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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 유물론 : 보론] (dialectical materialism)

마르크스 : 낡은 유물론의 입장은 시민사회적 인간이고, 새로운 입장은 인간사회 또는 사회적 인류이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을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경시키는 일이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MㆍE전집, 제3권 p.5) 

존재하는 일체의 것은, 지상과 수중에 생존하는 일체의 것은 그 어떤 운동에 의해서만 존재하고 또 생존한다. 이리하여 역사의 운동은 사회적인 제 관계를 구상하고, 산업의 운동은 산업상의 제 생산물 등을 우리에게 준다. (철학의 빈곤, 1867, MㆍE전집 제4권, p.131).

나의 변증법적 방법은 그 근본에서 헤겔의 방법과 다를 뿐만 아니라 그와 정반대이다. 헤겔에 있어서는 사유(思推)과정이 현실적인 것의 조물주(造物主)이고 현실적인 것은 사유과정의 외적(外的) 현상(現象)을 이루는데 불과하다. 더욱이 그는 사유과정을 이념(理念)이라는 이름 아래 독립된 주체로 전화한다. 이와는 정반대로 나에게는 이념적인 것은 인간의 두뇌에 이전되는 번역된 물질적인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자본론, 1873, 岩波文庫 제1권 제1분책, 1957, p.36).

변증법이 그의 신비화된 형태에서 독일의 유행(流行)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현존하는 것이 광명을 주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변증법이 그 합리적인 모습에서는 부르주아지와 그의 융통성 없는 획일적인 대변자에게는 화가 나고 또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존하는 것의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리고 그것의 이해(理解), 부정의 필연적인 몰락의 이해까지도 포함하는 것이고, 생성된 모든 형태를 운동의 흐름 속에, 따라서 또 그의 경과(經過)적인 측면에 따라서 이해하는 것이므로 아무 것도 겁내지 않고, 본질상 비판적이며 혁명적이기 때문이다. (동상, P.37).

엥겔스 : 자연이나 인류역사 그리고 우리 ‘자신’의 정신활동을 고찰할 경우,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들 앞에 나타나는 것이 연관과 상호작용의 끝없이 뒤엉킨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이 연관과 상호작용 속에서는 어떤 것이든지 간에 원래 그대로의 물ㆍ장소ㆍ상태로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운동하고 변화하며 생성하고 소멸한다. 따라서 우리가 우선 보는 것은 전체로서의 모습인데, 그 속에는 개개요소가 많건 적건 간에 배후에 많이 숨겨져 있다. 우리는 무엇이 운동하고 추이하며 연관되는가 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운동ㆍ추이ㆍ연관 쪽에 보다 많은 주의를 돌린다. 원시적이고도 소박 하지만 본질적으로 정확한 이 세계관이 고대 그리이스 철학의 세계관인 바 이것을 처음으로 명확히 표현한 사람은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이 다. 그는 말하기를, 만물은 존재하고 또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물은 유전하고 부단히 변화하고,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이 설사 제 현상을 전체적인 모습의 일반적인 성질로 정확히 파악한 것이라 해도, 이 전체로서의 모습을 구성하고 있는 개개요소를 설명하는 데는 아직 불충분하다. 그리고 개개요소(의 설명을 할 수 없는)를 ‘모른다’고 말하는 한, 전체로서의 모습도 잘 모르는 것이다. 이들 개개요소를 인식 하려면, 그것들을 자연 또는 역사와의 연관 로부터 분리시켜 각각 개별적으로 그 성상이나 특수한 원인과 결과 등에 대하여 연구하여야 한다. 이것이 무엇보다 우선되는 자연과학과 역사적 연구와의 임무이다. (반듀링론, 1877, MㆍE선집, 제14권, pp 91~92).

