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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

폴란드는 18세기 후반의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 의한 세 차례의 분할로 국가로서의 독립을 잃었다. 제2차 분할 이후의 코시치우슈코 봉기(1794년)를 시작으로 19세기에는 폴란드의 독립회복을 요구하는 슐라흐타(szlachta, 폴란드 귀족)가 수차례에 걸쳐 봉기를 일으켰다. 11월 봉기(1830-31년)의 패배 이후에는 서구 등으로의 대규모 망명(대망명)이 발생함으로써 국외에도 해방운동의 거점이 만들어졌다.

맑스와 엥겔스는 역사가 렐레벨을 비롯한 재외 폴란드인과의 교류나 그들의 저작을 통해 자신들의 폴란드관을 길러나갔다. 엥겔스는 폴란드인을 '역사 없는 민족'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남슬라브인 등과 대치시켜 '역사적 민족'이라 부르고 그 해방운동에 일찌감치 주목하고 있었다. 1848년 혁명기에는 민주적인 러시아나 독일의 건설을 위해서는 폴란드의 해방이 불가결하다고 하여 폴란드 국가의 재건을 지지했다. 맑스 등의 폴란드 문제에 대한 이해에서는 시대상황에 따른 변화가 보이지만 이러한 입장은 평생 일관되어 있었다. 나아가 파리 코뮌 등 다른 국민의 혁명운동에도 자진해서 협력한 폴란드인을 유럽 민족들 중에서 유일한 '혁명의 코즈모폴리턴적인 병사'라고 평가하며 이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령에서 슐라흐타가 주도한 크라쿠프 봉기(1846년)가 갈리치아의 농민운동을 적대하고, 러시아에 대한 1월 봉기(1863년)가 농민해방을 제기하면서도 결국 농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좌절했던 것처럼, 맑스 등이 폴란드 독립의 불가결한 조건으로서 기대한 농업혁명은 19세기에는 실현되지 못했다. 1월 봉기의 패배 후에 무장봉기에 의한 독립회복 노선이 후퇴하고 착실한 생산노동에 의한 자립을 지향하는 포지티비즘(positivism) 운동으로 대체된 이후 1870년대 후반에는 사회주의 운동이 조직화되어간다. 이후 사회주의 운동은 거의 동시기에 일어난 민족주의 운동에 대항하면서 폴란드의 해방이라는 과제를 짊어지게 된다.

1880년대 이후에는 정당의 결성이 진행되는데, 폴란드에서는 그 모두가 맑스와 엥겔스의 생각에 찬동한 것은 아니었다. 1880년대 초두에 독립회복을 첫 번째 목표로 하는 그룹과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연대를 주장하는 그룹의 두 조류가 형성되고, 1890년대에 들어서서 전자는 폴란드 사회당, 후자는 룩셈부르크 등을 중심으로 하여 폴란드의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프롤레타리아트'(1882년 결성)의 흐름을 흡수하는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을 결성한다. 양자의 대립은 제2인터내셔널로 넘겨졌다. 이때 맑스는 이미 사망한 뒤였고 만년의 엥겔스가 접촉한 것은 주로 사회당인데, 이에 따라 사회당은 인터내셔널의 장에서 좀 더 유리한 입장에 선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성립한 독립 폴란드에서도 세계대전 중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사회당 우파(1906년에 분열)의 지도자 피우스츠키가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사회민주당은 폴란드 독립 후에 사회당 좌파와 합동하여 폴란드 공산주의 노동자당(공산당의 전신)을 결성하고 레닌의 노선에 접근해간다.

-시바 리코( )

[네이버 지식백과] 폴란드 (맑스사전, 2011. 10. 28., 마토바 아키히로, 우치다 히로시, 이시즈카 마사히데, 시바타 다카유키, 오석철, 이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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