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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역사 연구] ()

【Ⅰ】 역사주의의 서막

18세기의 계몽주의자는 인간 이성에 절대적인 신뢰를 두고 이성이야말로 이 세계를 지배하는 가장 근원적인 법칙이며, 따라서 역사는 이 보편법칙의 나타남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얼마 안 있어 18세기 말부터 세력을 얻은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비판된다. 즉, 낭만주의자들은 계몽주의자들이 주창한 보편주의를 버리고 모든 사물에 대해 그 자체에 특유한 개성을 인정하는 입장으로 옮겨갔다. 그것도 단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에 주목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민족, 하나의 시대에서 각각의 개성을 발견했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 이래로 연면히 이어져온 순환사관이 극복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개성의 발전으로서의 역사는 일회성을 지니는 것으로 결코 반복하지 않는다. 역사를 개성의 발전으로 간주하는 이러한 입장은 '역사주의'라 불리는데, 19세기 전반기부터 특히 독일에서 명확해졌다. 그 때문에 19세기는 '역사주의의 세기'로 불리기까지 한다. 그러한 19세기의 독일 역사학을 크게 나누면, (1) 정치사적 경향(랑케가 대표), (2) 경제사적 경향(맑스가 대표), (3) 문화사 혹은 정신사적 경향(부르크하르트가 대표)이라는 세 방향으로 구별할 수 있다.

【Ⅱ】 랑케 사학과 그 반대자

우선 첫 번째 경향을 대표하는 레오폴드 폰 랑케에 대해 검토해 보자. 그는 1818년 라이프치히 대학을 졸업한 후 1825년까지 프랑크푸르트 암 오데르의 중등학교 강사가 된다. 그 사이에 니부어의 감화를 받아 역사 연구에 들어서며, 1824년에 『로마 및 게르만 민족들의 역사』를 발표하여 인정받고 1825년 이후 베를린 대학 교단에 섰다. 1828-31년에 사료 조사를 위해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이 성과는 저작 『로마 교황사』(1834-37)로 나왔다. 또한 귀국 후 한때 정부의 의뢰를 받아 프랑스적인 자유주의 사조에 대항하는 학술 잡지 『역사정치잡지』를 편집하지만, 1836년 다시 베를린 대학으로 돌아가 교수가 된다.

랑케에 따르면 역사가의 임무는 "그저 과거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또한 랑케와 마찬가지로 실증적인 로마사 연구를 행한 학자로 『로마사』(1854-56)의 저자 테오도르 몸젠이 있다. 다만 그는 랑케와 달리 반()비스마르크파의 자유주의자였다.

한편, 랑케 사학에 반대하며 활약한 역사가로 칼 람프레히트가 있다. 그는 1885년 본, 1890년 마르부르크, 1891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각각 교수를 역임했다. 처음에는 치밀한 중세경제사 연구에 종사하는데, 그의 대표작은 『중세 독일의 경제생활』(전 3권, 1885-86)에서 볼 수 있다. 나중에 정치, 경제, 문화의 통일적 파악을 지향하여 각 시대는 각각 일정한 심리적 특징을 지닌다는 관점 하에 대저 『독일사』(1891-1909)를 저술했다. 람프레히트에 따르면 역사는 개인 심리가 아니라 사회 심리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개인, 개성을 중시하는 랑케 사학과 충돌했다. 람프레히트에 따르면 역사는 전설이어서는 안 된다. 전쟁의 역사, 정치의 역사는 전적으로 개인의 역사일 뿐이다. 역사는 그러해서는 안 되며 집합적인 역사여야만 한다.

그 밖에 랑케의 몰정치성에 만족하지 못하여 역사 연구와 정치활동을 결부시킨 랑케 아류라고도 말해야 할 일파로 프로이센학파가 있다. 대표자는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이다. 그는 1848년에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의원이 되어 세습 제정파(소독일주의)에 가담했다. 젊은 시절에는 고대사 연구에서 성과를 거두어 예를 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전』(1833), 『헬레니즘사』(1836-43) 등을 발표했지만, 후에는 프로이센 통일이라는 정치과제와 결부시킨 『프로이센사』(1855-86)를 발표한다. 덧붙이자면, 프로이센학파의 막내로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가 있는데, 그는 『19세기 독일사』(전 5권, 1878-94)를 집필한다.

【Ⅲ】 맑스의 유물론적 역사관

두 번째 경향을 대표하는 맑스는 유물론적 역사관의 창시자로서 역사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맑스에 따르면인간의 사회생활에서는 일정한 생산력에 따라 일정한 생산관계들(인간들끼리의 결합, 즉 생산양식)이 성립하며, 그것이 사회의 하부구조를 형성한다. 이를 토대로 하여 현실적 개인들은 그 위에 정치 · 법률 · 사상 등의 상부구조를 만들어낸다. 생산력 즉 인간의 힘들의 발전에 따라 생산관계들(인간관계들)과 생산력(인간의 힘들) 사이의 모순이 커지게 되고, 일정한 단계에 도달하면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혁명을 일으켜 경제적 토대를 재편성한다.

맑스는 이와 같이 역사는 인간의 힘들과 관계들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고 보고, 인류 사회는 원시공산제 · 노예제 · 농노제 · 자본제의 각 단계를 경과하여 이윽고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한다고 이야기했다. 『독일 이데올로기』(1845-46),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859) 서설 등에서 그 이론이 전개되고, 『혁명과 반혁명』(1815-52), 『프랑스 내전』(1871), 『독일 농민전쟁』(1850) 등에서 실제의 역사 서술에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맑스는 역사의 단계들이 어느 민족 · 지역에서도 똑같이 경과하거나 역사가 개인들의 개입 없이 자연적으로 전개한다는 등으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상부와 하부의 상호작용도 충분히 의식하고 있다. 또한 역사의유물론적=물질적인 파악이라고 말하는 경우에 물질적이란 인간들의 물질적 생활을 의미하고 파악이란 역사 분석의 실마리를 의미할 뿐으로, 노년의 엥겔스가 암시한 자연법칙 따위가 아니다.

【Ⅳ】 부르크하르트에 의한 문화사의 체계화

세 번째 경향을 대표하는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바젤에서 태어나 바젤 대학을 마치고 베를린에서 랑케 등의 영향을 받는다. 1857년 이래로 바젤 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하고, 특히 문화사 연구에서 업적을 쌓았다. 저작으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시대』(1853),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1860) 등이 있다. 덧붙여 사후 간행된 것으로 『그리스 문화사』(1902), 『세계사적 고찰』(1905)이 있다. 부르크하르트는 정치사나 경제사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미적 관조(관찰력)로써 문화현상을 파악하고 묘사하는 방법으로 역사를 파악했다.

-이시즈카 마사히데()

[네이버 지식백과] 19세기의 역사 연구 [一九世紀-歷史硏究] (맑스사전, 2011. 10. 28., 마토바 아키히로, 우치다 히로시, 이시즈카 마사히데, 시바타 다카유키, 오석철, 이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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