면서 일본에서 한 국으로 도입되었다. 한국의 개항 이후 일본식 근대화를 목표로 하는 개화파 인사들이 중심 이 되었으며, 여기에는 김옥균 . 박영효와 같 은 주도 인물이 후쿠자와 유키치와 접촉했던 점이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조선 정부의 개 화정책을 적극 추진, 일본의 문명개화 정책 을 모델로 삼으면서 자신들의 목표를 개화로 표현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서양과 일본 문물의 수용을 주장하는 개화정 책 개화사상이 크게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개화파 인사들은 체포되어 처벌을 받거나 망 명을 했기 때문에 보수적 정치상황 속에서 개 화 관념은 설 자리를 잃었다. 유길준이 연금 상태에서 집필한서유견문의 경우도 일본에 서 출판되었지만, 정부가 금서로 취급하였기 때문에 널리 읽힐 수 없었다.

갑신정변 실패 후 개화사상이 다시 부상한 것은 1894년 갑오개혁이 개화파에 의해 주도 되면서였다. 이후 독립협회를 거쳐 애국계몽 운동에 이르기까지 개화 개념이 활발하게 논 의되었다. 그런데 조선에서 개화 관념이 본격 화된 시기는 국권이 위기에 처한 시기였다. 따라서 조선에서 개화는 국권회복 자주독립 이라는 과제와 밀접한 관련을 지닐 수밖에 없 었다. 즉 개화는 자주독립의 쟁취라는 구체적 목표를 지닌 용어로 사용되었다. 애국계몽운 동기에는 개화의 유사 개념으로 자강自强이 란 용어가 자주 사용되었다. 이처럼 애국계몽 운동기의 조선에서 개화는 막연하게 서양의 선진 문물을 도입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 라, 이를 통해 스스로의 힘을 키워서 자주독 립을 쟁취한 역량을 갖추는 것을 의미했다.

한국 . 일본과 달리 중국에서는 개화 . 문명 개화와 같은 용어가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중국에서도 19세기 후반.20세기 초에 걸쳐 서양문물의 수용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것은 '양무洋務. '변법變法У과 같이 특정한 측면 의 수용을 논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것 은 개화라는 개념 속에 담긴 서양중심주의 및 서양우월주의에 대한 중국 사회의 거부감과 결코무관치 않았다.

3.

내용과특징

일본

개화 관념의 성립: 근대 일본에서 개화 는 '문교文敎가 발달하여 인 ] (人知가 밝아 지는 것'이라는 전통적 의미와는 달리, 서양 의 문물을 수용하여 서구적 근대화를 달성하 는 것을 지칭했다. 이에 따라 메이지 초기의 일본에서는 흔히 문명개화의 형태로 사용되 었다. 여기에는 서양문명의 우월성을 인정하여 , 일본이 서 양문명을 수용 발전해야 한다 는 시각이 깔려 있다.

일본에 개화란 용어가 등장하게 된 것은 페 리 M. C. Perri내항 이후 일본 사회에서 서양 에 대한 인식이 변화한 결과였다. 막말幕末막부 말기의 경우 개국을 계기로 서양에 대한 관심과 탐구열이 본격화되어 양학자들을 중심 으로 서양의 과학기술 문명을 높이 평가한 화 혼양재론和魂洋才論이 주창되었으며, 일반인 들 사이에도 서양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에 반해 1866년에 출간된 후쿠자와 유키 치의서양사정 초편은 일본의 서양관에 커 다란 전환을 가져오는 역할을 했다. 후쿠자와 자신의 서양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 책은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그것은 서양 문물 전반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이었 다. 후쿠자와는 기술문명 중심의 서양 이해에 서 벗어나 주요 서양 국가의 역사 및 정치 . 경 제적 상황을 소개하였다. 그는서양사정 외편에서 서양의 발전된 상태를 civilization으 로 보는 입장을 수용하여, 이를 '문명개화'로 불렀다. 서양에 대한 인식을 공유한 개명적 지식인들이 늘어나면서 1873년에는 명육사 明六社가 조직되어 서구문명의 우월성을 주 창했다. 1870년대에는 메이지 정부도 서구문 물의 적극수용 방침을 추진하면서, 서구적 근 대화를 뜻하는 '문명개화'라는 용어가 크게 주목을 받으면서 사용되었다.

