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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폐간] ()

해방직후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숱하게 많았던 언론탄압 가운데 1959년의 『경향신문』 폐간이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폐간 당시 『경향신문』이 가장 강렬한 야당지였다는 점이다. 해방에서 정부수립에 이르는 혼란기에 있어서 미군정 또는 초창기의 정부는 많은 좌익신문들에 대해 폐간령을 내렸다. 그 근거는 주로 포고령 위반과 『경향신문』 폐간의 법적 근거로 이용됐던 군정법령 제88호였다. 『해방일보』 · 『조선인민일보』 등에 대한 폐간조치가 바로 그것이다. 허나 6·25 당시에는 주로 계엄포고위반으로 제약을 가했으나 신문을 폐간한 일은 없었다. 이것은 모든 신문이 정부에 협조적이었다기보다 권력의 토대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비록 정부의 비위에 거슬린다 하더라도 가혹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휴전이 되고 환도가 되자 고바우만화와 이른바 〈괴뢰〉 오식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얼마동안 정간되었을 뿐이었다.
이에 비해 『경향신문』에 대한 것은 단칼에 숨을 거두게 한 폐간조치였다. 더구나 비록 야당을 지지하기는 하지만 의심할 여지없는 우익계인 『경향신문』에 대한 폐간조치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경향신문』의 몇가지 오보에 대한 법의 제재가 아니라 이러한 극렬 야당지를 그대로 놓아두고서는 12월 24일의 보안법파동으로 일어난 전반적인 반정부 움직임을 진정시킬 수 없었고, 더구나 1년 뒤의 정·부통령 선거를 원하는 대로 치르기 어려울 것이라는 데 대한 예방조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경향신문』의 폐간에 대해 『동아일보』 · 『조선일보』 · 『한국일보』 등 야당지거나 중립적인 신문들은 정부에 대한 비난을 서슴지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전보다 반정부적인 보도와 논조가 부드러워진 것을 보면, 『경향신문』 폐간을 통해 언론의 기를 꺾어 놓자는 정부여당의 기본 책략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우리의 언론 1백년사의 어느 대목에서도 볼 수 없던 언론기관의 정부와의 대결자세를 들 수 있다. 『경향신문』이 폐간통지를 받자 발행인 한창우는 바로 법적투쟁에 들어갔다. 한창우 사장은 마침 폐간통지를 받기 몇시간 전에 자유당의 제2인자이자 민의원의장인 이기붕을 만나 선후책을 강구하기 위해 야간열차편으로 진해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폐간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한창우 사장은 부산에서 내려, 기자들에게 “법대로 싸우겠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5월 1일 부산에서 한사장은 평소 친교가 두터운 몇 사람의 변호사들과 이마를 맞대었다. 대한변협회장인 정구영(후에 공화당총재, 3선개헌 반대로 박대통령과 결별). 이태희(전 서울지검 검사장, 민주당 정권 때 검찰총장). 김흥한(민주당 정권 때 장면 총리 비서실장)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곧 『경향신문』 폐간의 적용법조로 내세운 군정법령 제88호가 위헌이라는 이유로 공보실장 전성천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한편 행정처분에 대한 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그들은 법이 허용하는 한 당당하게 법정투쟁을 벌였다. 1959년 4월 30일자로 폐간되는 날로부터 1960년 4월 26일 위대한 4·19 혁명의 환호 속에서 복간되기까지 1년 가까운 기간이었다.
이 과정에서 상당히 독립성을 유지해오던 사법부마저 가처분의 심의를 맡은 고등법원의 담당판사와 대법원 사이에 미묘한 갈등을 드러냈다. 경향신문사측이 가처분신청을 낸 지 두 달 가까운 6월 26일 서울고등법원은 가처분결정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경향신문』의 승리이자 사법부의 일각이 건재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경향신문』은 다시 신문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복간 7시간 만에 『경향신문』은 다시 정부로부터 숨통이 조여졌다. 또 다시 정간처분이 내려진 것이다. 『경향신문』은 그 다음날 공보실장에게 소원을 내는 한편 29일엔 정간처분에 대한 행정처분 취소강구소송 및 행정처분 집행정지 결정신청을 내고 새로운 법정투쟁을 벌였다.
8월 4일 군정법령 제88호에 대한 위헌신청을 하는가 하면 8월 29일 가처분 신청이 기각되자 대법원에 항고장을 냈다. 9월 8일 서울고등법원 제2부는 경향정간 취소청구 본안소송마저 기각하는가 하면, 엎친데 덮친 격으로 폐간이유의 하나로 들었던 경향신문 홍천지국의 모 사단장에 관한 허위사실 유포혐의에 대해 서울고등법원은 지국장을 포함한 세 사람의 기자에게 징역 8월을 선고하였다. 경향신문 정간처분은 이제 대법원에 올라갔으나 10월 20일 행정 소송 재판부가 결정되었을 뿐 실질적인 심리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그 이듬해인 1960년 2월 5일, 3·15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법원은 군정법령 제88호가 위헌이라는 이유를 들어 이를 헌법위원회에 제청했다. 그 당시 헌법위원회는 구성조차 되지 않은 상태였다. 3월 12일 9명의 헌법위원 가운데 대법관 5명이 헌법위원에 임명되고, 헌법위원회가 가까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4·19 학생혁명이 일어나 이승만대통령이 하야한 그 날에야 대법원은 부랴부랴 『경향신문』에 대한 행정처분의 집행을 정지하는 가처분결정을 내렸다.
