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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東學農民戰爭)] ()

I. 동학농민전쟁은 1894~1895년에 걸쳐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대규모의 반봉건·반침락 농민운동으로 갑오농민전쟁, 동학혁명이라고도 한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 봉건사회는 내부에서 붕괴되기 시작하였는데 왕권의 약화와 세도정치의 등장, 매관매직의 성행과 삼정(三政)의 문란, 신분제의 동요, 지주전호제의 성장과 농촌 내 계층분화의 진전 등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는 봉건체제의 구조적 모순이 심화되고 있던 사정을 보 여준다. 이와 같은 모순의 격화 속에서 19세기 중엽 이후 농민항쟁이 만성화되는데, 1862년 삼남(三南)70여 고을에서 발발한 민란(民亂)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더욱이 부패·무능한 봉건정부가 외세에 굴복하여 체결한 강화도조약 이후 불평등 무역구조가 형성됨에 따라 농촌사회의 파탄은 더욱 심화되어갔다. 소수의 지주·부농층은 대일(對日) 쌀 수출을 통하여 많은 이익을 얻음으로써 토지를 집적하여 지주제를 강화해간 반면, 대다수 농민들은 자본주의적 유통경제에 편입되어 궁박판매를 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이용한 상인·지주들의 고리대적 수탈도 가중되어 궁핍과 몰락의 길을 걸어야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들은 지배층과 무역의 주상대국인 일본에 대해 저항의식을 높여나갔던 것이며. 이것이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배경을 이룬다.

. 동학농민전쟁의 직접적 게기가 된 것은, 호남의 곡창이며 대일무역의 확대로 인해 계층분해가 활발하게 진전되고 있던 고부에서 발생한 농민항쟁이었다. 당시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온 각종 명목으로 잡세를 징수하고 불필요한 보()를 신설하여 농민들의 고혈을 짜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에 고부 농민들은 1894111일 만석보 개수(改修)와 수세(水稅) 징수 문제를 직접적인 게기로 하여 전봉준(全琫準|)의 지도 아래 봉기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고부 농민들의 항쟁은 이전의 산발적인 민란들과 마찬가지로 지역적 제한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봉건체제의 모순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려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봉건정부의 회유와 탄압에 의해 일단 끝을 맺었다. 국지적 민란에 그쳤던 고부 농민항쟁이 전면적인 반봉건 농민전쟁으로 발전한 데에는 전봉준 등 농촌지식인들의 반봉건의식과 동학교문의 조직이 기여 한 바 컸다. 본래 동학사상은 천주교의 국내 침투와 제국주의 세력의 동방 진출에 대한 민족적 위기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던 반침략사상이며, 봉건적 신분질서를 부정하고 만민평등을 주장하는 반봉건사상이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무위이화(無爲而化)에 의한 후천개벽(後天開闢)을 바라는 종교사상이었을 뿐. 혁명을 지도할 사회사상은 아니었다. 이 사상을 민중 의 반봉건의식과 결부시키고 그 조직을 농민항쟁에 이용한 이들은 주로 몰락양반으로 구성된 동학교문외 지도자들이었다. 고부 민란이 실패한 후 전봉준은 손화중(孫化中), 김개남(金開南)과 함께 무장봉기를 계획하고, 54일 고부와 태인에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 아래 봉기하였다. 이후 농민군은 관군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하여 531일에는 전주를 점령하였다. 민씨 정권은 전주 함락 직후인 61일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청에 원병을 청하였으며, 일본도 천진조약을 구실로 출병을 결정하였다. 이에 이르자 농민군은 서울에 쳐들어가 권귀(權貴)를 멸한다'던 목표틀 유보하고 외국군의 철수를 당면과제로 설정하였다. 이를 위해 농민군은 탐관오리와 횡포한 부호·양반의 징벌, 노비문서의 소각, 천인에 대한 처우개선, 과부의 재혼 허가, 무명잡세의 폐지, 문벌·지벌을 타파한 인재 등용, 일본인과 밀통하는 자의 처벌, ·사채의 면제, 토지의 평균분작 등을 내용으로 하는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의 실시를 조건으로 화의를 맺고 전주에서 철수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은 전라도 53개 읍 전체를 장악하여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런데 농민군의 생각과는 달리 조선에 출병한 일본은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승리한 후 조선에 대한 침략책동을 강화하였다. 이에 농민군은 다시 척양척왜(斥洋斥倭)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재봉기하였다. 이번에는 반침략의 과제가 전면에 떠오르게 된 것이다. 1010, 11일에 걸쳐 삼례에서 재봉기를 결정한 농민군은 서울을 향해 진격을 개시했지만, 1022일부터 20여 일간에 걸쳐 전개된 우금치싸움에서 근대적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농민군은 각지로 분산되어 일본군과 관군의 잔인한 살륙에 맞서 저항을 계속하다가 18952월경에 완전히 소멸하였다.

. 농민전쟁이 실패한 원인은, 첫째 자주적인 근대화를 실현시킬 수 있는 여러 계층이 아직 충분히 성숙해 있지 못했던 점, 둘째 농민군의 의식이 봉건체제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확대되지 못했던 점, 셋째 농민군 내부에 계층적 차이로 인한 균열의 소지가 자리하고 있었던 점 등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이 실패하였다고는 해도. 이를 통해 봉건체제는 소생 불능의 타격을 입었으며 갑오개혁으로 농민들의 요구를 부분적으로나마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이 전쟁에 참여한 주체들은 이후 영학당(英學堂), 활빈당(活貧黨) 운동 및 반일 의병전쟁에 합류하여 반제투쟁의 주류로 성장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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