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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 (Comintern; Communist International)


I 창립. 1차 세계대전으로 제2차 인터내셔널의 주요한 당이 자국 정부를 옹호하는 사회배외주의의 입장으로 옮겨간 가운데, 제국주의 전쟁을 내란으로 전화할 방침을 내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세비키)과 각국 사회민주당의 좌파들은 침머발트(1915)와 키엔탈(1916)에서의 두 번의 회의를 거쳐서 1919년 모스크바에서 새로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조직으로서 제2차 인터내셔널을 대신한 제3차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렇게 하여 제3차 인터내셔널이라고도 부른다)을 창립하였다. 출석자는 30개국의 대표 51명 이었고, 유럽뿐만이 아니라 중국, 조선, 터어키, 페르시아 등도 참가했다. 당시는 세계혁명이 일정에 오른 때였으므로 토의는 레닌이 보고한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프롤레타리아독재를 둘러싸고 진행되었고 기회주의, 중간주의와 같은 사회민주주의적 경향의 극복이 소리높여 주장되었다. 창립대회의 의의는 공산주의 세력의 결집, 혁명운동 목표의 천명, 국제 중앙부의 설정 등, 한마디로 말하면 공산주의운동의 원칙이 선언된 데에 있다. 즉 코민테른 제1차 대회는 개시된 세계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최초의 진보를 이론적으로 일반화하여, 레닌주의의 기치 아래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사상적조직적으로 결집할 초석을 다졌다. 이 대회에서 세계사상 처음으로 유럽과 아메리카의 프롤레타리아가 식민지종속국의 근로자와 손을 잡았다. 레닌은 코민테른 창립에 대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창립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대중뿐만 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핀란드, 스위스의 프롤레타리아 대중 -- 한 마디로 말해 국제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획득한 것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창립은 확고한 사실인 것이다’’라고 그 세계사적 의의를 평가하였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특징은, 그것이 국제적인 규모에서 프롤레타리아독재로 자본주의에 대한 그들의 승리를 실현한 소비에트 러시아라는 견고한 기반 위에 서 있다는 점에 있었다. 1, 2차 인터내셔널과 비교하여 제3차 인터내셔널의 역사적 위치를 레닌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1차 인터내셔널은 사회주의를 위한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토대를 마련했다. 2차 인터내셔널은 많은 나라에서 운동이 광범하게 대중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기반을 준비하였다. 3차 인터내셔널은 제2차 인터내셔널 활동의 성과를 이어받아 그들의 기회주의적, 사회배외주의적, 부르주아적 및 쁘띠부르주아적인 오류를 제거하고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실현하기 시작했다.’’ 창립대회 후 헝가리(1919) 코민테른 바이에른(1919)의 소비에트, 일시적이지만 슬로바키아에서의 소비에트 공화국의 출현과 함께 조선, 중국, 인도, 터어키,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민족해방운동이 가열차게 일어났다. 창립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던 나라에서도 새로운 공산당이 생기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사회당, 독일의 독일사회민주당 등이 코민테른 가맹의 의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때에 다른 한편으로 좌익 급진주의가 대세를 지배하여 대중운동을 경시하는 풍조가 생겼고 이것을 시정하기 위해 레닌은 공산주의내의 좌익소아병을 집필하고 대중으로부터 이탈된 분파주의를 비판하였다.

 

 