언론이 정부를 상대로 한 이런 법정투쟁은 아마 전에도 없었고 지금까지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일제말기 1940년 8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대한 폐간은 실질적으로 강요된 것이었으나, 형식은 자진폐간의 형식이었고 해방 뒤 대부분의 좌익지와 극소수의 우익지들에 대한 폐간은 별일 아닌 것처럼 신문사의 문이 닫혔다. 심지어 최근 수년 동안에는 자진폐간, 자진통폐합 등의 형식을 빌어 마치 신문사쪽 사정으로 이러한 조치를 한 것인양 호도하고 있고, 또한 이를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비교할 때 자유당말기의 경향신문사의 법정투쟁은 이 나라 언론사에서의 찬연한 한 페이지였다 할 수 있다.
당시 정부가 표면상 『경향신문』의 폐간이유로 내세웠던 것은 다음 다섯 가지다. ① 정부여당의 지리멸렬상(1959년 1월 11일자 사설), ② 여적(餘滴, 1959년 2월 4일자 단평), ③ 사단장의 휘발유 부정처분 기사(1959년 2월 15일자 홍천지국기사), ④ 간첩체포 기사보도(1959년 4월 13일자), ⑤ 대통령회견 기사 (1959년 4월 15일자). 이것은 기사의 비진실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멀리 1956년의 정·부통령선거 및 장부통령 저격사건에서 나타난, 어느 신문보다도 격렬한 비판적 태도가 정부의 눈에 거슬렸다. 더구나 『경향신문』이 천주교 서울교구의 유지재단인 데다 야당인 민주당 출신 부통령 장면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장면 부통령이 이끄는 민주당내 신파의 기관지 같은 기능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 다른 야당지나 중립지보다 유달리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경향신문』이 가장 날카롭게 정부 여당을 공격하고 정부 여당이 이 신문을 어느 신문보다 미워하여 드디어 타살하기에 이르렀지만 그렇다고 『경향신문』 쪽에 과오는 없었을까. 그것은 사건관련자들에 대한 소환·심문·구속과 관계없이 신문사로서의 대응자세를 보면 경향신문사 쪽에서도 진실을 보도하는 데 소홀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경향신문』은 사설에서 이기붕의장이 스코필드 박사를 만나서 귀국하라고 했다고 했는바, 이 의장은 스코필드 박사를 만난 일도 없고 더구나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한 일도 없다는 점을 들어 허위보도임을 추궁하면서 사설로서 사과하면 형사문제화하지 않겠다는 뜻을 이 의장 쪽에서 전해왔다. 『경향신문』은 이에 대해 이틀 뒤인 1월 31일자 1면에 신문사상 유례없는 사설정정기사를 냈다.
다음에 또 터진 것이 이른바 단평 「여적」(餘滴) 사건이었다. 2월 4일 조간에 난 「여적」에 대한 당국의 수사는 훨씬 민첩하고 강력한 것이었다. 서울시경은 4일 오후 편집국장 강영수(당시 주필 이관구는 IPI 관계로 해외여행중)를 약 8시간에 걸쳐 심야까지 심문했다. 강국장은 끝내 필자를 밝히지 않았다. 그러자 서울지방법원은 발행인 한창우에 대한 국헌문란선동혐의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했고, 5일 저녁 시경 사찰계 분실장을 비롯한 수사관들이 이를 집행 끝에 교정부 선반 위에 올려져 있던 사설, 「여적」 등 최근 40여 종의 원고뭉치가 압수되었다. 그러나 『경향신문』은 지난번 사설 정정으로 고개를 숙인 것과는 달리 5일자 사설로 「여적」 단평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이 사설은 문제화된 여적 내용에 대하여 “폭력혁명을 선동하거나 암시한 귀절은 추호도 포함되지 않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9일 「여적」 집필자인 주요한 논설위원은 내란예비음모 선동 혐의로 입건되었다. 며칠 뒤 서울시경은 내란선전죄를 적용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발부되지는 않았다. 그 이튿날은 국회개회 예정일이었고 그는 당시 국회의원이었다.
「여적」을 문제삼기 어렵게 되자 서울지검은 27일 「여적」 필자인 주요한과 발행인 한창우를 내란선전죄로 기소하는 한편 이미 끝난 듯 싶었던 1월 11일자 사설을 다시 문제삼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불똥은 창간 14년 가운데 12년 동안이나 사장으로 재임해온 발행인 한창우에 집중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창우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정부와 맞서 싸울 만한 잉크와 종이가 있었고 용감한 언론인과 독자들을 믿고 있었다. 「본지는 기소되었다-언론자유의 중대한 위기」라는 제목의 2월 28일자 사설에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사멸하지 않는 한 우리는 최후의 승리를 확신한다”며 투쟁을 선언하고 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가장 격렬한 야당지에 대한 정부의 폐간조치가 가혹하다고 비판하면서도 『경향신문』의 잇단 허위·과장·오보를 정당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과오는 한 신문을 폐간시킬 만큼 중대한 것은 아니었으며 더구나 미군정 하에서 좌익신문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군정법령 제88호를 건국한 지 12년이 지난 1960년에 처음으로 썼다는 점이다.
『경향신문』은 1946년 6월 24일 허가번호 제55호로 미군정 하에서 발행이 허가되어 1959년 4월 30일 폐간되었다. 『경향신문』은 이승만대통령이 4·19 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던 날에야 복간되었다. 그것도 정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형식상으로는 대법원의 『경향신문』에 대한 행정처분집행정지 결정 때문에 소생될 수 있었다./ 김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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