일본의 문명개화는 넓게 보면 메이지 전반 기의 서구화 과정 전체를 포괄하지만, 좁게 보자면 1870년대 초에서 중반에 걸쳐 집중적 으로 나타난 서양문물의 수용 양상을 가리킨 다. 1870년대 초 일본을 보면, 정부는 정권 수 립 직후부터 개국진취를 표방하면서 외국인 전문가 초빙, 유학생 파견, 근대적 교육제도 채용과 같은 서양의 선진문물 수용을 위한 각 종 정책을 펼쳤다. 지식인들은 계몽주의 운동 을 통해 과학지식의 수용, 법률의 개혁, 기독 교 전파, 공리주의나 사회진화론 같은 서구사 상 수입에 열중하였다. 정부와 지식인들을 중 심으로 시작된 문명개화의 풍조는 도쿄와 같 은 대도시, 요코하마와 같은 개항장 등을 중 심으로 급속히 전파되면서 서양식 생활풍조 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확산되어 갔다. 이러 한 일본의 문명개화는 서구문명을 받아들이 고 이를 사회발전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는 사 회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으며, 1870 년대 일본 사회의 지배 풍조로 자리 잡았다.

개화와 발전 단계론: 1870년대 일본에는 '문명개화'라는 용어가 일반화되면서 각종 서 양문물이 급속히 수용되었다. 문명의 개념과 내용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면서 문명의 본질 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런 데 여기에는 서구문명을 보편문명으로 받아 들이는 서구중심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일본 의 서양문명 수용의 필요성을 촉구하는 계몽 적 성격이 담겨 있었다.

기조F. Guizot)Ц- 버클H. T. Buckle의 역사 서는 일본에 문명발전 단계론의 성립에 큰 영 향을 미쳤다. 버클은영국 문명사에서 당시 영국. 프랑스는 '개명국開明國러시아 튀 르크는 '야만의 풍습을 벗어나지 못한' 곳으 로 보았으며, 기조는구라파 문명사에서 "문 명은 각각 독립하여 법제가 없는 야만의 상태 에서 개화하여 교제의 정법 政法을 얻은 것이 다. 따라서 문명 중에도 또한 계급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서 양의 문명 이 곧 보편문명 이며 모든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모범으로 여겨 졌다. 문명개화기의 문명 관념도 이러한 근대 서양의 문명관을 바탕에 둔 것이었다.

그런데 근대 서양의 문명 개념에는 서양 우 월의식이 깔려 있다.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치 면서 서양에는 서양의 역사 경험이 모든 인류 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것이며, 서양의 근대문 명이 그러한 보편문명의 정수라는 서양중심 적 세계관이 성립했다. 여기에 진보적 역사인 식이 결합하면서 문명발전 단계론이 자리 잡 았다. 즉 모든 문명은 진보과정에 있으며, 그 차이에 따라 문명과 야만, 개화와 미개의 차 이가 있다는 것이다.

문명발전 단계론은 각 사회는 야만 상태에 서 개화의 상태로의 발전 단계를 밟는다고 보 고, 각각 문명의 발전 수준에 따라 등급을 매 겼다. 그런데 이때 기준이 된 문명은 구체적 으로 서구문명을 가리켰다. 즉 서구열강이 인 류문명의 발전상 최고의 단계에 있는 '개화' 혹은 문명 사회라고 본 것이다.

문명발전 단계론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후쿠자와 유키치의 설이 있다. 그는 문명 단계를 야만 . 반개 . 문명 의 3단계로 구 분하였다. 이 중 반개국에 속한 곳은 터키 . 중 국 일본 등 아시아 여러 나라들이고, 유럽 여 러 나라와 미 합중국은 최상의 문명국으로 분 류되었다. 그는 각 사회는 야만 상태에서 개 화 상태로의 발전 단계를 밟으며, 각각 문명의 발전 수준에 따라 발전 등급에 차이가 있 다고 하였다. 서구문명은 인류문명의 발전상 최고의 단계에 있는 '개화' 혹은 '문명'의 단 계에 속한다고 본 반면, 일본을 포함한 아시 아는 문명의 발전에서 크게 낙후되었다고 평 가하였다. 따라서 후쿠자와는 일본의 모습을 구미제국의 모습과 비교하면, 학문의 우열, 상 업의 활성, 국가의 빈부, 군대의 강약 모두가 유감스럽게도 현재 우리는 그들에 못 미친다 고 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일본이 서양제 국보다 낙후된 반개의 상태에 있다는 생각을 분명히 하였다. 이 외에도 야만 . 이속夷俗. 반개 개화 . 문명의 5단계설처럼 단계를 세분 화하든가, 단순히 상국 . 하국으로 구분한 경 우도 있었다. 그러나 서양을 가장 발전된 개 화로, 아시아를 반개 혹은 미개로 분류하며 서구중심의 세계관을 담은 것은 모두 공통적 이었다.

