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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통신交通/通信] (Verkehr )

목차

  1. 【Ⅰ】 철도-국가 형성과 세계
  2. 【Ⅱ】 선박-이민 시대와 세계의 개막
  3. 【Ⅲ】 우편과 통신-정보혁명과 세계


19세기를 그 이전의 과거 세기와 구별하고 있는 것은 세계라는 의식이다. 세계라는 의식을 사람들이 가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교통기관의 발전이며, 나아가서는 그에 따른 우편제도의 발전과 통신제도의 발전이었다. 교통의 발전은 그때까지 군인, 상인, 관리와 같은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열려 있던 여행을 일반인들에게도 열어주었다. 급격하게 증가하는 이민이나 단체여행은 특권계급을 위한 것이었던 여행을 변화시켜간다. 교통기관의 발달로 호텔 등의 시설이나 여권 등의 제도들이 변하고, 여행회사, 철도회사, 선박회사가 설립되고 저렴한 여행 가이드북이 출현했다. 사람들은 여행지에서 세계의 정보, 사건, 문화를 우편이나 통신으로 소개하고, 그것이 신문이나 잡지에 게재되며, 나아가 그것이 전 세계에 유포되어 사람들의 지식을 크게 확대함으로써 세계 속에 살고 있다고 하는 자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Ⅰ】 철도-국가 형성과 세계

철도의 혁명은 증기기관차의 발명과 철로 네트워크에서 비롯된다. 영국의 조지 스티븐슨이 발명한 증기기관차에 의한 철도는 스톡턴‒더블린 간의 철도로서 실용화되며, 그 후 1830년에 맨체스터‒리버풀 간을 시작으로 해서 세계적으로 확장되어 간다. 벨기에에서는 35년 브뤼셀‒메헬렌 간에서, 독일에서는 푸르트‒뉘른베르크 간에서 시작되었다.

독일의 경우 불과 7킬로미터의 철도였지만, 속도와 대량수송이라는 점에서 우편마차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비싼 운임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우편마차 시장을 잠식했다. 1840년까지는 548킬로미터, 1850년까지는 6,044킬로미터로 철도망이 확장되었다.

철도가 승리를 거둔 요인은 그 속도에 있었다. 함부르크‒빈 간을 마차로 갈 경우에는 1주일에서 2주일이 걸렸지만, 철도는 그것을 순식간에 30시간으로 단축시켰다. 또한 운임도 식사비와 숙박비를 고려하면 오히려 더 저렴했다. 철도의 평균시속은 처음부터 24킬로미터로서 마차의 평균속도를 크게 넘어서고 있었지만, 그 속도는 점차 40킬로미터, 50킬로미터로 빨라지고 있었다.

유럽 전체를 보더라도 철도망의 발전은 매우 빨랐다. 1830년에 33킬로미터였던 것이 50년에는 3만 8,022킬로미터로까지 확장되어간다. 적어도 50년 전후를 경계로 하여 유럽 내에서 주요 도시 간의 교통수단은 철도로 대체되었다. 그 점은 여행 가이드북을 보더라도 분명히 드러난다. 1840년대 중반까지는 철도의 해설 페이지는 마차 뒤쪽이었지만, 50년에 이르면 철도가 앞부분을 차지하면서 마차에 대한 설명은 보충으로 다루어진다.

승차감과 관련해서도 철도가 훨씬 좋아지게 된다. 도로망 정비나 숙박소 정비에 의존하고 있던 마차에 비해 철도는 난방, 가스등, 화장실 등의 차량 정비, 그리고 터널과 교량기술의 진보에 의한 거리 단축화 등에 의해 마차를 능가하고 있었다. 또한 철도가 관심을 끈 것은 건설에 드는 대규모 자본을 손에 넣기 위해 주식회사 방식이 채택되고, 그것이 철도 투기 붐을 일으켜 경제 호황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도가 가져온 가장 큰 성과는 사람들 의식의 변화를 산출한 점이다.

