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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光州民衆抗爭)] ()

I 개관. 10.26 박정희 암살사건 이후 전민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폭발적으로 확대되어갔으나 19805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로 좌절되면서 급격히 침체되었다. 그러나 광주·전남 지역에서는 518일 학생시위를 시발로 새롭게 투쟁을 발전시켜나갔으며, 527일까지 10일 동안 정부·언론의 매도와 지역적 고립 속에서도 계엄 해제, 군부 타도, 김대중 석방 등 민주화를 위한 결사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한국 민족민주운동사에 획기적인 전환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II 배경. 박정희 정권은 극악한 정치적 탄압으로 전민중의 정치적·경제적 욕구를 억누르고 외자 도입과 수출주도형 성장정책에 의해 급속한 공업화를 이룩해냈다. 그러나 그 결과 한국경제의 대외종속성 심화와 산업부문간 불균형을 초래했으며, 성장의 성과를 내외 독점자본과 정부가 독점하는 상황을 창출하였다. 즉 외자의 무절제한 도입과 수출주도형 성장정책은 경제잉여의 해외유출을 증가시키고 산업구조의 파행성과 외채의 증대를 초래했으며, 농업의 파탄을 가져왔다. 내외독점자본의 강화는 토착산업을 몰락시킴으로써 고용구조를 파괴하고 상대적 과잉인구를 광범하게 퇴적시켰다. 한편 이러한 상황하에서 진행된 1970년대말 세계적 공황의 여파는 한국경제를 심각한 파탄지경으로 몰아넣어 근로민중의 불만을 폭발적으로 증폭시켰다. 함평 고구마사건으로 대표되는 농민운동의 고양과 동일방직, YH무역사건으로 대표되는 노동운동의 고양은 이러한 맥락에서 전개된 민중의 저항이었다.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투쟁 역시 계속 발전되어 상당한 민주역량을 축적했다. 대학생들의 반유신투쟁, 종교인들의 순교자적 저항, 교수·문인 등 각계각층의 민주화운동으로 반유신독재의 민중적 열망이 증대해갔다. 그리고 1970년대 민주화투쟁의 총체적 집약으로서 19791016일 부마 민중항쟁이 시작되면서 미국을 포함한 권력 내부의 갈등도 심화되어갔다. 결국 10.26 박정희 암살사건으로 유신독재에 파열구가 생기고, 민중의 민주화에 대한 기대와 열망은 급속하게 증폭되었다. 12·12쿠데타에 의해 새로운 군사독재정권이 태동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에도 사북항쟁을 정점으로 한 수백여 건의 파업투쟁이 전개되었으며, 5·15 서울역 시위를 필두로 한 학생시위가 끊이지 않는 등 사회 각계각층의 민주개혁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그러나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가 발표되면서 애국 민주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연행·구속 사태가 발생하고, 무력으로 민주화 요구를 억누름으로써 민주주의의 확대에 대한 기대는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일반적인 사회경제적 배경 외에도 광주·전남 지역의 특수성이 광주항쟁의 지역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박정희 정권하의 경제정책은 파행적 경제구조와 지역적 소외를 심화시켰으며, 고용능력의 부족으로 유휴 노동력을 광범하게 퇴적시켰다. 광주·전남 지역은 그 전형적인 곳이었으며 지역적 불만이 강하게 누적되어왔다. 10·26 박정희 암살사건 이후 김대중에 대한 지지를 통해 지역적 소외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5·17비상계엄 확대조치로 그가 구속되면서, 광주·전남지역 주민들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과 지역적 소외를 극복할 대안을 찾을 수 없게 되어 5·17 세력과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광주민중항쟁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전개된 것이다.

