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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공산당 獨逸共産黨] (독, 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 KPD)

I. 독일공산당의 성립.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사회민주당 SPD은 전쟁에 협력하는 방침을 세웠고, 191484일 득일 사회민주당 국회위원단은 전시 공채발행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 날 로자룩셈부르크와 프란츠메링, 유리안 카로스키 등은 당의 전쟁협력 방침과 싸울 것을 결의했다. 클라라 제트킨, 칼 립크네히트도 이에 가세했다. 이 그룹은 룩셈부르크와 메링이 편집한 잡지 디 인터내셔널내을 발행했다고 해서 인터내셔널 파 Gruppe Internationale'로 그리고 스파르타쿠스 통신을 출판했다고 해서 스파르타쿠스 파 Gruppe Spartakus'로 불리게 되었다. 19174월 스파르타쿠스 파는 사회 민주주의 노동공동체 Sozialdemo- kratische Arbeitsgemeinschaft SAG(독일 사회민주 당내 반전파 국회의원의 원내단체) 멤버와 함께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을 결성했다. 전쟁 말기, 1918 107일 스파르타쿠스 파와 프레멘 좌파는 공동으로 전국회의를 개최하여 공동행동 강령을 채택했다. 11월혁명에 즈음해서 스파르타쿠스 파는 1111일 독자적인 중앙지도부를 결성하고, 스파르타쿠스 단 Spartakusbund으로서의 활동을 개시했다. 1118일 룩셈부르크와 립크네히트가 편집하는 신문 로테파네는 제1호에서 스파르타쿠스단의 혁명노선을 제시하는 논설을 게재하고, 1214일 호에서 스파르타쿠스단의 강령적 문서인 스파르타쿠스단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Was will der Spartakus- bund?를 발표했다. 이 문서는 국민회의 참가 문제와 평의회제(評議會制) 문제에 대한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모호한 태도를 공격하였다. 스파르타쿠스 단온 12월 말경에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당대회를 개최 할 것을 요구하였다.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이 이 요구를 거부하자 1229일 스파르타쿠스단은 전국대회를 열고 이 대회에서 신당 창립을 결의했다.

. 독일공산당(KPD(S)스파르타쿠스 단, 19191~ 192012). 19181230일부터 191911일에 걸쳐 독일공산당(스파르타쿠스 단) 창립대회가 열렸다. 191811독일 국제공산주의자Internationale Kommunisterr DeutschlandsIKD'로 이름을 바꾼 프레멘 좌파도 대회에 참가했다. ’혁명적 활동가집단'도 당 창립에 호의적이건 했으나 동등한 강령위원회의 구성 선거보이콧 결의의 철회 스파르타쿠스단 명칭 해소 등의 합동조건에 대해서 스파르타쿠스 단과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해서, 신당 결성에 참여하지 않았다. 스파르타쿠스 단 기관지 로테 파네가 독일공산당 중앙기관지로 되었다. 독일공산당 창립대회에서 룩셈부르크양 럽크네히트 등은 "현재 노동자평의회의 실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 ·자 간의 역관계로 보아서는 즉각적 무장봉기, 국민의회 보이콧으로 나아갈 것이 아니라 노동자대중을 독일공산당 이 획득하여 정치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이를 위해 국민의회선거에 참여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회에서는 노동자평의회를 강화하고, 국민의회선거를 보이콧하자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어 62표 대 32표로 국민의회선거 보이콧이 결정 되었다. 프레멘 좌파 출신의 P. 프레이리히는 노동자 평의회 체제로의 이행을 강조하여 노동조합에서 탈퇴하라!'는 슬로건을 제창했다. 1월 투쟁에서 룩셈부르크, 립크네히트 등이 반혁명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들의 뒤를 이어 독일공산당을 지도한 사람은 P. 레버였다. 3월에는 코민테른이 창립되었고 독일공산당은 러시아공산당 이외의 외국당으로는 처음으로 코민테른에 가입하여 그 유력한 지부가 되었다. 19198월에 프랑크푸르토에서 열린 독일공산당 전국회의와 1020~23일의 독일공산당 제2차대회에서, 또다시 국민의회·노동조합 보이콧 파와 국민의회·노동조합 내에서 혁명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파가 대립하여, 이번에는 국민의회·노동조합 참가파가 다수파로 되었다. 다수파는 국민의회·노동조합 보이콧 파룰 제명했고, 제명된 보이콧 파는 192043~4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 Kommunistische Arbeiter Partei De- utschlandsKAPD을 결성했다. 코민테른은 제 2차 세계대희에서 한편으로는 독일 공산주의노동자당을 비판하면서도, 형제 당으로서 독일공산당과 함께 가입시켰다.