문명발전 단계론은 일본인에게 개화의 필 요성을 설득하는 계몽의 논리로서 중요한 역 할을 하였다. 후쿠자와와 같은 문명론자들은 인류의 문명이 야만에서 개화로 진보하는 것 이 자연의 법칙이라고 보고, 아직 개화되지 않은 사회가 서양문명을 배우는 것은 당연하 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 일본이 기존의 낡은 문명을 벗어버리고 서양의 것들을 배워서 개 화된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개화 관념과 전통문화: 일본의 문명개화 론은 서구문명의 우월성을 인정하면서 전통 문화에 대한 비판과 극복을 주장했다. 후쿠자 와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유교. 불교와 같은 전통사상에서 처첩제와 한자사용에 이르기까 지 전통문물 전반의 혁신을 요구했다.

일본 계몽주의의 과제는 유교중심의 전통 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서구문명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하는 데 있었다. 전 통문화의 정당성을 거부하고 서구문명을 중 심으로 새로운 문화질서 수립을 지향한 계몽주의가 일본 사회에 침투하면서 서구문명 중 심의 새로운 문명의식이 자리 잡아갔다. 그 결과 일본 사회에는 서구문명 우월관이 자라 났다. 계몽사상가들은 서구문명이 일본 문명, 나아가 중국 문명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전 통문명보다 우월하다고 보고, 우수한 서구문 명의 도입을 일본의 최우선 과제로 강조했다. 따라서 서구문명의 발원지인 서구 사회는 인 류발전 사상 가장 '개화된 사회로서, 모든 인 류가 모방해야 할 모델이 되었다.

동양 사상을 대표하는 유교와 불교는 동양 이 낙후된 원인으로 간주되어 계몽사상가들 의 집중적 비난을 받았다. 그 일례로, 후쿠자 와는 아시아인들이 어리석은 말들을 무비판 적으로 믿고 신불神佛이나 유교 성 현들의 가 르침에 현혹되어 왔다고 하는 등, 동양의 전 통사상은 대중을 '현혹'하는 해악적 요소로 보았다. 따라서 음양오행에 빠져드는 습성을 씻어내지 않으면 이치를 따르는 길로 들어설 수 없다.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고풍에 묶이 고 빠져드는 습성을 제거하지 않으면 인간사 회는 유지될 수 없다.”고 하며 계몽사상은 일 본의 전통사상을 배척하고, 그와 함께 전통적 세계관도 거부하였다.

개화물의 유행: 1870년대에는 개화의 필 요성을 쉽게 설명하여 알리기 위한 개화물들 이 다수 출간되었다. 개화물은 문명개화가 본 격화되기 시작한 1870년대 초, 그중에서도 1873.1874년 사이에 가장 집중적으로 출간 되었는데, 개화와 미개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 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불개화不開化의 사람들은 과거를 귀하게 여겨 시세에 따라 나아가고자 하지 않으며, 자국을 제일로 여기고 타국을 이적 . 금수라 부르며 자기보다 나은 것이 있다고 해도 이것을 배울 줄 모르 고, 귀족은 평민을 멸시하고 인정에 어긋나는 것이 적지 않으며, 이학을 연구하지 않기 때 문에 허탄虛誕에 빠져 지식이 부족하고, 기계는 조잡하여 무익하게 인력을 허비하고, 허 식을 귀하게 여기며, 사정에 어둡고, 이정의 교제는 겉으로는 온후하지만 속으로는 잔인 한 것이 많다.”고 비판하였다. 그에 비해 문명 국은 학술인력이 증기선 등의 각종 기계를 발명하며, 존비귀천의 구별이 없고, 지식을 쌓 고 공을 모아서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고 하였다. 문명과 비문명을 대비시켜 문명개화 의 당위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와 함께 문명개화의 의미와 내용을 대중 에게 설명하는 것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가 토 유이치加藤祐一문명개화는 의식주 . 미신 신앙 등에 대해서 유신 후 문명개화인 이 취해야 할 마음가짐을 보여주고 구폐를 타 파할 것을 권하였다. 오가와 다메지 小川.개화문답에는 구평舊平. 개차랑開次.과는 대조적인 인물이 등장하여 문명개화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진보적 사고의 소유자인 개차랑이 완고한 구평의 질문에 대해서 이해 가 잘 되도록 증거를 들면서 개화의 천명闡明을 위해 애쓰는 개화문답의 형식이 사용되 었다.

