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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혁명] (Révolution de Juillet )

복고왕정(1815-30년)을 타도하고 7월 왕정을 성립시키게 된 프랑스의 혁명.

【Ⅰ】 혁명의 배경

나폴레옹 몰락 이후 성립한 부르봉 왕조 루이 18세의 복고왕정은 흠정헌법인 1814년 6월의 '헌장'에 의해 그 기본적 성격을 규정받고 있다. '헌장'은  앞의 평등, 소유권의 불가침, 기본적 인권을 담고 있으면서도 국왕의 긴급대권을 규정하고 있고, 의회의 권리는 상대적으로 낮다. 가톨릭이 국정종교이며, 신수권()을 정통화 원리로 삼고 있다. 상원이 국왕이 임명하는 세습 귀족이었던 것에 더하여 하원의 선거권도 직접세 300프랑 이상을 납입하는 30세 이상의 남자 약 9만 명으로 한정되는 극단적인 선거제한제가 시행되었다.

복고왕정기에 가장 강력하게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토지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과격왕당파(Ultras)이다. 그들은 혁명과 제정을 부인하고 귀족특권 위에 서는 군주제 국가를 지향했다. 이에 대항하여 형성된 것이 구제도와 혁명이라는 두 원리의 화해를 기본정책으로 삼고 있는 입헌왕당파인데, 그들은 제한선거에 기초하는 온건한 입헌군주제를 지향했다. 그 이론적 지주는 기조와 루아예 콜라르 등의 순리파()이다. 1815년의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과격왕당파는 이듬해인 16년의 선거에서 소수파로 전락하지만, 24년의 선거에서는 다시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나아가 24년에 루이 18세가 사망함에 따라 과격왕당파의 수령인 아르투아 백작(루이 18세의 동생)이 샤를 10세로서 즉위하기에 이르러 반동적 입법들이 이어졌다.

독성죄() 처벌법, 망명귀족배상법이 성립하고, 장자상속 법안, 출판물통제 법안이 제출되었다. 이에 대해 반과격왕당파 세력은 27년의 선거에서 승리하고, 29년 8월에 과격왕당파 극우의 폴리냐크 내각이 성립하기에 이르러 반정부 연합이 형성되어 7월 혁명의 전제가 되는 정치세력의 배치가 완성되었다. 또한 경제면에서는 1826년부터 시작된 전면적 불황에 더하여 1828년의 농업 흉작에 따른 식량위기, 음식물 가격의 상승이 일어나 특히 파리에서는 금융불황은 건축과 수공업부문 등에 커다란 타격을 주고 있었다.

【Ⅱ】 혁명의 경위

7월 혁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7월 칙령이다. 폴리냐크 내각은 1830년 5월 16일에 국왕과 내각에 반대하는 세력을 의회에서 일소하기 위해 의회를 해산하지만, 6-7월의 총선거에서 대패하여 7월 25일, 대단히 반동적인 긴급칙령을 발동하기에 이른다. 출판의 자유의 정지, 소집되지 않은 하원의 해산, 선거법의 개정 등을 내용으로 하는 이 칙령은 선거권을 상층 부르주아지로부터도 빼앗아 대토지 소유자에게만 한정함으로써 정권의 유지를 획책했던 것이다.

7월 칙령이 『모니투르(Moniteur)』(정부관보)에 발표된 7월 26일, 티에르를 비롯한 44명의 저널리스트가 항의문을 제출한다. 일부 학생의 항의집회도 있었지만 비교적 평온하게 지나갔다. 다음날 27일 『나시오날』, 『르 땅』, 『지구』지는 칙령을 무시하고 발행되었다. 파리의 중심부에서 수공업자, 직인, 소상인, 학생 등이 항의행동을 일으키고, 28일 아침에는 바리케이드가 구축되어 대중반란으로 발전했다. 시가전이 시작되자 정부군 일부가 혁명측에 합류하면서 29일 오전 중에 혁명 측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27일부터 29일까지 3일간의 전투는 '영광의 3일'이라 불리며, 그 희생자는 현재도 바스티유 광장에 서 있는 '7월의 기둥'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다.

【Ⅲ】 혁명의 결과

'영광의 3일'을 쟁취한 것은 파리의 민중이었지만 샤를 10세의 사망, 복고왕정 붕괴에 따른 사태수습에 나선 것은 대은행가이기도 했던 라피트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정치가들이었다. 파리 민중에게는 스스로 공화정을 수립할 만한 능력은 없었고 공화정 성립을 위한 국내외의 환경도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부르봉 왕조의 종언을 선언함으로써 사태는 수습되고 당시 자유주의자로서 알려져 있던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맞이해 7월 왕정이 성립했다.

덧붙이자면, 7월 혁명은 파리에 한정된 혁명이긴 했으나 노르망디, 알자스, 로렌 등 선진공업지역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일반적으로 7월 혁명은 군주정 원리에 대한 투쟁이라기보다 귀족제도에 대한 투쟁으로서 위치지어진다. 혁명 후에도 귀족의 정치력과 경제력은 일부 강력하게 잔존하지만, 혁명을 계기로 하여 공적 영역에서의 귀족의 제도적 지배는 종언으로 고하게 된다. 국제적으로 보는 경우에 7월 혁명은 빈 체제를 약체화시키고 유럽 각지에 자유주의를 침투시킨 의의를 지닌다.

-다카쿠사기 고이치()

[네이버 지식백과] 7월 혁명 [七月革命, Révolution de Juillet] (맑스사전, 2011. 10. 28., 마토바 아키히로, 우치다 히로시, 이시즈카 마사히데, 시바타 다카유키, 오석철, 이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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