II. 2차 대회 (1920723~87).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차 대회의 참가자는 218명이었다. 이 대회는 각 지부의 조직 설립과 가입 조건을 확정하는 것이 주안이었다. 주요문제는 코민테른의 기본문제, 프롤레타리아혁명에 있어서 공산당의 역할, 노동조합운동, 공장위원회 및 인터내셔널, 농업문제, 공산당과 의회, 민족 및 식민지문제에 관한 테제의 심의 등이었다. 공산당이 대중으로부터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다수를 획득하는 것, 노동자계급과 근로농민과의 동맹을 강고히 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 노동조합 및 대중단체에서의 활동, 의회내의 혁명적 활동, 노동자와 근로자의 일상적 이익을 옹호해야 한다는 것이 논의되었다. 레닌이 기초한 코민테른 가입요건 21개 조는 기존의 의회주의적인 사회민주당의 조직방침을 버리고, 새로운 형의 당으로 되기 위한 근본 특징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과 더불어 이러한 조건은 계급투쟁이 격렬한 내전 형태를 취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이것에 적합한 철저한 중앙집권을 주요조건으로 부가했다. 그것 때문에 코민테른 가입을 지향하여 모였던 독일, 이탈리아 등 기타 사회당의 일부는 가입을 단념하고 2 ()인터내셔널을 조직하였다. 1920년말에서 1921년초에 발발한 전후공황은 역으로 그때까지 수세적 입장에 있었던 부르주아지를 반격으로 전환시켰고, 이에 노동자계급은 공세전술을 방어전술로 바꾸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이것은 소련에 있어서는 전시 공산주의로부터 신경제정책으로의 전환(1921 3)과 병행되어 나타났으며, 국제적인 객관정세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III. 3차 대회 (19216~7)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고, 57개국의 대표 603명이 참가했다. 대회의 주요 문제는경제공황과 코민테른의 새로운 임무(트로츠키) 코민테른의 전술(라데크) 노동조합 문제(지노비에프 기타) 러시아 공산당의 전술」 「공산당의 조직건설과 그 활동의 방법과 내용(케넨) 등이었다. 1919년 이래의 자본주의국가의 노동운동은 일거에 프롤레타리아독재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힘을 축적하는 전략구상으로서 통일전선 정책이 제출되었고 노동운동의 분열을 극복할 필요가 있었다. 그 슬로건은 대중 속으로!’였다. 이것에 대해 전자의 전술, 바꿔 말하면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강습의 속행을 주장하는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자가 레닌의 통일전선 전술에 반대했다. 레닌은 그들의 공세론좌익적인 어리석음이라고 비난하고, 각국의 혁명운동은 각국의 특수성에 적응하는 방법으로 추진되어야 하며, 그러므로 러시아인을 무조건적으로 모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닌의 발의에 의해 작성된 공산당의 조직적 구성의 테제는 볼셰비키의 조직 원칙에 기초한 것으로서, 특히 공장세포의 건설을 결정한 것은 지나치게 획일적이었고, 러시아적이었다. (이 결함에 대해 제4차 대회에서 레닌은 스스로 통렬한 자기비판을 하였다). 대회 결정에 기초하여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12월에 노동자의 통일전선과 제2, 2반 및 암스테르담의 각 인터내셔널 소속의 노동자와 더불어 아나코생디칼리스트 조직을 지지하려는 노동자에 대한 태도에 관한 지령을 작성했다. 2반 인터내셔널이 모든 노동자단체의 세계회의를 제창한 것에 답하여, 1922년 초에 코민테른은 제2차 인터내셔널을 포함한 세 인터내셔널의 대표자회의를 제안했다. 4월에 그들의 대표자회의가 베를린에서 개최되었지만 코민테른이 주장한 통일행동은 실현되지 못했다 (2차 인터내셔널은 523일에 세계대회를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IV 4차 대회 (192211~12)는 레닌 생존중의 최후의 대회로, 57개국 대표 388명이 참석하였다. 레닌은 러시아혁명의 5개년과 세계혁명의 전망에 관해 연설하고, 그 가운데서 러시아의 실례에 기반하여, “혁명가는 공격하는 것만이 아니라 혁명의 퇴조기에는 후퇴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3차 대회의 공산당의 조직적 구성의 테제가 외국의 동지에게는 이해될 수 없다는 점에서 큰 잘못이 있지만, 외국의 공산주의자가 혁명적 활동을 새롭게 조직하고, 새로운 조건하에서 전술을 만드는 것을 배우면 세계혁명의 전도는 아주 밝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회는 국제 파시즘의 위험을 지적하고, 모든 나라에서 의 통일전선운동의 일반적 선전 슬로건으로서 노동자정부’(또는 노동자농민의 정부’)의 수립을 제기했다. 이 노동자정부는 정세가 불안정한 나라에서는 당면의 정치 슬로건으로 되었는데, 그것이 성립한 경우에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무장하고, 생산관리를 실시하며, 부르주아지의 저항을 타파하는 등의 임무를 맡는 것이었다. 노동자정부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프롤레타리아독재로의 한 발전 단계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위치지어진다. 노동자 통일전선 전술과 코민테른 노동자정부 슬로건을 식민지 종속국의 상황에 적용시킨 것이 바로 반제 민족통일전선 전술과 국민정부 구상이었다. 식민지종속국의 반제 민족통일전선은 민족해방투쟁 과정과 국민정부 건설과정을 통해서 노동자농민 계급을 비롯한 광범한 근로대중, 인텔리겐차, 민족부르주아지를 혁명의 편으로 획득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노동자 통일전선 전술은 1922 1923년에 걸쳐 일국적 차원과 국제적 차원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결과 노동자 통일전선 전술과 노동자정부의 슬로건에 기초한 최초 혁명이 19239월 불가리아에서, 그리고 10월 독일에서 각각 일어났다. 10월에 독일의 작센과 튀링겐에서는 독일 통일공산당과 사회민주당 좌파로 구성된 지방정부, 즉 노동자정부가 탄생했지만 총파업과 봉기제의가 사회민주당 좌파의 거부로 무위로 돌아간 결과, 노동자정부는 붕괴되었다. 독일에서의 실패 이후 코민테른에서는 통일전선 전술의 좌익 분파주의적 해석이 힘을 얻었다. 코민테른을 지도한 레닌이 19241월 사망하고,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의 가능성에 부정적인 트로츠키파의 움직임이 코민테른에서도 활발해졌다

