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식(鄭泰植, 1910~?)] ()
(경성콤그룹 참가자) 충북 진천 출신으로, 1929년 3월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4월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했다. 1933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법문학부 조수(助手)가 되어 경제연구실에서 근무했다. 4월 이 대학에서 독서회를 조직하여 사회과학을 연구했고 용곡여학교(龍谷女學校)에 독서회를 조직했다. 1934년 4월 경성법률전문대학에 반제반(反帝班), 문화반, 구원반을 조직했다. 같은 달 각 공장에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5월 적색노동자그룹, 공산주의자그룹 결성에 참여하여 각각 식료품부 책임자, 공청부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같은 달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1936년 11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경성콤그룹에 참여하여 인민전선부에 소속되었다.
(남로당 중앙위원)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 경제부원으로 선정되었고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주필 겸 정치부장이 되었다.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11월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 ․ 조사부장이 되었다. 「노력인민」총책임을 맡았고 ‘이론진 블록’ 책임을 맡았다. 박헌영(朴憲永) 월북 이후 남로당 제3인자가 되었다. 1950년 4월 경찰에 검거되어 5월 용산 육군본부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한국전쟁 때 서울에서 「해방일보」복간에 참여하여 논설위원이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농림성 기획처 부처장을 지냈고 잡지 「인민」교정부원으로 일했다. 남로당 숙청 당시 숙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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