개화에서 구화로: 1870년대 일본 사회의 관심은 일본의 제도와 문물을 새롭게 바꾸어 서구 사회와 같게 만드는 데 있었다. 그 구체 적 대상은 일본 사회의 변화에 따라 약간의 차 이가 보이기는 했다. 1870년대 전반기 문명 개화의 고조기에는 서양의 각종 문물 . 풍습 . 지식을 수용하는 것이 강조되었다면, 1870년 대 중반 이후에는 입헌제라는 정치제도로 초 점이 옮겨갔다.

그러나 1880년대에는 일본의 개화에 대한 입장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난다. 1880년대가 되면 일본이 반개국이라는 시각이 일본이 동 양의 '신문명국', '동양의 영국'이라는 평가로 대치되었다. 일본 정부도 1881년의 '국회개 설의 조'를 통해 입헌제 실시를 약속함으로써 '](人智의 미발달'이라는 기존의 주장을 철회하고 일본의 문명성취를 인정하는 입장 을 취했다. 일본의 문명 수준에 대한 새로운 평가에 따라 문명론의 시각도 바뀌었다. 일본 의 문명개화에 대한 자신감은 곧 문명개화의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일본 사회에 서구문물 수용 풍조 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서구문물 수 용의 일차적 목표인 개화가 어느 정도 달성되 었다는 인식이 자리 잡으면서 새로운 목표가 설정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구화와 구화주의 였다.

구화주의歐化主義란 서구화를 의미하는 용 어로, 넓게는 1870년대의 문명개화를 포괄하 지만, 대개의 경우는 1880년대에 나타난 정부 주도의 서구모방 풍조를 일컫는다. 1880년대 의 구화주의는 일본 정부의 조약개정 정책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다. 당시 외무대신이었 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조약개정을 위 해서는 무엇보다도 일본이 미개하다는 서양 측의 인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하 였다. 일본이 서양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지 못한 것은 제 법규가 제정되지 않았던 것에 도 연유하지만, 우리나라가 미개 . 야만시되고 있었던 것에도 기인한다.”는 그의 판단에 의 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서양 사회의 인 식에서 탈피하기 위해서 구미의 제도문물 수 입과 보급에 한층 더 박차를 가했다. 구체적 으로 법률제도 개혁, 풍속상의 구미제도 모 방, 지육智育중심의 교육, 기독교 학교의 여 성교육, 무도회, 가장무도회 등을 진행하였다. 다시 말해, 구화주의는 문명개화기 이래 문명 수용론의 한 형태지만, 이전과는 달리 서구 열강이라는 대상을 염두에 두고 서양과의 동 등성을 인정받기 위한 수단으로 전개되었다.

서구문명 비판론: 근대 일본에서 개화 관념은 1890년대 서양문명에 대한 비판적 재 평가가 진행되면서 최종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1880년대 후반부터 일본의 서양문명

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을 뿐 아니라, 구화주 의와 같은 맹목적 서구화의 문제점들이 나타 났다. 이에 따라 서양문명의 가치에 대한 비 판적 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는데, 그 대표적 흐름의 하나가 정교사政敎社중심의 국수주의 였다.

1888년에 설립된 정교사는 정부 주도의 구 화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한 대표적인 반구화 주의 단체로 활동했다. 정교사의 핵심적 주장 은 서양문명이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는 견해 에 대한 비판에 있었다. 정교사는 일본의 문 명발전에 서구문명이 중요한 역할을 해온 점 은 인정하면서도 서구화 풍조, 특히 1880년대 구화주의 풍조에서 보인 무조건적인 서양문 물의 추종을 비판하였다. 정교사는 서양문명 의 절대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구화주의와 달 리, 서양만이 장점을 지닌 것은 아니라 일본 도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정교사의 주장은 서양문명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가 아니라, 서양문명의 장단점에 대한 이 해를 위해 전개된 것이라는 점에서 일본의 문 명론이 한 단계 성숙한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정교사가 일본문명이 서양문명과 대등한 가치를 지녔음을 부각시켰다고 한다면, 또 다 른 면에서 서양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등 장하였다. 즉 서구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던 근대문명, 특히 자본주의와 산업화에 따른 폐 해를 비판하는 사회주의의 주장들이 소개되 면서 서양문명이 긍정적이고 우수한 것만이 아니라는 인식이 자리 잡아갔다.