. 독일 통일공산당 Vereinigte 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VKPD3월행동. 19203월의 카프 봉기와 소련에 대한 군사개입을 반대하는 투쟁에서, 독일공산당과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의 많은 당원이 공동투쟁을 벌였다. 이들 공동투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1920124~7일의 독일공산당 제 6차대회(베를린)에서 독일공산당과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다수파(좌파)가 합동하여 독일 통일공산당 VKPD을 결성했다. 독일 통일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통일전선 결성방침을 세웠다. 192117일 독일 통일공산당은 독일 사회민주당,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독일 공산주의노동자당, 노동조합 등 모든 노동자조직에 대해 임금·연금을 인상하고 물가인상에 반대하고 주택조건을 개선하고 식료·원료 배급의 노동자관리를 요구하는 공동투쟁을 제안했다. 코민테른에서는 부하린과 지노비에프가 이 전술에 반대했으나 레닌은 이 전술을 프롤레타리아 통일전선 수립의 올바른 시도로서 평가했다. 그러나 독일 사회민주당은 공동투쟁의 전개를 거부했다. 독일 통일공산당내의 통일전선 전술파는 당내에서 지도권을 장악하였으며 P.레버, C.제트킨, E.로이미히, K.호프만 등은 집행부로부터 제거되었다. 독일 통일공산당 브란트라·타르하임 지도부는 공세전술'을 당의 기본방침으로 삼았다. 중부 독일의 광산지대 만스페로트, 드레스덴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자연발생적인 봉기에 대해서 독일 통일공산당 브란트라·타르하임 지도부는 318일 무장봉기를 호소하고 24일에 독일 전국에서 제네스트에 돌입할 것을 지시하였다. 독일 통일공산당은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과 공동투쟁 본부를 만들어 독일 사회민주당,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지도하의 노동자들을 그 지도부로부터 떼어내어 투쟁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경찰, 정부군의 무력에 의해 노동자는 제압되었다. 331일 독일 통일공산당 브란트라·타르하임 지도부는 지령을 철회했고 ’3월행동·MSrzaktion'은 패배로 끝났다. 3월행동과 그 지침이 되었던 공세전술'의 총괄을 둘러싸고 독일 통일공산당은 둘로 갈라졌다. 코민테론은 같은 해 6~7월의 제3차세계대회에서 공세전술'을 총괄하면서 대중 속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통일전선 전술에 의해 노동자계급의 다수파를 획득하는 방침을 제출하였다 그 후 8월에 열린 독일 통일공산당 제7차대회(예나)에서 통일전선 전술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통일전선 전술의 내용에 대해서 충분한 이해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코민테른 제4차대회 (19224)에서는 노동자정부라는 슬로건이 제시되었다. 1922년 독일 통일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이 슬로건을 찬성한다는 업장을 표명했다.

. 독일공산당(19231~19257). 19231월 제8차 라이프치히 당대회에서 브란트라·타르하임 지도부를 대신해서 피셔·마슬로프 지도부가 등장하여 "노동자정부는 프롤레타리아트독재도 아니며 평화적, 의회주의적으로 달성될 수 있는 정부도 아니다. 그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틀 내에서, 무엇보다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수단으로 하여 프롤레타리아적 기관과 프롤레타리아적 대중운동에 기반을 두고 노동자정책을 실시하려고 하는 시도이다"라고 결의하였다. 또한 1919~1922년에 걸쳐서는 패전에도 불구하고 독일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성격은 변화되지 않았으며 언제라도 다시 공격적인 제국주의가 될 수 있음을 강조 하였던 반면, 루르 점령이 실시되었던 1923년에는 독일은 식민지화된 나라로서, 공산당원은 독일 점령 부르주아지와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한 독일 민족의 사회적, 민족적 해방투쟁'의 선두에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견해가 강력하게 제출되었다. 10월 인플레하에서 작센주와 튀링겐주에서 사·(·) 연립정부가 형성되었다. 10월 독일공산당 함부르크 지부는 무장봉기에 나섰지만 자신이 고립된 것을 깨닫고 질서정연하게 퇴각했다. 이 날로 독일공산당은 비합법화 되었다. 인플레가 더욱 심화되었던 19239월부터 19244월까지의 제9차당대회(오펜바하, 프랑크푸르트에서 비합법으로 열림)에서는 통일전선 전술을 부정하고 평의회혁명, 노동조합 보이콧을 주장하는 경향이 다시 대두했다. 코민테른은 19253월과 4월에 열린 확대 집행위원회에서 브랑란트라, 타르하임을 제명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또한 피셔·마슬로프 그룹을 비판했다. 7월 독일공산당 제10차당대회(베를린)에서는 E 테르만이 개회사 및 노동조합 문제에 관한 보고를 하였다. 코민테른 대표는 통일전선 결성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테르만은 당 정치활동의 중심을 노동조합 활동에 둘 것, 노동조합운동의 좌익적 전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당대회에서 테르만이 당 위원장에 선출되었는데 레닌주의적 중앙위원회의 성립은 독일 공산당 내에서 레닌주의의 결정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V. 테르만 지도하의 반파시즘 투쟁. 1926년 독일 공산당은 귀족재산의 무상접수를 요구하는 강력한 국민운동을 지도했다. 이 기간에 독일공산당의 제국의회 선거 득표수도 증가하여 192412월의 270만 표에서 1928년에는 330만 표로 늘어났다. 독일공산당으로 결집된 대중조직도 확대되어 적색전위투사단 Der Rote FrontkSmpferbund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가장 혁명적인 자위조직이 되었다. 19273월 제 11차 당대회(에센)는 제국주의전쟁 준비에 반대하는 투쟁이 당의 주요과제의 하나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1928년 가을 독일공산당은 헤르만 뒤라 내각에 의해 비밀리에 또는 공공연히 행해졌던 재군비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면서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사회 파시즘론' ’·(·) 주요타격론'이 강화되었다. 독 일공산당은 "파시스트는 독점자본에 의해 조직된 자금을 공급받고 있는 정치적 돌격대로서 부르주아 의회주의를 부정하고 공공연한 부르주아독재 수립을 목표로 하는 집단"이라고 인식하고, 나치당의 선동에 대항했다. 그러나 독일공산당은 파시즘의 위험이 벌써 코앞에 닥쳐오고 있고 나치당의 지원에 의한 전쟁 준비가 일사불란하게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당과 사회민주당을 똑같은 비중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19318월 나치가 프로이센 주 정부수상 오토 브라운의 소환을 제안했을 때, 독일공산당은 이 불신임투표에 참가했는데 독일 사회민주당은 이것을 이유로 사·공 통일전선 형성을 거부했다. 193211월에 실시된 제국의회 선거에서는 나치당, 중앙당, 사회민주당의 의석수가 감소한 반면 당원 30만 명의 독일공산당이 약 600만 표를 얻어 100명의 의원을 국회로 보내서 나치당(196), 독일 사회민주당(121)에 이어 제3당이 되었다.

