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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시대의 제국] (empire of Marx's day)

맑스와 엥겔스는 로마제국, 인도의 무갈제국, 중국의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여러 제국(帝國)에 대해서 연구했다. 그들은 당시 유럽의 팽창주의를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팽창한 것과 같은 것으로 파악했다. 유럽의 대외적 팽창주의나, 유럽내부에서 성장하여 발전한 자본주의는 모두 야만적이고 혐오스러운 것이었지만, 그러나 팽창주의로부터 고통받았던 사람들이 일단 거치지 않을 수 없었던 과도기적 과정이기도 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가 팽창주의의 주요 대상이었으며 제국주의와 식민지 사이에, 심지어는 유럽의 후진국들 사이에서도 커다란 격차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맑스는 범슬라브주의의 러시아 대변인인 구로프스키 백작을 높이 평가했다. 왜냐하면 그는 ‘유럽과 유럽의 문명에 반대하는 동맹’을 옹호한 것이 아니라, 슬라브족의 에너지의 출구로서 아시아라는 ‘정체된 황무지’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문명의 원동력”이라고 구로프스키는 보았다(《동양의 문제》no.98). 아시아제국들은 아무런 장점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으로, 심지어는 유럽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터키도 마찬가지로 취급되었다. 맑스는 발칸반도의 야만적 상태가 주로 터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으로 보았다. 맑스는 발칸제국들이 자유를 얻기만 하면 그들이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제정 러시아를 몹시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동양의 문제》no.1).
푸리에(Fourier)의 제자들은 공상적 사회주의의 이념을 바탕으로 일종의 공상적 제국주의를 위한 청사진을 고안해냈는데, 그것은 평화적인 과정을 통해서 원주민들을 도와줌으로써 북아프리카를 프랑스의 지배 아래 두려는 것이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그러한 장미빛 환상을 부정했지만, 대부분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이 문명의 진전을 보장할 것으로 보았다. 훨씬 뒤에 영국이 이집트를 점령했을 때, 엥겔스는 이집트 민족의 지도자 아라비 파샤(Arabi Pasha)는 농민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외세에 의존하기 보다는 스스로 힘으로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를 원한다고 확신했다. 즉, 엥겔스는 농업사회의 농민들은 착취를 당할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엥겔스는 어느 누구든 피압박 대중을 동정하고 영국의 야만성을 비난할 것이며, 결코 당시 영국이 군사적 애로사항을 두둔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베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 1882년 8월 9일).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관점에도 불구하고 엥겔스와 맑스는 지역적 상황의 다양성, 동기, 방법 등에 주의를 기울였다. 맑스 이후 맑스주의 자들이 구성하려고 했던 단일한 제국주의 이론도 명쾌한 해답을 제공하지는 못했다. 맑스는 모든 식민지 정복을 혐오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제2차 미얀마전쟁과 마찬가지로 유럽 내부에서 진전되어 나갈 수도 있는 보다 중요한 것들을 막아버리기 때문이었다.
1853년에 있었던 영국의 미얀마전쟁에의 개입을 개탄하면서, 맑스는 영국이 전쟁도발을 용서받지 못할 것으로 규정하였다. 왜냐하면 미얀마에서의 상황은 영국의 전략에 위험스런 것도 아니었고, 미국의 개입 가능성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욕심 많은 영국 귀족들의 사치욕구 이외에는 전쟁의 뚜렷한 목적이 없었다(영국제국주의에 대한 이후의 연구는 이 점을 과소평가했다). 또한 맑스는 인도인들의 양어깨를 짓누르는 아시아에서의 마찰을 고찰하면서 인도재정의 붕괴가 멀지 않을 것으로 예견했다(‘미얀마에서의 전쟁’ 1853년 7월 30일). 같은 해에, 영국의 내정간섭과 무역압력에 대한 중국에서의 반란과 혼란을 평가하면서 맑스는 예언적으로 멀지않아 중국에서 일어날 혁명이 영국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했다(‘중국과 유럽에서의 혁명’, 1853년 6월 14일).