일본에 사회주의가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 은 청일전쟁 이후였지만, 그 주장이 처음 소 개된 것은 1880년대 중반의 일이었다. 일본 정부가 1882년부터 헌법 제정 준비를 위해 독 일 정치를 연구하면서 당시 독일의 마르크스 Karl Marx나 라살레 Ferdinand Lassalle와 같 은 이론가들의 사회주의가 소개되었다. 일본 정부도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k가 주창 한 국가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자 본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서양의 근대문명에 대한 무조건적 선망에서 한 걸음 벗어나 비판 적 가능성을 찾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1890년대 초 일본 사회에는 문명의 기준으로 여겨진 서양문명에 대한 무조건적 우월인식에서 벗어나 문명의 이면에 대한 깊 이 있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다시 말해, ‘문명 ' 이란 개념은 더 이상 단선적이며 무조건적 선 망의 의미가 아니었다. 일본 사회는 서양문명 의 범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으며, 한편에서는 일본 문화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일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개화와 조선 인식: 1880년대 일본에서 개화는 조선과 중국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주 로 사용되었다. 즉 개화 관념은 개화된 일본 과 낙후된 조선 중국을 대비하면서 일본이 이들의 개화에 개입해야 하는 논리로 활용되 었다. 이러한 인식은 1875년 강화도 사건을 즈음한 시기에 이미 드러났다. 강화도 사건이 발생하자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조선의 문 명화를 지도해야 한다는 논의가 대두했다. 당 시 일본 언론에는 일본과 조선 간의 발전상의 격차에 주목하여 조선을 야만시하며, 미국이 일본을 개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처럼 일 본도 조선의 문을 열어 개화시켜야 한다는 주 장이 제기되었다.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에도 일본이 조선의 문명화를 책임져야 한다고 하 면서, 일본의 조선 정책은 다름 아닌 '조선을 개화로 유도하려는 뜻'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 되었다.

이러한 조선 문명지도론이 본격화된 것은 1880년대에 접어들면서였다. 1880년대가 되 면 일본은 스스로가 '동양의 영국'이라는 의 식을 가지면서, 일본이 조선의 문명화를 지도 할 충분한 자격을 지녔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더구나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이 발발하면서 조선을 둘러싸고 청 일 양국 의 대립이 심화됨에 따라 일본 국내의 조선문 제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폭되었다. 후쿠자와 는 일본은 강대 强大하고 조선은 소약小弱하다. 일본은 이미 문명으로 나아갔고, 조선은 아직 미개하다.”라고 양국을 문명 미개의 이 분법에 따라 규정하였다.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대외 담론으로서의 문명론은 문명 대 야만이라는 이분법적 논리 를 다시 전면에 내세웠다. 이러한 청일전쟁기 의 문명론은 기본적으로 1880년대 초의 문명 지도론을 답습한 것으로, 청일전쟁을 통한 일 본의 무력사용을 적극 지지하는 논리가 되었 다. 조선이 문명화되지 못했다는 기존의 인식 은 이 무렵이 되면 한층 확대되었다. 일본의 전쟁포고와 함께, 후쿠자와가 청일전쟁을 "문 명개화의 진보를 꾀하는 자와 그 진보를 방해 하는 자와의 전쟁이며 문야文野의 전쟁이라고 규정한 것을 비롯하여, 전쟁의 성격을 서구적 신문명과 동아 적구赤拘문명과의 충돌로 보는 주장이 확산되 었다.

이러한 문명의 논리는 일본의 조선 정책이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불가피하다는 신념을 일본인들에게 심어주었다. 조선의 경우는 단 발령에 대한 저항에서 보이듯이 일본의 문명 론적 주장이 수용되지 않았던 데 비해, 일본 의 대중들은 정부와 각종 대중매체가 쏟아내 는 '문명의 전쟁'이라는 논리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고, 일본 사회에는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태도가 자리 잡아갔다.