 

V. 5차대회 (19246~7)에는 49개국에서 504명의 대표가 참가했다. 바르가는 경제정세에 관해서 상세히 보고했지만, 이미 1923년부터 시작된 자본주의의 일시적부분적 안정의 문제는 더이상 제기하지 않았다(19253~4월의 제5회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승인). 이 대회에서는 사회민주당이 부르주아 제3당이고, 파시즘의 한 날개이며, 통일전선 결성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회민주당의 일반당원뿐이고(하층만의 통일전선), 노동자정부의 슬로건은 전략적 술책에 불과한, 실제로는 프롤레타리아독재의 별명이라는 경직된 견해가 우세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파적 방향은 실제적인 통일행동의 가능성을 협소하게 만들었다. 이외에도 노동조합문제, 파시즘문제, 강령문제가 논쟁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식민지 문제로서 루르 점령하의 독일의 민족문제에 관해서도 현저한 대립이 있었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는 무엇보다도 레닌 사망후의 국제 공산주의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공산당의 볼세비키화가 제창되었다. 이것은 레닌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및 조직적 원칙의 관철, 모든 당에 있어서 이 원칙의 구체적인 조건하에서의 적용을 의미했지만, 공산당에서는 로자 룩셈부르크주의와 트로츠키주의를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트로츠키주의를 공산주의의 가장 위험한 편향으로 본(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을 부정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혁명수출을 주장하는 모험주의로 된다) 러시아공산당 다수파는 이윽고 트로츠키=지노비에프 반대파를 공격하여, 대회 후의 제7차 확대집행위원회는 지노비에프를 코민테른 의장직에서 해임시켰다(19261122).

 

VI. 6차 대회 (19287~9)에는 58개의 당으로부터 532명의 대표가 참가했다. 대회는 자본주의의 안정이 머지않아 끝나므로 노동자계급은 새로운 혁명적 고양기를 맞아서 파시즘과 제국주의 전쟁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고 했다. 그것을 위해 통일전선 전술은 개량주의 지도자를 폭로하고 고립시키는 것이 절실하므로 협조적인 사회민주당에 주요한 타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대회는 코민테른의 세계강령을 작성했다. 이것은 원래 부하린이 기초한 것이지만, 스탈린이 철저하게 수정한 것이다. 이 대회를 전기로 하여 부하린과 그 지지자의 세력이 집행위원회로부터 배제되고 각국 지부에서도 같은 경향이 발생했다. 자본주의국가의 노동운동에서 사회민주당 좌파에 타격을 집중하는 방침은 민족해방운동에서도 민족부르주아지 좌익에 타격을 집중하는 방침으로서 재현되어 세계적 반제국주의운동을 저해하는 것으로 되었다. 이 대회는 정세판단에 있어서의 도식주의와 분파적 전술에 의한 경직된 지도로 특징지어진다. 6차대회의 분파적 방침은 그 뒤의 제10차 집행위원회(19297)에서 증폭되고, 사회민주주의 우파의 반공정책에도 자극되어, 사회민주주의를 사회파시즘으로 전화한, 파시즘 독재의 수립을 기도하는 제국주의 대부르주아지의 도구라고 규정하였다. 192910월 미국에서 시발된 경제공황은 코민테른내에 존속하고 있던 자본주의 안정론에 타격을 주었다. 한편 파시즘과의 투쟁속에서 파시즘이 승리하여도 그것은 머지않아 붕괴할 것이라는 예상이 수정되어 제13차 집행위원회 (19331112)는 파시즘을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적인, 배외주의적인, 제국주의적 분자의 공공연한 테러리스트 독재로 정의하였다.