철도망은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독일과 같은 작은 국가로 분열되어 있던 지역에서 철도망의 확대는 독일 통일, 즉 소국가의 소멸로 이어지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선로는 구불구불해져 매우 불편한 상황을 만들어냈지만, 프리드리히 리스트와 같은 통일론자에게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적어도 철도로 연결되면 그에 더하여 운임과 시각표 등의 국제적 기준이 시행되어야만 함으로써 국가의 경계가 점차 소멸해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 전체를 보더라도 주요 간선에는 국제열차를 운행시키게 되었기 때문에 국제규약의 체결로 나아간다. 이리하여 외국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가 크게 변하게 된다. 대량운송에 따른 비용 인하는 일반인들의 여행을 쉽게 만들기 시작했다. 토마스 쿡 같은 단체여행회사에 의한 투어 시작, 나아가서는 미국 이민을 위한 단체여행회사의 등장은 이러한 의식의 변화를 의미하고 있었다. 19세기 초기까지 여행 가이드북에 있었던 문학적인 설명이나 명소와 유적에 대한 긴 해설이 점차 숙박시설이나 어디를 보아야 하는지와 같은 요점 설명 등의 실용적인 기사로 대체되어 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철도의 발달은 반드시 평화적인 이용이라는 점에 그 중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 군주가 관심을 가진 것은 철도와 군의 관계였다. 철도를 이용한 대량수송은 군의 작전행동을 크게 바꾸었다. 하루에 대규모의 군대를 이동 가능케 하는 철도망의 완성은 한 나라의 방위에 있어 함정이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것이 최초로 드러난 것이 1848년 혁명 때의 덴마크 침공이며, 바덴 봉기 때의 프로이센 연합군의 침공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의 프로이센 군의 전격작전이었다. 이리하여 철도는 한편으로는 이웃나라와의 거리를 단축시켰지만, 다른 한편으로 경계를 강화해 주요 간선 이외에서의 교통을 저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철도의 발전은 도시 간 교통수단으로서의 마차를 몰아냈지만, 한편으로 도시교통 체계에서 마차의 우위는 흔들림이 없었다. 파리에서 태어난 승합마차(옴니버스)는 런던 등의 도시에서도 보급되어 도시교통의 주역이 된다. 노면전차, 지하철, 가솔린 자동차가 출현할 때까지 도시교통의 주역은 마차였다.

참고로 맑스의 여행에 대해 살펴보면, 1840년대까지는 마차나 배를 이용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철도를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1845년에 파리에서 추방되었을 때인데, 몽스에서 브뤼셀까지였다. 그 이후에는 대부분의 경우 철도를 이용하고 있지만, 때때로 마차를 이용하기도 했다.

【Ⅱ】 선박-이민 시대와 세계의 개막

육로에서의 철도혁명과 같은 현상은 선박 세계에서도 일어났다. 그것은 증기선의 발명과 스크루의 등장이다. 미국인 풀턴에 의한 증기선 발명은 그때까지의 범선의 속도를 혁명적으로 바꾸게 되었다. 1819년, 증기선의 등장으로 미국과 유럽의 도항 일수가 26일로 감소했다. 범선을 이용하면 바람에 따라 빠르면 한 달, 늦으면 두 달 이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대혁명이었다. 그러나 증기선은 철도와 달리 그 이후 20년 동안 정체가 이어지게 된다. 증기선에 대한 선박회사의 저항이 보급을 1838년까지 늦추었기 때문이다. 1838년에 다시 등장한 증기선은 미국으로의 도항기록을 잇달아 갱신하게 된다.

다음 혁명은 스크루선의 등장이었다. 청년 엥겔스는 1840년 10월 브레머하펜에서의 스크루선의 등장에 대해 『아우크스부르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매우 흥미로운 기사를 보냈다. 그가 본 것은 막 등장한 스크루선 아르키메데스호였다. "브레멘에서 매년 1만 4,000명의 사람들이 미국으로 운송된다. 범선의 스피드는 당연히 전적으로 우연성에 의존하고 있어서 잘 될 경우라 하더라도 베자 강에서 미국으로 가는 데는 26일이 걸리고, 60일에서 75일이 필요한 경우도 종종 있다-스크루가 달린 증기선은 일정의 절반의 날씨가 나쁘더라도 3분의 1이면 족하다. 게다가 도항비용은 4분의 1 가량 비쌀 뿐이다"[MEGA I/3:197].

선박의 혁신은 이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중반부터 급격히 증가하는 이민은 선박의 혁신으로 가능케 되었던 것이다. 범선의 대부분은 여객선이 아니라 미국에서 면화를 운반하는 화물선이었다. 돌아가는 선박의 짐이 부족할 경우 이를 메우기 위해 간단하게 고친 다음 이민을 태웠던 것이다. 이민은 식당도 없는 배에 타는 셈이어서 처음부터 2개월 분량의 식량을 사서 선상에서 요리를 했다. 그로 인해 여행 일정이 늦어지면 심각한 식량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증기선의 등장은 이러한 불안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당초의 증기선은 운임이 비싸서 이민의 대부분은 범선을 선택했다(선박 총 숫자에서 증기선이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1890년대이다).

선박의 혁신은 선체 자체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증기선의 도입으로 거대해져가는 배를 위한 항만설비의 개선, 거대자본을 가진 선박회사의 설립, 운하의 굴삭, 기상학의 진보 등도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었다. 특히 함부르크, 브레머하펜, 르아브르, 사우샘프턴에서 뉴욕으로의 정기항로의 확립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유럽인의 이미지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19세기 최대의 여객선회사인 브레멘의 북독일 로이드(1857년 창립)는 뉴욕으로 주 2편의 여객선을 운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영국의 큐나드(1840년), 화이트 스타 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맑스가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매주 정기적으로 기사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정기선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기선은 대서양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항로는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에까지 닿았고, 19세기 중반에는 세계는 거의 정기선에 의해 단단히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Ⅲ】 우편과 통신-정보혁명과 세계

교통기관에 의한 혁명은 정보 분야에서의 혁명도 가져왔다. 유럽에서 우편제도가 본격화하는 것은 17세기의 탁시스에 의한 우편국 망의 설립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19세기 중반까지 우편은 각 지역의 장벽과 그에 따른 비싼 우편요금으로 인해 저해되어 왔다.