한국의 개화에 대한 평가는 러일전쟁 무렵 에도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한국의 장래에 대 해서 그는 한국에는 지식이 없고 자력資力도 없으며, 또한 행정의 정황은 전술과 같다. 그리고 그 유래는 일조일석에 의한 것이 아 니기 때문에, 여러 문명사업의 개발과 진척을 그 나라 사람에게서 도저히 기대할 수 없다.” 고 하였다. 더구나 단순히 한국의 빈약함과 일본의 우월적 지위를 지적하고 한국에 대한 문명지도론을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지도의 형태를 '식민'이라는 형태로 구체화하 면서 한국의 식민화가 불가피하다는 당위성 을 도출했다. 한편, 한국의 식민화가 기존 지 배층의 부패와 무능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일본의 한국 식민이 한국인에게 유리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기한국

한국의 개화 관념: 한국 근대사에서도 개화는 널리 사용된 용어였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입장이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이광 린의 1870년대의 개화는 개국과 같은 개념으 로 사용되면서 해외에 대한 지식을 가져와야 된다는 의미였으며, 1880년대에는 외국 기술 을 받아들여 나라의 부강을 이룩해 나가는 것 을, 1890년대와 1900년대 초에는 국가의 독립 과 국민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으로 변화해 갔 다고 보았다. 이처럼 한국에서의 개화는 서구 문물의 수용을 통해 근대적 변혁을 꾀하는 개 화사상 개 화운동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즉 일본의 개화가 서구문물의 수용과 발전을 지향하는 문명개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데 반해, 한국에서의 개화는 근대국가의 수립과 외세로부터의 자주독립이라는 정치적 목표가 두드러진 것이 특징이었다.

한국의 개화 관념은 일본 문명개화론의 영 향을 받았지만, 그 구체적 내용은 상당한 차 이를 갖고 있었다. 일본 문명개화론과의 가장 큰 차이는 유교에 대한 입장에 있었다. 일본 문명개화론은 유교 불교와 같은 전통사상을 배척하고, 서양의 근대사상에 대한 적극적 수 용의지를 갖고 있었다. 이에 비해 유교적 세 계관이 강고했던 한국에서는 유교에 대한 철 저한 배제론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결과 개화 관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첫째는 전통문화의 토대 위에서 서구문화 수용을 꾀하는 입장이며, 둘째는 전면적 서구화 의 입장이었다.

대부분의 한국 지식인들은 유교적 토대 위 에서 서구문물을 수용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 한 입장을 대표하는 것이 1880년대 초의 동 도서기론자, 1900년대 초의 개신유학자들이 다. 1880년대 동도서기론자였던 김윤식은 개 화란 변방의 미개족이 거친 풍속을 고쳐 구 주의 풍속을 득하고 점차 고쳐나가는 것이라 고 했는데, 조선은 이미 문명의 땅이므로 다 시 개화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는 서양의 제도와 종교의 도입을 반대하면서, 서양 기술 에 한하여 수용할 것을 주장했다.

유길준은한성순보창간사에서 역사적 진보에 따라서 문명개화를 수행하는 것이 필 요하다고 하면서, 문명개화란 기본적으로 '일 국 인민의 지견'을 확대하는 것이라고 보았 다. 그는 서양의 부국강병을 인간의 지식과 문화의 진보의 결과로 파악했다. 유길준은 조 선은 반개화 상태이므로 점진적 개량을 통 해 완전한 개화로 갈 수 있다고 하여, 동도서 기론과 유사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외국이면 어떤 것이든 모두 좋다고 하고, 자기 나라 것 은 어떤 사물이든지 좋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개화의 태도가 아니라고 보았다.

1900년대 개신유학자인 장지연, 박은식, 신 채호 등은 문명개화를 위한 개혁을 통해 부국 강병을 달성할 것을 주장하여 각종 개혁론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들은 전통을 버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개혁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전 통을 완전히 부정한 문명개화론과 구분된다. 이들에게 개화는 예전과 지금의 형세를 짐 작하고 양쪽의 사정을 비교하여 그 장점을 얻 고 단점을 버리는 것이라는 절충적 의미를 지녔다.

이에 반해 문명개화론자들은 보다 급진적 개혁을 요구했다. 김옥균과 같은 급진개화론 자들은 서양의 법과 제도를 수용하는 것은 물론, 서양의 종교를 도입하는 것까지도 고려했 다. 이들은 기독교를 통해 조선의 위기를 극 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기도 했다. 또한 서구의 법과 제도 도입에도 과감한 입장을 보 여, 갑신정변 시기에 고종 폐위와 대통령제 실시를 고려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들도 유 교에 대해서는 여전히 애매한 태도를 취하여 유교적 세계관을 완전 탈피하지는 못했다.

개화론자들 중에서 유교배제론의 입장을 취한 것은 기독교를 수용한 경우였다. 윤치 호. 이승만과 같이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을 한 인사들은 유교적 질서에 대해 비교적 철저 한 비판을 하면서 서구적 가치와 문물 수용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기독교적 문명개화론은 서양문명의 핵심이 기독교에 있다는 믿음 위 에서 유교의 절대성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는 논의는 전통문 화의 극복을 주장하면서 철저한 근대화를 지 향하게 되었다.