III 전개과정. 항쟁의 전개과정은 다섯 국면으로 구분된다. 1국면은 518일 학생시위에 의한 항쟁의 발단기이다.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18일 아침 교문앞에 집결한다는 결의를 한 학생들은 18일 전남대 정문 앞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곤봉과 대검에 의한 강력한 저지로 교문 진입에 실패하고 광주역에 재집결하여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대열이 점차 불어나면서 계엄군이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구타와 대검 진압으로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계엄군의 폭력 진압으로 시위대열은 해산되었으나 시민·학생들의 거센 분노를 유발시켜 광주항쟁의 시작을 알렸다. 2국면은 학생시위에 일반시민들이 합세하면서 민중봉기로 발전하기 시작한 519일이다. 전날의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학생들이 군경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시위가 격화되어갔다. 그에 따라 계엄군은 간선도로, 주요시설, 고속도로를 확보하면서 시위대열과 대치했으며 화염병, 돌 등으로 민중의 자위적 무장이 시작되었다. 3국면은 20~21일 오전에 이르는 시기로 기층민중이 점차 투쟁의 선두에 섰으며 무장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미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한 20일에는 근로 대중의 참여가 적극화되었으며, 민중의 원성을 사고 있는 신문사, 방송국, 세무서, 파출소 등 공공기관에 대한 점거, 방화 등의 응징이 전개되었다. 이날 밤 신역 부근에서 계엄군의 무차별 발포가 이루어지면서 사상자가 속출했고 시위대중은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칼빈 소총 등을 탈취하여 무장을 시작했다. 21일 오전에는 시위대 대표와 도지사의 협상이 있었으나 성과없이 결렬되고 계엄군의 무차별 발포가 계속되었다. 4국면은 21일 오후~22일 오전에 이르는 시기로 시위대중이 칼빈 소총으로 무장하고 시가전에 돌입했으며, 항쟁이 전남권에 확산되면서 농민의 참여가 증대되었다. 시위대중은 전투 지도부를 구성하고 광주 지역만의 고립된 투쟁을 극복하기 위해 목포 영암 장성 나주 등 17개 지역으로 항쟁을 확산시켜나갔다. 22일 오전 7시경에는 민중들의 총공세가 시작되어 공수부대가 도청과 도경에서 퇴각함으로써 광주 시내를 시민이 점령했다. 5국면은 22~27일에 이르는 시기로 계엄군에 의해 광주가 재점령될 때까지 시민의 자율적 자치가 행해졌다. 시위대중이 도청을 장악하면서 중간제계층을 중심으로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했으나 민중들의 항쟁의지를 충분히 수렴, 발전시키기보다는 원상복구와 사태회복에만 주력함으로써 수습대책위와 대중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23일부터 매일 개최되는 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 기회주의적인 수습대책위에 대한 규탄이 전개되고 계엄 철폐, 군부 타도, 김대중 석방 등 민주화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함으로써 25일 새로운 투쟁지도부를 결성케 했다. 또한 계엄군의 공격에 대비해 시민군을 조직하고 간단한 군사훈련도 시행했다. 마침내 27일 새벽 0시를 기해 외곽도로를 봉쇄하고 M16, 화염방사기, 수류탄, 탱크 등을 앞세운 계엄군이 무력 진압을 시작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도청을 재장악함으로써 광주항쟁은 종결되었다.

IV 성격과 의의. 광주민중항쟁은 유신독재의 종속적 경제정책과 억압적 정치구조 속에서 누적되어온 정치·경제적 불만이 5·17비상계엄 확대조치를 계기로 폭발된 것이었다. 광주항쟁의 성격은 참여세력, 투쟁의 내용, 투쟁방법 등 세 가지 측면에서 규정된다. 10·26 이후 광범하게 전개된 사회 전반의 민주화운동은 전민중의 정치적 각성을 급속하게 이룩해냈으며, 1970년대 이래 누적된 정치·경제·사회적 불만은 노동자·농민 등 기층민중만이 아니라 진보적 지식인·사무직 노동자·청년학생·중산층에 이르기까지 민주화투쟁에 참여하게 했다. 광주항쟁 역시 이러한 광범한 계급·계층이 참여함으로써 대중적 민중항쟁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항쟁과정에서 제기된 요구는 계엄 해제, 군부 타도, 김대중 석방 등과 25일 이후 제기된 미국 규탄 등이었다. 즉 한국사회의 지배세력으로서 군부 독재정권과 미국을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진정한 자주화와 민주화를 위해서는 이 둘을 타도해야 한다는 인식의 단초를 형성함으로써 변혁투쟁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또한 계엄군의 무자비한 살상에 대항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무장봉기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성격을 갖는 광주민중항쟁은 민족민주운동사에 커다란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첫째로 변혁운동의 방향성을 구체화시켰다는 점이다. 즉 반독재 민주화투쟁만으로 한국사회의 모순이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외세를 물리치고 민족통일을 달성해야만 완전히 자유로운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는 관점이 보편화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미국이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광주에 투입된 20사단과 공수부대의 이동은 미국의 지원 또는 묵인하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미국은 더 이상 우방이 아니라 광주항쟁을 억압하는 침략자로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반외세의 문제가 새롭게 제기되었고 한국의 변혁운동은 비로소 운동의 방향을 정립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로 기층민중운동의 활성화에 주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197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주로 지식인, 학생, 소시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나 광주항쟁을 통해 이들의 한계가 명확해졌고 기층민중의 투쟁성, 견고성이 확인됨으로써 변혁운동의 핵심주체는 기층 민중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셋째로 전국적 조직화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광주항쟁은 전남지역으로 파급되면서 고립성을 탈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다른 지역에서는 투쟁이 전개되지 않음으로써 결국 좌절되었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통일적인 투쟁을 지도할 전국적 조직화의 필요성이 등장했다. 결국 광주민중항쟁은 한국전쟁 이후 전개되어온 변혁운동의 목표를 투쟁과정 속에서 확립하고 민족·민주·민중 이라는 변혁운동의 성격을 규정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십이륙사건,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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