VI. 나치독재하의 독일공산당. ‘독일국가인민연립내각(수상 히틀러)' 성립후 로테 파네는 발행 금지되고 독일공산당은 사실상 비합법화되었다. 27일의 비합법 중앙위원회(치겐하르스의 스포츠하우스)는 아직 확고하게 되지 않은 파시스토 독재에 대항해 싸울 것을 전노동자에게 호소했다. 227일의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계기로 독일공산당, 독일 사회민주당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어, 36일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독일공산당의 모든 지도자가 체포되고 조직이 파괴되었다. 1933~1935년에 걸친 중앙위원회 논쟁을 거쳐 반파쇼 인민전선의 결성'아라는 새로운 전략·전술이 구상되어, 193510월 독일공산당 브튀셀 회의(사실상 제 13차당대회로 모스크바에서 개최)에서 확인되었다. 1933년에 체포된 테르만을 대신해 W. 비 크가 독일공산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36년에는 파리에서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 주도하에 독일인민 전선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하인리히 만을 의장으로 하는 이 위원회는 12월에 독일인민전선결성을 호소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1939년 초에는 독일공산당 베론 회의(사실상 제 14차당대희)전쟁 반대, 히틀러독재 반대'를 호소하면서 내전을 저지할 수 없을 때 독일의 반파시스트 세력은 파쇼적 독일 제국주의에 의해 침략 받고 있는 나라들의 입장에 서서 운동해야만 한다고 결정하였다. 또한 베론 회의는 히틀러 정권을 타도한 뒤에 수립될 새로운 정권의 성격을 명확하게 했는데 그것은 "전국민에 의해서 자유롭게 선출된 새로운 민주공화국외 인민정부"라고 했다. 전쟁 중에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모스크바 방송, 독일 인민방송을 통해 또 독일 국내의 임시지도부를 통해 반파쇼 저항조직을 지도했다. 19437월 파시즘에 대항하는 노동자, 농민,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던 국방 군 장교가 모스크바에 있는 독일공산당 국회의원, 노동조합 간부, 진보적 독일인 작가들과 함께 자유독일 국민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위원회는 국방군과 독일국민에게 보내는 선언을 발표하여 저항운동의 지침을 제시했으며, 동시에 평화를 보장하는 정부수립, 그 정부가 수행해야 할 민주적 변혁의 과제를 규정했다. 194410월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은 전쟁종결, 평화, 새로운 자유독일 창조를 목적으로 투쟁 강령과 전투적 민주주의 블록의 행동강령'을 작 성했다. 19451월에 강령작업위원회가 재개되어 2월 이래로 작업위원회는 해방 후에 실시되어야 할 제반 조치를 정치국에 제안하였다. 해방 후 1945611일에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반파시스트·민주주의 독일 건설을 위해 득일 국민에게 드리는 호소를 발표했다. 이 강령적 성명에 기초해서 사·(·) 양당 사이에 통일 행동협정이 맺어지고 그 위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당을 포함한 반파시스트 민주주의 정당 블록이 형성되었다. 강령적 성명은 사실상 인민 전선의 공동강령이라고 할 만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제국주의적 반동과 기회주의에 대한 투쟁 과정에서 노동자운동의 재통일, ·공 연합의 전제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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