보리알을 예로 들어보자. 수억 만개나 되는 보리알은 도정(搗精)되고, 삶아지며, 양조되어 소비된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한 알의 보리가 그의 정상적인 제 조건에 합치된다면, 즉 적합한 땅에 떨어지면 그것은 열과 습기의 영향 하에 그의 독자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다시 말하면 발아한다. 그러면 그것은 보리알로서는 소멸하고 부정되지만 그대신 그 보리알에서 발생한 식물이 보리알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 식물의 정상적인 생애는 어떤 과정을 밟을까? 그것은 성장하고 개화하며 결실하여 끝내는 또다시 보리알을 생성시킨다. 그리고 이 보리알이 성숙하자마자 줄기가 사멸함으로써 이번에는 그쪽이 부정된다. 이와 같은 부정의 부정 결과로 또다시 최초의 보리알,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10배, 20배, 30배의 수로 보리알이 얻어진다. 곡물의 종은 매우 천천히 밖에는 변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보리는 1세기전의 그것과 거의 같다. 그런데 관상용 원예식물, 예컨대 다알리아라든가 난초를 예로 들어보자. 만일 종자와 그로부터 생긴 식물이 원예가의 기술에 의하여 처리된다면 우리는 이 부정의 결과로 보다 많은 종자를 얻을 뿐만 아니라 보다 아름다운 꽃이 피는, 질적으로 개량된 종자를 얻게 된다. 더욱 이 과정이 반복될 때마다 그의 개량이 고도화되어 간다. 보리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과정은 일반적인 곤충, 예컨대 나비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나비는 알의 부정으로 알에서 생겨나 그의 여러 변태과정을 거쳐 성적 성숙단계에 이르면 교미하고, 그리고 교미과정이 끝나고 암컷이 많은 알을 낳으면 곧 죽어 버림으로써 또다시 부정된다. 다른 식물이나 동물의 경우는, 이 과정이 이렇게 간단하게 처리되지는 않는다. 죽, 그런 것이 사멸될 때까지는 단 한번만이 아니라 여러번 종자, 알 또는 새끼를 낳는다. 그러나 이런 일은 우리에게 는 별로 상관이 없다. 여기서는 다만 부정의 부정이 두가지 생물계 영역에서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만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부정의 부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ㆍ역사 및 사유 등 극히 일반적인, 또 바로 그때문에 매우 광범위하게 작용하는 중요한 발전법칙이다. 즉, 이미 말한 것처럼 이것은 동ㆍ식물계, 지질학, 수학, 역사나 철학에 적용되는 법칙이다. 그리고 듀링씨가 제아무리 반대하고 바르작거린다 해도 소용없는,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서 부지불식간에 그도 여기에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법칙이다.…… 변증법에서의 부정이란 다만 없다는 것도, 한가지의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도, 그리고 그 물(物)을 임의의 방법으로 파괴하는 것도 아니다. 일찍이 스피노자는 모든 한정 또는 규정은 동시부정 (Omnis determinatio est negatio) 이라고 말 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부정하는 방법은 첫째로, 과정의 일반적인 성질에 의하여, 둘째로, 그의 특수한 성질에 의하여 규정된다. 나는 다만 부정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부정을 지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따라서 나는 첫번째 부정을 행함에 있어 두번째 부정이 여전히 가능하게끔, 또는 가능하도록 처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어떻게 해서? 그것은 각기 개별적인 경우의 특수한 성질에 의존한다. 따라서 변증법의 제 법칙이 도출되는 것은 자연의 역사와 인간사회의 역사에서이다. 왜냐하면 이들 법칙은 이러한 두 가지 국면에서의 역사적 발전과 사유 그 자체와 함께 가장 일반적인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요점에서 다음의 세가지 법칙에 귀착된다. ①양에서 질로의, 그리고 그의 역으로의 전화법칙 ②대립물의 침투법칙 ③부정의 부정법칙 이 세가지 법칙은 모두 헤겔에 의하여 관념론적인 방법, 즉 단순한 사유법칙으로서 전개된 것이다. 즉, 첫번째 법칙은 논리학의 제1부 존재론에서 전개되고, 둘째 법칙은 그의 논리학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제2부의 본질론 전체를 차지한 것이고, 마지막 셋째 법칙은 구성 체계 전체에 대한 근본법칙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오류는 이들 법칙이 사유법칙으로서 자연 및 역사에 강제되고, 후자로부터 도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로부터 매우 억지로, 그리고 때로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이의 전체구성이 잘 짜여져 있다. 그에 의하면, 세계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그것이 일정 한 인간사유 발전단계에서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일정한 사상체계에 합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고를 전도시킨다면 모든 것은 간단해져 관념철학에서는 극도로 신비적인 것으로 보이는 변증법의 법칙도 곧 간단하고도 명백한 것으로 될 것이다. 상호작용은 우리가 오늘날 자연과학에 입각하여 운동하는 물질을 전체로서 관찰할 경우, 우리가 부딪치는 최초의 것이다. 우리는 일련의 운동형태들, 즉 역학적 운동, 열, 빛, 전기, 화학적 화합 및 분해, 응집상태 등 여러 가지 종류의 이행과 유기생명체 등을 보는데 이것들은 —— 현재로서는 유기생명체를 제외하고 하는 말이지만 —— 모두가 상호간에 이행하고 상호제약 하는 바, 여기서는 원인으로, 또 저기서는 결과가 되고, 더욱이 이때 모든 형태변화를 일으켜 운동의 총화가 항상 동일하게 유지된다(스피노자의 ‘실체는 자기원인이다’는, 상호작용을 가장 적절히 표현한 말이다). 역학적 운동은 물질을 열, 전기, 자기, 빛 등으로 전화시키거나 그와 반대의 것으로 전화시킨다. 상호작용은 사물의 참된 궁극적 원인(causa finalis) 이라고 헤겔은 말하였다(어디서?). 사상은 이리하여 자연과학에 의해 확인된다. 이 상호작용 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앞으로 더 나아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배후에는 이미 인식하여야 할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까닭이다. 우리가 물질의 운동형태를 인식했을 때 (자연과학이 존재하기 시작한 이후 그 기간이 짧음을 고려할 때, 물론 여기에는 아직도 극히 많은 것이 결여되어 있지만), 우리는 물질자체를 인식했고 또 그것으로써 인식은 이미 완료되는 것이다. (반듀링론, MㆍE선집, p. 291).