1883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정벌하고 있을 때, 엥겔스는 적도 지방에 대한 제국주의의 열망은 재고품의 수출을 위한 관심에서 비롯되었으며, 제국주의적 침략이 이제는 인도차이나와 튀니지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고 비난했다(카우츠키에게 보낸 편지, 1883년 9월 18일.) 나중에 맑스주의 이론가들은 홉슨-힐퍼딩-레닌의 자본수출에 대한 이론을 제국주의의 동인으로 규정했지만, 자본주의와 그 작동 법칙과 같은 이러한 초보적인 해석에 대해서는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1884년 엥겔스는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에 대한 지배를 국가사호주의의 예로서 규정했다. 인도네시아의 식민지정부는 수출을 위한 농작물 생산을 조직화했으며, 원시공산주의적 마을공동체의 원리에 따라서 이익을 균등하게 분배하였다(바벨에게 보낸 편지, 1884년 1월 18일). 더구나 인도네시아에서는, 러시아나 인도와 마찬가지로, 당시 잔존했던 원시 공산주의가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에 대한 착취와 독재에 이용되었으며, 그러한 착취와 독재가 빨리 사라져야 한다고 엥겔스는 주장했다(카우츠키에게 보낸 편지, 1884년 2월 16일).
시베리아에서의 러시아와는 달리 영국제국주의의 뚜렷한 특징은 극소수의 이주자들로써 광대한 식민지를 장학한다는 점이었다. 후기의 맑스주의자들과는 달리, 맑스는 이민보다는 인도의 영토에 보다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자본론》제Ⅰ권의 마지막 장을 기본 웨이크필드(Gibbon Wakefield)의 조직화된 이민에 할애했다. 웨이크필드의 계획은 토지매매를 통제하고 고가를 유지케 함으로써 영국의 사회질서를 식민지에 이식하고자 고안된 것으로서, 이민자들이 농장을 소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자본의 집적을 저지하고 경제발전을 차단시코자 함이 목적이었다. 맑스는 다수의 노동자들을 오스트레일리아로 데려간 기업가를 질타하면서, 이주한 노동자들은 도착하자마자 모두 이리저리 흩어지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본질 즉, 착취할 노동력이 있을 때 돈은 자본이 된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뚜렷한 실례이다.
엥겔스는 본토의 식민지들(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국가)이 머지 않아 독립하리라 예견했다(카우츠키에게 보낸 편지, 1882년 9월 12일). 1888년 엥겔스는 캐나다를 단기간 방문하면서 낙후된 상황을 목격하고 (주로 프랑스의 영향이 강했던 지역을 방문) 10년 이내에 그 지방은 미국에 병합될 것이라고 보고(이미 그 지방은 미국의 경제적 통제를 받고 있었다) 여기에 영국은 아무런 반대를 하지 못하리라고 판단했다(소지(Sorge))에게 보낸 편지, 1888년 9월 10일). 맑스는 당시 노예제의 폐지에 의해서 변형된 낡은 방식의 플랜테이션은 식민지의 범주로 바뀌었다고 보았다. 1865년 맑스와 엥겔스는 영국이 자메이카에서 저지르고 있는 추악상에 분노했으며,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1865년 12월 1일)에서도 몹시 분개하였다. 자메이카의 원주민은 조금만 저항해도 가혹한 탄압을 받았으며 극도로 궁핍한 처지에 있었다. 태평양에 있는 영국의 식민지에서 이민자들은 얼마 안가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야망을 실현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1883년 엥겔스는 뉴기니아를 삼켜버리려는 영국의 계획을 폭로했으며, 퀸스랜드(Queensland) 설탕농장 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황을 고발했다(카우츠키에게 보낸 편지, 1883 9월).
맑스와 엥겔스는 평생을 통하여 영국 제국주의의 최초의 희생국인 아일랜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아일랜드의 역사를 기술할 계획을 세웠던 엥겔스는 1856년 그곳을 방문하고 빈곤과 후진성이 농후한 상황에 충격을 받았다 (맑스에게 보낸 편지, 6월 23일). 맑스는 아일랜드의 경제적 변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당시 아일랜드는 대기근과 고율의 소작체제가 붕괴한 후 농업국에서 목축국으로 바뀌었으며 이민은 계속되고 있었고, 농민들이 토지에서 쫓겨난 후 농장들이 통합되어 가고 있었다.(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1867년 11월 30일). 인민헌장 운동 이후 영국 노동자계급이 어떤 투쟁적인 정치의식도 보여주지 못하고 헤매고 있을 때, 맑스는 그 이유가 영국 자본가들의 노동자 분할 정책에 있음을 간파했다. 즉 영국 자본가들은 아일랜드 노동자들을 영국으로 끌어들여 저임금으로 고용해서 노동자계급의 분할을 도모하고자 했다. 영국 노동자들은 아일랜드 노동자들을 증오했으며 그들을 인종적 편견으로 대했다. 맑스는 만약 영국이 아일랜드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아일랜드는 곧 농업혁명이 일어나 귀족계급을 타도하고 영국과 같은 발전의 길을 걷고 급기야는 자본주의를 전복시켰을 것이라고 보았다(메이어와 보겔에게 보낸 편지, 1870년 4월 9일). 맑스의 이러한 예견은 설득력은 있지만 그의 다른 주장들에 비해 근거는 미약한 것 같다.

[관련자료]

Mashkin, M.N. 1981; Frantsuzkie sotsialisti i demokrati i kolonial'nii vopros 1830-1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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