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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영(鄭禧泳, 1902~?) (本)鄭禧冕] ()

(고려공청 회원, 조공 재건운동 참가자) 경남 진주 출신으로, 1925년 진주 양성학원(養成學院)을 중퇴했다. 같은 해 토오꾜오(東京) 세이소꾸(正則)영어학교에 다녔다. 그해 1월 조선무산청년동맹회 결성에 참가했다. 11월 조선무산청년동맹회를 또오꾜오 조선청년동맹회로 개칭하고, 기관지 「청년조선」을 월간으로 발행했다. 이 무렵 동맹회 내 화요파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3개월간 정권(停權) 처분을 받았다. 1926년 4월 니혼대학(日本大學) 경제과에 입학했으나 곧 중퇴했다. 11월 토오꾜오에서 조선신흥과학연구회를 결성했다. 1928년 11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메구로(目黑)야체이까 성원으로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병보석으로 가출옥했다. 1929년 인정식(印貞植)의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재건운동에 대항하여 일본에서의 당재건운동 해소를 주장했다. 1930년 김치정(金致廷), 고경흠(高景欽)의 ‘분파행동’에 대항했고, 1931년 3월 토오꾜오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0월 ML파 공산주의그룹의 당재건운동에 참가하여 토오꾜오연락부를 결성했다. 1932년 5월 전북 임실에서 전북혁명전위동맹 결성에 참여했다. 1933년 8월 전북에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1935년 10월 전주지법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38년 5월 만기출옥했다.
(전평 상임준비위원) 1940년 10월 이현상(李鉉相)과 조공 재건운동 방침을 협의했지만, 그의 체포로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1941년 말부터 이정윤(李廷允)과 함께 활동했고 1944년 김태준(金台俊)과 함께 활동했다. 1945년 봄 정재달(鄭在達), 최원택(崔元澤) 그룹과 제휴했다. 해방 직후 경전(京電)종업원조합 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10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상임준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46년 1월 조공 서울시당 동구위원회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자 「박헌영(朴憲永) 동지에게 서간(書簡)」이란 글을 작성했다. 2월 ‘조공 중앙 및 지방동지 연석간담회’에 서울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일제하 박헌영 등의 활동만이 정통 ‘국제노선’이었다는 주장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사회노동당 준비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 1947년 1월 사회노동당을해체하고 남조선노동당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며 사회노동당 탈당성명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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