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어 신문』] (Trierische Zeitung; Trier'sche Zeitung )
1840년대에 사회주의적 경향을 띤 신문. 1814년 헤츠로트가 창간한 당초에는 보수적인 신문이었다. 처음에는 주 2회 발행이었지만 주 3회, 주 4회, 주 5회로 늘려가며, 1838년 일간신문이 되면서 정치적 색채도 강해진다. 1841년 프리드리히 3세의 즉위에 즈음해 검열이 완화됨에 따라 양상이 일변한다. 편집장으로는 발터가 취임하고 지방신문에서 전국지로 확대하기 위해 칼 그륀 등의 해외통신원을 둔다. 맑스에게 모젤 문제의 자료를 제공한 페터 코블렌츠나 하인리히 베티히 등도 통신원이었다.
사회주의적 경향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1844년 이후이다. 트리어에는 당시 『룩셈부르크 신문』(1844-45)과 『트리어 인텔리겐츠블라트』(1845-48)가 있어 격렬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이 둘은 보수신문이며, 『트리어 신문』의 독자층은 급진파에 국한되어 있었다. 『트리어 신문』은 1,000부가 넘는 부수를 인쇄하고 있었지만, 진정사회주의의 철학 논의는 독자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었다. 맑스 자신은 이 신문의 협력자임을 『라이니셔 베오바흐터』에서 지적받고 그것을 부정했는데, 그 이유로는 그륀과의 반목관계가 있었다. 맑스의 친구인 바이데마이어가 편집에 참가해 철학적 논의로부터 구체적인 논의로 기사의 내용을 바꾼다. 그러나 바이데마이어도 발터와 충돌하면서 이 신문과 맑스파와의 관계는 결렬된다. -마토바 아키히로(的場昭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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