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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단지(廣州團地) 사건] ()

(1) 1971년 8월 10일에 발생한 이른바 광주대단지 사건은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파생된 부작용에 대처하는 정부계획의 졸속을 드러내 줌과 함께, 열악한 조건 아래 다수인구가 밀접해 사는 데서 오는 도시적 갈등의 폭발잠재력에 주의를 돌리게 해준 사건이었다. 또한 이 사건은 도시빈민층의 생활실태와 그들의 좌절감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킨 사건이기도 하였다.
광주대단지 폭동사건이 일어난 1971년은 제7대 대통령선거(4월 27일)와 제8대 국회의원선거(5월 25일)를 겪은 해였다. 일반적으로 선거열기가 넘치면 사회통제의 긴장감은 상대적으로 낮아진다. 게다가 선거공약으로 제시된 미래의 밝은 청사진은 유권자들의 기대수준을 올려놓곤 한다. 그에 반해 선거가 일단 끝나면 선거인플레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는 재정긴축과 시중 유동성 자금 환수에 나서곤 하는 것이 상례다. 당시 광주대단지사건에서도 이런 현상이 두드러져 보였다. 광주대단지 이주민에게 부과될 세금을 면제케 하겠다는 집권당의 공약은 많은 선거공약이 그러하듯 선거가 끝난 후에는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선거를 통해 최소한의 정당성을 확보한 공화당정권은 더욱 권위주의적인 통치방식으로 나아가려는 기미를 보였다.
집권세력이 보인 권위주의화 경향의 대극(對極)에는 선거를 치르면서 드러난 민심의 이반현상, 그리고 8월에 일어난 서해안 실미도(實尾島) 주둔 공군 특수부대의 난동사건이나 9월의 한진상사 파월근로자의 KAL 빌딩 난입사건 같은 통제이완현상이 있었음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된다. 집권세력은 느슨해져 가는 사회통제의 고삐를 다시금 죄어야 한다는 당위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광주대단지사건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행정편의를 위주로 하는 도시정책의 명백한 실패를 의미했던 이 사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권력 자체를 압도할 만큼 널리 확산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집권군부세력으로 하여금 권위주의적 통제를 더욱 강화하게 만든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광주대단지는 3년 전인 1968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이 무허가판자집 정리사업의 일환으로 서울시내 18만 채의 무허건물 가운데 5만 채를 헐어버리고, 그 주민을 서울 부근에 새로 조성된 위성도시로 집단이주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 새로운 위성도시가 광주대단지였으며, 사건 이후 성남시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의 계획은 인구 20만 정도의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었는데 70년 봄 양택식 시장이 서울시장으로 부임해 오면서 면적 350만 평의 도시에 인구 35만명을 수용하는 것으로 그 계획이 확장되었다. 이에 소요될 예산만도 269억 원이나 되는 큰 규모의 사업이었다.
문제는 이 엄청난 사업을 1973년까지 단기간에 이루어야겠다는 과잉의욕에 있었으며, 그 의욕에 비해 소요재원 조달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발상은 토지투기가로서의 서울특별시가 보인 진면목을 알게 해주는 것이었다. 서울시는 평당 4백원선에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일대의 땅을 대량으로 수용하여 이를 택지 · 도로 · 상업지구 · 공공기관 건물용 등으로 분할하였다. 서울시는 서울지역 판자촌으로부터 철거해 강제이주시킨 철거민들에게 토지매입과 정지작업에 든 실비(實費)로서 평당 2천원씩에 일가구당 20평씩을 택지로 분양해 주었다.
서울시의 계산에 따르면 철거민을 보내 새 도시를 만들면 땅값이 자연히 상승하여 유보지(留保地)만 팔더라도 투자한 비용을 다 회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시내 중심가 도로변의 유보지는 한때 평당 20만원을 초과할 정도였으며 서울시의 계산이 어느 정도 적중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서울시는 7월까지 유보지를 판 땅값 12억원을 시설투자재원으로 전용했다.
