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탕트] (프, Dëtente)
데탕트는 프랑스어로 ‘긴장완화'를 의미하는데, 국제정치적 측면에서 제2차세계대전 후의 동서 대립이 완화되고 그것이 국제정치의 기축(基軸)이 되어온 과정, 결국 대항관계로부터 협조관계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쿠바 미사일위기(1962)는 전면 전쟁의 도화선이 되어 결국 세계가 자멸 직전까지 갔던 세계적 사건이었다. 이 위기는 케네디와 흐루시초 프의 이성적인 판단에 의하여 모면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소는 데탕트로 한 걸음 나아갔던 것이다. 1963년의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약』과 핫라인 hot line의 설치는 데탕트로의 출발점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 후 데탕트가 순조롭게 진전된 것만은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미·소 간의 군비경쟁이었다. 케네디 정권은 핵전략병기만이 아닌 통상전락의 강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한편 소련도 ICBM 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과 원자력잠수함의 개발·건조에 힘을 기울였다. 나아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양국의 개입이 데탕트를 공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68년 존슨 정권이 북폭(北爆)을 축소하고 휴전교섭을 제창하여 『핵확산 금지조약』이 조인됨으로써, 체코사건에 의해 일시적으로 중단되기는 했지만 미·소 데탕트의 기운은 성숙되어갔다. 이것을 가능케 했던 요인을 몇 가지 지적해본다면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 개입으로 인한 재정난에 봉착했으며 소련 역시 만성적 경제 침체로 인한 내부적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 요인이 데탕트의 접근에서 촉매제가 되었던 첫째 이유였다. 그 외에 미·소 간 전략적 균형(핵균형)의 달성, 소련 고립화를 목적으로 했던 미·중 접근 및 중·소 이데올로기 대립의 격화 등이 간접적 배경을 이룬다. 이러한 배경 하에 1972년 닉슨이 소련을 방문하여 모스크바 미·소 정상회담을 개최한 결과 『ABM Antilaunched Ballistic Missile 제한조약』과 『SALT 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의 조인 등 역사적 성과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1년 후에는 브레즈네프 가 미국을 방문하여 미·소 『핵전쟁 방지협정』이 체결 되었다. 미·소 정상회담에서는 단순히 군사적 측면만을 다루지 않고 경제적 측면에서도 몇 가지 의제가 상정되어 통상사무국의 설치, 최혜국대우(最惠國待遇) 등의 합의를 낳았다. 이리하여 미·소 간 데탕트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 데탕트의 조성, 추진에서 키신저의 조언은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나아가 1975년에는 전(全) 유럽 안전보장회의가 열리고 동서 관계의 융화와 확대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이 .데탕트 기류에 다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앙골라 문제, 소련의 군비강화, 미·중 국교수립, 아프가니스탄 문제 등이 그것이다. 이 결과 신냉전의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외교전략, 즉 새로운 사고에 입각한 소련의 평화공존 정책의 출현은 신냉전의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데탕트의 새로운 단계로 돌입한 것이다. 고르바초프 정권은 평화외교 전락의 구체적 실천의 실례로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소련군 완전철수, 1988년 12월에 공식 발표된 소련군 50만의 일방적 감축선언, 앙골라 내전의 종식과 협정 체결 등을 추진하였다. 나아가 소련은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주둔군의 철군일정을 단계적으로 밝힐 것을 약속함으로써 유럽에서의 평화유지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군비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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