생명과 죽음. 오늘날에는 죽음을 생명의 본질적 계기.......로서 생명의 부정이 생명 그 자체 내에 본질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그런 생리학은 이미 과학적인 것으로 성립되지 않게끔 되었다. 이리하여 생명은 언제다 생명의 필연적인 결과, 생명 속에 항상 맹아로서 존재하는 것, 다시 말하면 죽음과의 관계에서 고려되고 있다. 생명의 변증법적 해석이란 이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단 이것을 이해한 사람에게는 영혼불멸에 관한 일체의 엉터리없는 이야기는 제거되는 것이다. 죽음은 생물체의 해체이고, 그의 실체를 형성하고 있던 화학적 성분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란 하나의 생명원리, 많건 적건 영혼을 뒤에 남기는데, 후자가 인류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있는 생물체 보다 오랫동안 남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변증법을 개재시킨 생명과 죽음의 본성에 관한 매우 간단한 해명으로써도 태고적부터의 미신을 타파하는데 충분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죽는 것을 말한다. (동상, pp. 392〜393).

헤겔에 있어서의 그의 변증법은 개념의 자기발전이다. 그의 절대개념은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디에? 그것은 모르지만——영원히 존재할 뿐만 아니라 또한 본래부터 현존하는 전세계에 살아있는 얼인 것이다. 즉, 그에 의하면 이 절대개념은 그의 모든 전단계 —— 그의 논리학 속에 상론되어 있는, 그리고 절대개념 그자체내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전단계——를 통하여 자기 자신으로까지 발전한다. 그런 연후에 이 절대개념은 자기를 ‘외화’하여 자기를 ‘자연’에 전화시킨다. 그리고 이 자연에서 절대개념은 자기를 의식함이 없이 자연필연성의 형태를 취하지만, 이윽고 새로운 자기발전을 이룩하여 끝내는 인간에서 또다시 자기의식에 도달한다. 이 자기의식은 이제 또다시 조재로부터 자기를 역사 속에서 만들어 내고 끝내는 완전한 절대개념이 다시 한번 헤겔 철학에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헤겔에 있어서는 자연 및 역사 속에 나타나는 변증법적 발전, 즉 지그재그적인 모든 운동이나 일시적인 후퇴 등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바, 낮은 단계로부터 높은 단계에로 발전하는 인과적인 연관은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딘지 모르지만, 어쨌든 사유하는 인간두뇌의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개념의 자기운동의 모사판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적인 지도(輊倒)는 제거 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적인 사물을 그런 절대개념의 어느 단계의 모상으로 해석하는 대신, 이와는 반대로 우리의 두뇌 속에 있는 개념을 또다시 유물론적으로, 현실사물의 모상으로서 파악한다. 이로써 변증법은 운동 —— 외부세계 및 인간사유 —— 의 일반적인 법칙에 관한 학문으로 환원된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 1886, MㆍE선집 제15권, pp. 482〜483).