개화 관념의 형성: 개화 관념의 성립은 개화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따라 그 시기 가 달라진다. 개화를 서구문물의 수용을 통한 발전이라는 의미로 규정할 경우, 개항 이전의 박규수를 개화적 사고의 원류로 보기도 한다. 중국의 아편전쟁과 병인 신미양요를 거치면 서 대외적 위기의식이 고조되는 속에서 박규 수는 일정한 범위에서 서양과의 통교 필요성 을 제기하였고, 강화도 조약 체결에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 '개화'라는 용어를 사용한 첫 기 록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시 통역관으로 참여했던 오경석이 개화의 인을 만나 개화를 이야기하니 서로 사귀어 친한 정이 매우 넘친 다.”고 한 것이었다. 여기서 개화는 서양문물 을 받아들여 발전을 한 일본을 지칭한다.

1880년대 들어 일본에 사절단으로 파견되 어 문명개화의 실상을 목격한 인사들이 늘어 나면서 '개화'라는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구문물 수용의 범위와 속 도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에 개화파 내부에 서 온건파와 급진파가 나뉘었다. 김옥균과 같 은 급진파 인사들은 일본의 문명개화를 높이 평가하면서 '개화'는 일본의 문명개화를 모델 로 한 발전을 의미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1879년 일본에 건너간 이동인이 일본의 문물 제도 및 서적을 들여왔으며, 1882년 김옥균 . 서광범이 도일하여 일본의 문명개화 실태를 시찰하고 후쿠자와 유키치와 접촉하여 문명 개화론을 들었다. 유길준, 유완수, 윤치호는 게이오의숙慶應義塾과 도시샤同志社에 입 학하여 새로운 학문을 배웠으며, 김옥균은 귀 국 후 일본을 모델로 한 개화정책을 추진했 다. 갑신정변 참가자들은 개화의 당위성과 필 요성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1884년 갑신정변에 참여한 인사들이 개화를 목표로 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한 것으로 파악하였 음은 사건 실패 후 정부의 심문 기록에 남아 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정치적 타격을 입은 개 화론이 다시 등장한 것은 갑오개혁에 의해서 였다. 갑오개혁과 독립협회에 의한 근대적 개 혁론은 자신들의 개혁 모델을 개화로 규정하 면서 적극적 개화론을 전개했다. 특히 독립협 회의 활동에 의해 개화 관념이 관인그룹에서 벗어나 독립협회의 활동을 통해 민중 속에까 지 침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갑신정변이나 갑오개혁이 정부권력 장악을 통한 개혁 시도 였던 데 반해, 독립협회는 일반인들의 계몽을 중시하여 교육사업과 신문발행, 토론회 등을 전개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국권상실의 위기 가 고조되면서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 흐름을 주도한 것이 문명개화론이었다. 문 명개화론자들은 한국의 국권박탈 원인이 한 국의 실력과 힘이 부족한 데서 기인한다고 보 았다. 우리나라는 아시아 대륙 동쪽 귀퉁이에 있어서 세계 문명에로의 진보에 때를 놓 쳐여전히 개화가 되지 못했다는 인식에 따 라, 문명진보를 위한 개화에 힘쓰는 것이 우 선적 과제라고 주장했다. 이들이 각종 단체를 결성하고 기관지를 발행하여 일반인들의 계 몽에 힘써 개화에 대한사회적 이해와 관심이 한층 확대되었다.

개화론과 일본 인식: 구한말의 개화사상 및 개화운동은 대개 일본을 문명개화의 모델 로 설정하고 일본과의 협력관계를 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러일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일 본은 침략적 주체로서보다는 문명의 전달자 로서의 이미지를 강하게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결여된 경우가 많 다는 문제점을 지녔다. 그런데 을사보호조약 의 체결은 그러한 일본의 이미지를 완전히 전 복시킬 수밖에 없었다. 애국계몽운동 단계가 되면서 조선의 문명개화의 후원자이면서 침 략자였다는 일본의 이중성이 명백해졌기 때 문이다. 따라서 애국계몽운동의 일본관은 국 권회복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위해서는 일본 과 대결해야 한다는 당면과제와, 문명개화의 달성을 위해서는 일본의 후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사이의 모순에 직면하게 되었다.