특히 소국가로 나누어져 있던 독일에서 어려움은 대단했다. 그 어려움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우표나 스탬프가 없어서 후불제였던 점이다. 더구나 그 요금은 국내, 국외를 불문하고 거리에 따라 가산되었기 때문에 원거리에서 오는 통신은 수취하는 쪽에서는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두 번째 원인은 각 지역의 우편제도가 제각각이었기 때문에, 우편마차가 그 지역을 통과하지 못하고 지연되거나 그냥 지나쳐버렸다고 해도 할증요금이 가산된다든지 하는 식이어서 사람들에게 큰 희생과 불안을 자아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1840년대까지의 신문은 우편으로 배송되었기 때문에 지방 독자는 비싼 우편요금을 지불할 수밖에 없는 불이익을 당하고 있었다. 또한 이는 신문의 전국적인 확대도 저지하고 정보의 지연도 초래하고 있었다.

이러한 우편제도 문제를 해결한 것이 철도나 선박의 혁명에 의한 스피드화와 사람들의 이동이었다. 한편 운송의 혁신은 국제협약의 필요성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혁명은 1840년대에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영국 국내 어디라도 1페니라는 편지요금의 설정이었다. 그와 동시에 1페니 스탬프와 우표가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1839년에 7,500만 통이었던 영국 편지 양은 1840년에는 1억 7,000만 통으로 일거에 2배 이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국내에서의 우편요금 격차가 소멸하여 신문 등의 정보 보급도 촉진되게 되었다. 

그러나 소국가로 나누어져 있던 독일의 경우 1850년에 독일‒오스트리아 우편제도가 확립할 때까지 영국식의 통일된 우편체계는 존재하지 않았다(러시아 1848년, 프랑스 1849년). 더군다나 통일된 것은 소국가 내에서의 우편요금뿐이고, 소국가 내에서 부과되고 있던 세금이나 통과거부가 소멸하는 것은 세계우편협회의 설립 이후이다.

독일 우편제도의 방대한 역사를 쓰고 우편제도 개선을 위해 노력을 기울인 슈테판은 1874년에 베른에서 세계우편협회를 설립했다. 그 이후 몇 년마다 개최되게 된 세계우편협회 대회에서 다양한 국제협약이 체결되어 간다. 1878년의 파리 대회에서는 전 세계의 편지요금이 20페니히, 엽서가 10페니히로 설정되었다. 이리하여 국내에서 실현된 가격 격차 시정이 국제적으로도 적용되기에 이른다. 1885년의 리스본 대회에서는 우편환제도가 확립되고, 91년의 빈 대회에서는 신문, 잡지에 관한 낮은 우편요금 설정 등이 체결되어 세계의 정보유통은 가속되어 간다.

우편제도와 더불어 19세기를 혁신한 것은 통신 시스템의 혁명이었다. 통신제도의 혁신에 공헌한 것은 미국인인 사무엘 모르스의 모르스 신호였다(1837년). 워싱턴‒볼티모어 간에서 이루어진 전신은 1840년대에 이르면 유럽으로 보급되어 간다. 새로운 통신수단은 정보혁명을 가져왔다. 『포어베르츠』1를 발행하고 있던 H. 뵈른슈타인은 음악, 연극 기사를 각 신문에 송부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독일을 위한 출판, 커미션의 중앙 뷰로'라는 통신사를 만들었다. 이 조직은 여행대리점 업무나 통신 업무를 했지만, 나중에 뢰벤펠스에게 팔린다. 카셀 출신의 독일인 로이터도 모르스 통신으로 전 세계의 뉴스를 신문에 공급하는 통신사 로이터통신을 설립하지만, 뵈른슈타인이야말로 최초의 통신사를 만든 인물일지도 모른다.

통신사의 발달과 우편제도의 국제기준 적용으로 정보는 더욱더 빠르게 세계적으로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그로 인해 신문은 속보성을 요구받게 되어 저널리즘 세계도 크게 변하게 된다. 19세기 말에는 통신 케이블이 유럽대륙, 미국대륙, 아시아대륙, 오스트레일리아대륙 간에 부설되게 되어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그날 안에 전 세계에 타전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의 이동 속도 상승과 우편 · 통신의 속도 상승은 사람들의 관심을 국내와 유럽의 문제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제로 확대하게 되었다. 맑스가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쓴 폭넓은 기사의 범위는 그러한 사람들의 관심의 변화와 교통 · 통신혁명의 결과로 가능해진 것이었다.

-마토바 아키히로()

[네이버 지식백과] 교통/통신 [交通/通信, Verkehr] (맑스사전, 2011. 10. 28., 마토바 아키히로, 우치다 히로시, 이시즈카 마사히데, 시바타 다카유키, 오석철, 이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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