레닌 : 하나의 둘로의 분열과, 이 하나의 모순된 두 부분의 인식(랏사알의 혜라클레이토스의 제3편 ‘인식에 대하여’의 첫 부분에 있는 필론〈Phildn〉의 헤라클레이토스론의 인용문을 참조할 것)은 변증법의 핵심(‘본질’의 하나, 유일한 근본적인 특성 또는 특징은 아니라 할지라도 근본적인 특성 또는 특징의 하나다)이다. 헤겔도 바로 문제를 이렇게 제기하고 있다. 대립물의 동일(아마도 대립물의 ‘통일’ 이라고 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 하긴 동일과 통일이라는 술어의 구별은 여기서 특히 중요하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는 양쪽이 모두 정확하다)이란 자연(정신도 사회도 포함하여)의 모든 현상을 과정과의 사이에 모순된, 서로 배제하는, 대립된 모든 경향을 승인하는 것(발견하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과정을 그의 ‘자기운동’에서, 그의 자발적인 발전에서, 그의 생동하는 생명에서 인식하는 조건은 그것들을 대립물의 통일로써 인식하는 것이다. 발전은 대립물의 ‘투쟁’이다. 2개의 근본적인 (또는 2개의 가능한? 또는 역사상으로 볼 수 있는 2개의?) 발전(진화)관은 감소 및 증대로서의, 반복으로서의 발전 및 대립물의 통일(하나가 서로를 배제하는 2개의 대립물로 분열하는 것 및 양자의 상호관계) 로서의 발전이다. 첫째 운동관에서는 자기운동이, 그의 추진력이, 그의 원천이, 그의 원동이 그늘에 감추어진 그대로이다(혹은 그 원천이 외부에——신, 주관 등등에 반영된다). 둘째 운동관에서는 주된 주의가 바로 ‘자기’운동의 원천을 인식하는 데로 돌려진다. 첫번째 생각은 죽은, 생기가 없는, 매마른 것이다. 두번째 생각은 살아 있는 것이다. 두번째 생각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자기운동’을 이해하는 관건을 준다. 그것만이 ‘비약’, ‘점차성(漸次性)의 중단’, ‘대립물에의 전화’, 낡은 것은 소멸과 새 것의 출현을 이해'하는 관건으로 된다. 대립물의 통일(합치, 동일, 균형)은 조건적ㆍ일시적ㆍ경과적ㆍ상대적이다. 서로 배제하는 대립물의 투쟁은 발전ㆍ운동이 절대적인 것처럼 절대적이다. (변증법문제, 1915, 레닌전접 제36권, 대월서점, 동경, 1976, p. 419). 

변증법은------이미 헤겔이 해명했듯이 一 상대주의, 부정, 회의주의의 계기를 내포 하지만 그러나 상대주의에 귀착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변증법은 무조건적으로 상대주의를 포함한다. 그러나 그에 귀착시키는 것은 아니다. 즉, 그것은 우리의 모든 지식의 상대성을 객관적인 진리의 부정이라는 의미에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식이 이런 진리에 접근해 가는 한도가 역사적으로 조건지워져 있다는 뜻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1908, 레닌전집 제14권, p.159). 

변증법적 논리는 우리가 더욱 전진할 것을 요구한다. 대상을 실제로 인식하려면 우리는 그의 모든 측면, 모든 연계 및 ‘매개’를 파악하고 연구해야만 한다. 우리는 완전하게는 이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전면성의 요구는 우리를 경계하여 오류와 경화로부터 구제한 것이다. 이것이 첫째다. 둘째로, 변증법적 논리는 대상을 그의 발전에서, 그의 ‘자기운동’ (헤겔이 자주 말한 것처럼)에서, 그의 변화에서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 ……세째로, 인간적인 실천의 전체는 진리의 비판으로서도, 또 인간에게 필요한 것과 대상과의 실제적인 연관의 규정자로서, 대상의 ‘정의’ 속에 파고 들어가야 한다. 넷째로, 변증법적 논리는 플레하노프(헤겔의 선례를 본받아)가 즐겨 말한 것처럼 ‘추상적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는 항상 구체적이다’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 (또다시 노동조합에 대하여, 현정세와 트로츠키 및 부하린의 오류에 대하여, 1921, 레닌전집 제32권, PP. 91〜92).

트로츠키 : 변증법적 유물론은 물론 영구불변의 철학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변증법 정신에 모순된다. 과학적 사상의 더 한 층의 발전은 변증법적 유물론도 의심할 바 없이 단순한 구성요소가 되는 한층 더 심원한 교의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같은 인물이 한 해에 한 번 이라던가 10년에 한 번씩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함은 말할 나위도 없으므로 이 철학혁명이 부패되고 있는 부르주아체제 하에서 완성될 것을 기대할 근거는 하나도 없다 오늘날 프롤레타리아의 생사를 결정하는 임무는 세계를 새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철두철미 만들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다음 시대에는 위대한 행동적인 혁명가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지만 새 마르크스를 기대할 수 없다. 사회주의 문화의 기초에 섬으로써만 인류는 과거의 이데올로기적 유산을 검토할 필요성을 느낄 것인바 그것은 단지 경제분야 에서뿐만 아니라 지적 창조분야에서도 우리가 훨씬 뛰어넘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마르크스주의의 옹호, 1940, 트로츠키선집 제9권,' pp. 24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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