전면적 서구화를 주장한 문명개화론자들은 일본을 개화의 모델로 보았다. 1880년대 초의 김옥균과 같은 급진파도 일본 시찰을 계기로 개혁의 모델을 일본에서 찾았다. 대한제국 시 기 들어 일본 유학생들이 증가하면서 일본을 개화국으로 보고, 한국은 낙후된 반개국으로 보는 시각도 늘어났다.

문명개화론자들은 일본이 부국강병을 이룩 하였으며, 이를 통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문 명국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일본의 근대적 제 도와 기술, 그 외 각종 문물의 선진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중에서 한국의 자강을 강조한 애국계몽운동기에 강조된 것은 교육 분야였 다. 일본의 근대적 교육제도가 국가발전의 토대라고 보고, 한국에서도 국민교육에 힘써야 한다고 하여 이에 힘썼다.

이처럼 문명화의 논리에 따라 일본을 바라 볼 경우, 일본은 여전히 아시아 유일의 문명 국이며 한국이 본받아야 할 모델이었다. 이러 한 인식은 일본의 침략정책이 지닌 문제점을 직시하기보다는, 자칫 일본의 표면적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경우를 낳은 위험을 안고 있다. 예를 들어, 문명개화론자들은 일 본통감부가 주장하는 문명론의 정당성을 기 본적으로 수용하고 한국의 급선무는 '자강'을 이루는 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일본의 한국 지배 비판에 소극적이었다. 오히려 문명화된 일본이 한국의 개화를 지원하고 도와줄 것을 기대하는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물론 애국계몽운동기 문명개화론자들도 일 본에 대해 일정한 경계론을 갖고 있었다. 그 러나 국권회복에 앞서 개화와 자강이 필요하 다는 입장으로 인하여 일본에 대한 비판은 상 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었다.

4. 의의 및 평가

'개화'란 용어는 동아시아, 특히 일본과 한국 의 근대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위 치를 차지한다. 서양열강의 압도적 국력에 의 해 동아시아 세계가 크게 흔들리고 국가적 위 기가 고조됨에 따라, 서양문명의 적극 수용을 통해 위기에 대응하면서 새로운 국가적 발전 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것 이 바로 근대 초기의 개화론이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도 개화에 대한 국가 별 입장과 대응은 상이했다. 일본은 메이지 초기부터 전면적 서구화를 지향하는 문명개 화론이 지배적 흐름이 되면서 사회 전반의 근 대적 개혁이 진행되었다. 한국의 경우 제한적 서구화를 주장하는 온건개화론과 보다 전면 적 서구화를 주장하는 문명개화론으로 나뉘었으며, 갑오개혁 이후부터 문명개화론의 입 장이 본격적으로 성장하였다. 일본과 한국에 서 개화와 문명개화 관념이 개혁론의 중심에 있었던 데 비해, 중국에서는 개화라는 용어는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으며, 개혁론은 양 무 변법과 같이 서구문물 수용의 구체적 방 법과 방향에 대한 논의를 통해 진행되 었다.

개화에 대한 관심은 근대 세계의 주도권을 장악한 서구문명의 절대적 영향력을 볼 때 지 극히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서구문명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은 서구중심의 질서에 종 속될 위험성을 갖고 있었다. 일본의 경우 서 구적 근대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1890년대가 되면서 무분별한 서구문명 도입에 대한 비판 론이 제기되었으며, 서구문명의 절대성에 대 한 회의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는 서구적 근대화가 일본을 통해 수 용되었기 때문에, 개화 자체를 우선시한 논자 들의 경우 일본의 침략 의도를 간과하거나 과 소평가하면서 일부는 친일파가 되었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 근대에 있어서 개화 관념은 서구적 근대화를 향한 발전 과정을 지칭함과 더불어, 서양열강 내지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 배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를 낳았다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함동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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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호 개화사상의 단계적 고찰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1 1985.

이광린 한국개화사연구 일조각 1970.

주진오 19세기 후반 문명개화론의 형성과 전개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편 서구문화의 수용과 근대적 개혁 태학사 2004.

함동주 근대일본의 문명론과 그 이중성 청일전쟁까지를 중 심으로., 근대계몽기 지식개념의 수용과 그 변용 소명 출판 2004.

후쿠자와 유키치 정명환 옮김 문명론의 개략 광일문화사 1989.

. 개화당

大久保利謙,文明開化,岩波講座日本歷史15近代2)」(岩 波書店,1967.

植手通有,.本近代思想形成」(岩波書店,1974.

林屋辰三.,文明開化.」(岩波書店,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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