 

VII. 인민전선 전술로의 전환. 7차대회 (19347~8)에는 65개의 당과 501명의 대의원이 참가하였다. 파시즘의 대두라는 역사적 정세의 변화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운동에 새로운 전략전술 방침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응답이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채택된 반파시즘 노동자 통일전선과 이에 기초한 광범위한 각계각층의 진보적 부분을 망라한 인민전선 방침이었고, 또 그에 따른 통일전선 정부 또는 인민전선 정부 방침이었다. 7차 대회의 이들 방침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의 파시스트의 권력장악과 노동자계급의 패배,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노동자계급의 행동통일과 인민전선 정책의 역사적 경험에 기초하여 수립된 것이었다. 7차대회의 반파시즘 통일전선인민전선 방침은 기본적으로는 1920년대의 노동자 통일전선 전술과 노동자정부 방침의 기본골격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7차 대회의 통일전선 방침은 통일전선이 이제까지와 같은 전술적 방침이 아니라 혁명에 있어 전략적 의의를 가지는 것으로 새롭게 조명되는 내재적 맹아를 보인 점에서 1920년대의 그것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침의 제기는 공산주의운동의 혁명론과 전략전술의 발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계기였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민민주주의 혁명론을 형성시키는 중요한 이론적 기초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제7차 대회에서는 각국의 혁명운동에 있어 각 나라마다의 구체적이고 특수적인 조건에 대한 세심한 고려와 각국 공산당의 창조적 활동이 강조되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이에 따라 제7차대회 이후의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중심은 자연히 코민테른의 국제적 활동에서 각국 공산당과 노동자계급의 창조적 활동으로 옮겨지게 된다.

 

VIII. 해산. 7차대회 이후 코민테른 중앙부로부터 각국 지부에 대한 지도와 원조는 급속히 형식화되었다. 중국혁명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가 드물게 되고, 반대로 중국에서는 거의 독자적으로 항일 민족통일전선이 전개되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의 코민테른의 지도는 투쟁하고 있는 스페인 인민의 진정한 통일을 어렵게 했고, 무정부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의 영향을 받는 집단과의 대립은 결과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후 ·소 불가침조약의 체결(1939823)은 영국과 프랑스의 공산주의자의 입장을 불리하게 했고, 이럭저럭 수행되어온 전선의 통일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때부터 독소 전쟁 발발 (1941622)에 이르기까지 더욱 더 코민테른은 형해화되었다. 1943515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조직의 해산을 결정했다. 각국의 혁명운동이 이미 성숙한 지도력을 가져 모스크바로부터의 중앙집권적인 지도가 무의미했던 것이 주요 이유였지만, 이미 제6차 대회 이래 코민테른의 국제 계급노선이 소련의 국가 정책에 종속된 것이 해산의 역사적 배경이었다. 세계 당의 구상은 직접혁명기에는 그 근거가 있었지만 적어도 1923년 이래의 극도의 중앙집권 조직에 의한 각국 지부에의 개입은 각양각색의 혁명적 민족당의 성장에 마이너스로 작용하였고, 이에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였다. 코민테른 창립시의 전세계 공산당원 40만 명은 해산시에 430만 명으로 증대되었지만, 코민테른의 지도에 의한 사회주의혁명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코민테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의의가 부여된다. 첫째, 코민테른은 세계혁명 과정의 시간적인 연속성과 그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가지 국제연대를 체현했다. 둘째,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론을 견지하고 발전시켰다. 셋째, 10월혁명 이후 공산당의 전략-전술의 기초를 만들었다. 넷째, 협조주의와 쁘띠부르주아적 모험주의에 대한 투쟁속에서 제국주의, 프롤레타리아혁명 및 두 개의 체제가 투쟁하고 있는 시기에 적합한 혁명적 행동의 원칙을 발전시키고 기초했다. 다섯째, 식민지 각국 인민의 민족해방투쟁이 가지는 내용과 그 추진력 및 전망을 규정하여 민족식민지 문제가 세계혁명 전략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제시하였다. --> 2차인터내셔널, 국제 공산주의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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