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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혁명 후의 독일] ()

【Ⅰ】 정치적 반동 하의 경제발전

3월 혁명 패배로부터 1871년 제국 창설까지의 독일의 20년간은 정치적인 반동과 경제적인 비약으로 특징지어진다. 급속한 공업화에 따라 50년대에는 질식 상황에 처해 있던 정치적 자유주의가 50년대 말에 재생하게 되고 그에 대항하는 형태로 비스마르크가 등장한다. 60년대 후반은 정치적 자유주의의 추동력이었던 내셔널리즘에 기초한 독일 통일의 에너지가 국가의 권력정치에 흡수되어 가는 과정이다.

1849년 7월, 3월 혁명은 패배로 막을 내렸다. 1851년 5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독일 연방회의가 다시 개최되고 48년 말에 국민의회가 가결한 '독일 국민의 기본권'을 폐지했다. 연방 내 각국에서도 집회 · 결사 · 출판의 자유, 배심재판제 등의 이른바 '3월의 성과'가 잇달아 폐지되었다. 프로이센에서는 1849년 5월에는 전년도 말의 흠정헌법에 '3계급 선거권'(납세액에 따라 제1계급의 4%와, 제3계급의 80%가 같은 수의 선거인과 대의원을 내세운다)이 덧붙여지고, 더 나아가 50년에 헌법이 개악되었다.

정치적 반동화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는 3월 혁명 후에 본격적인 '산업혁명'이 시작된다. 철도망은 1850년의 약 5,900㎞에서 60년 11,000㎞, 70년에는 19,000㎞로 비약적으로 연장되었다. 철 생산도 40년대 후반에 패들법이, 또한 50년대 전반에는 연료를 목탄에서 코크스로 교체한 고로 생산이 급속히 보급되었다. 기계생산도 63년 수출이 수입을 상회하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50년대 이후에는 주식회사의 설립과 자본수요의 증대에 대응한 주식은행이 설립되었다. 농업에서도 기계의 도입, 광물비료 혹은 기술 보급을 위한 농업협회 등에 의해 생산력을 상승시켰다. 광공업의 발전은 공업도시나 루르(Ruhr) 지방의 공업지대를 향해 동쪽에서 서쪽으로의 국내적인 인구이동 현상을 낳았다.

또한 3월 혁명 직후부터 해외이민도 급증했다. 행선지는 90%가 북미대륙이다. 이미 30년대부터 서남독일에서 증가하고 있던 해외이민은 45-49년의 약 31만 명에서 50-54년에는 주로 독일 동부 출신자를 중심으로 약 73만 명으로 늘어나, 80-84년의 86만 명을 제외하고 하나의 절정을 이룬다. 50년대 전반기의 이민 급증에는 3월 혁명 후의 정치적 망명자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주로 생활의 궁핍이 원인이다. 3월 혁명을 싸운 뒤 조국을 버린 사람들 중에는 미국 남북전쟁에서 적극적으로 북군에 가담해 싸운 이도 많이 있다.

【Ⅱ】 '새로운 시대'의 자유주의화

산업자본가의 성장 앞에서 1850년대 후반에는 3월 혁명 후의 반동정치를 그대로의 형식으로 속행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프로이센에서는 1858년 황태자 빌헬름이 섭정이 된 것을 계기로 그에 의한 개혁의 약속이 이른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감케 했다. 사실 같은 해의 의회선거에서는 자유주의자가 약진하여 보수파에 육박하는 의원을 의회에 보냈다. 또한 바이에른이나 바덴에서도 1859년, 1850년대형 반동정치로부터의 일정한 자유주의적인 방향전환을 이룬다. 1862년 프로이센에서는 프랑스와 체결한 무역협정에 의해 보호무역주의에서 자유무역주의로의 전환을 이루었다. 하지만 융커 계급의 곡물수출에서도 이 전환은 유리한 것으로, 산업자본의 이해관계에 저촉되는 것은 아니었다.

더 나아가 1860년대에는 사회운동도 활성화된다. 3월 혁명기에 좌절한 '국민의회와 중앙권력 창설에 의한 독일 통일'을, 이번에는 프로이센 주도로 실현할 것을 요구하는 독일 내셔널협회가 59년 9월에 설립되었다. 시민층을 중심으로 한 이 내셔널협회를 기반으로 하여 프로이센에서는 61년 독일 진보당이 결성되고, 이것이 근대적 정당으로서 같은 해 말의 프로이센 의회선거에 승리하여 강력한 정부 반대파로서 의회활동을 전개한다. 62년, 독일 진보당은 프로이센의 군제 개혁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그 결과 군제 개혁을 포함한 예산은 의회에서 부결되었다. 그 밖에도 포어메르츠기에 자유로운 독일 통일의 상징이었던 프리드리히 실러의 인기가 이 시기에 재연되고, 59년에는 탄생 100주년 기념제가 각지에서 개최되었다. 체조협회도 이 시기에 잇달아 다시 설립되었다.

또한 사회적 하층계급은 1850년대 이후 중간계급의 협회운동에 흡수되는 일 없이 독자적인 조직과 정치이념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미 50년대 당초부터 헤르만 슐체‒델리취(Franz Hermann Schulze-Delitzsch)에 의한 수공업자 · 소상점주를 위한 협동조합 혹은 소비조합운동이 일어났고, 나아가 63년 페르디난트 라살레의 지도 아래 설립된 '전독일노동자협회'는 노동자계급을 조직했다. 3월 혁명에서부터 독일 통일까지의 20년간 급속한 공업화를 이룩한 프로이센을 보더라도 전체 취업자에서 차지하는 공장노동자의 비율은 분명히 상승하지만, 수공업 직인의 비율도 늘어나고 수공업 주인의 비율은 하락하지 않았다.

두드러진 것은 '일용직 · 비숙련노동자'의 비율 증가인데, 61년의 시점에서 그들은 전체 취업자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생존 최저한의 경계선상에 있었다. 라살레가 호소하는 것은 순수한 공업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이와 같은 '노동자'에 대해서였다.

【Ⅲ】 내셔널리즘의 재연()

프로이센 의회에서의 독일 진보당에 대항해서 1862년 오토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의 수상에 임명되었다. 그는 의회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서 군제개혁비를 포함한 국가예산을 집행했다. 한편으로 비스마르크는 3월 혁명 이래로 제자리에 맴돌고 있었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를 덴마크와의 전쟁의 승리로 해결하고, 더 나아가 6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잡고, 나아가 종래 반정부적 방향을 취하고 있던 민족적인 감정을 프로이센 정부로 끌어들였다. 내셔널리즘은 비스마르크의 권력정치에 대해 독일의 민족국가 실현을 기대하기에 이른다. 결국 독일 진보당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계기로 분열하고 다수파는 정부 여당화되었다. 71년에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승리하고, 프로이센의 국가권력과 독일의 영주들에 의한 독일제국이 창설된다.

-무라카미 슌스케()

[네이버 지식백과] 1848년 혁명 후의 독일 [一八四八年革命後-獨逸] (맑스사전, 2011. 10. 28., 마토바 아키히로, 우치다 히로시, 이시즈카 마사히데, 시바타 다카유키, 오석철, 이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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