그러나 이 광주대단지 집단이주계획은 워낙 졸속이어서 시설투자재원으로 허점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강제로 이주해 온 철거민들의 생업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게 큰 문제였다. “인구 50만이 넘으면 주민들 서로가 주고받아 먹고 살 수 있는 자급자족의 도시가 된다”는 낭만적 발상에 따라 서울 각처로부터 하루아침에 철거되어 온 인구가 이 사건 당시만 해도 2만 1천 372가구, 10만 1천 325명이었다. 철거민 가운데는 택지분양중인 이른바 〈딱지〉를 불법으로 전매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서울시내 곳곳의 판자촌에 살고 있었을 때는 지게벌이나 노점상 등으로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으나, 황량한 벌판에 이주한 이후에는 그나마 생업 자체가 없으니 이곳에 터잡고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장차 새로운 도시로서 땅값이 오를 것을 예상하고 철거민의 〈딱지〉를 사들인 전매입주자가 6천 344가구, 1만 4천여 명에 이르렀다. 지방으로부터도 무조건 소문만 믿고 몰려든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건 당시 광주대단지에도 15만명의 인구가 이렇다 할 생업이 없이 굶주림 속에 나날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당시 광주대단지에서 을지로 5가까지는 버스로 왕복 3시간, 차비만도 50원이 들었다. 서울지역에 생활기반을 두고 있었던 대부분의 철거민들에게는 교통비마저도 엄청난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주민들 서로간에 주고받으며 자급자족하는 신흥도시가 되리라는 서울시의 예상은 일자리 자체가 마련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그야말로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주민들의 주거환경은 극도로 열악하였으며, 그 많은 인구가 굶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토지투기를 둘러싼 각종 사기 · 협잡, 그리고 폭력 · 절도 등의 범죄행위가 격증했다.
토지분양을 둘러싼 권력형 사기극이 김창숙이란 예비역 대령에 의해 저질러진 것은 광주대단지 계획의 속성을 알게 해주는 일이었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기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김창숙이란 사람은 5 · 16 이후 광주군수를 지내다가 횡령 혐의로 밀려난 예비역 대령이라 한다. 그는 광주단지에서 서쪽으로 10리쯤 들어간 청계산 기슭에 〈모란단지〉를 조성하여 광주단지를 흉내낸 분양증(이를 당시 사람들은 〈딱지〉라 했다)을 대량으로 발급하고 얼마 안가서 종적을 감추었다가 끝내는 검거되고 말았다. 20평 · 30평 · 50평 단위로 토지를 분양한다는 이 〈私딱지〉는 법적 근거도 없는 것이었고, 결국 3천여 세대가 그의 사기극에 놀아나 오도가도 못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그가 〈모란단지〉 발단식을 하고 분양을 할 때는 중앙의 일간지에 대문짝만한 광고를 수없이 냈고, 입주증 발행에 경찰관이 입회하였는가 하면, 당시의 현역 국회의원이 발단식에 와서 축사까지 했다. 김창숙은 헬리콥터까지 세내어 〈모란 단지〉의 합법성을 위장하고 다녔다. 김창숙의 이러한 사기극은 행정권력의 비호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그가 군출신이란 사실은 당시 광주대단지 토지분양을 둘러싼 이권의 배경을 점치게 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외에도 토지분양증인 〈딱지〉를 둘러싼 사기협잡이 수없이 많았으며, 이 과정에서 원래 토지를 분양받아야 할 철거민들은 생의 최극한 상황으로까지 내몰리곤 했다. 전매입주자들이 약간 이득을 보는가 하면 〈딱지〉 거래하는 땅 장사들이나 복덕방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났다. 모두가 토지가격의 상승을 예기하고 이루어진 투기열이었으니, 가히 한국판 〈골드 러시〉라고도 할 만했다.
(2) 광주대단지 폭동의 직접적인 원인은 행정당국의 일방적이고도 졸속한 정책수행에서 찾아진다. 원래 서울시는 철거민 한 가구당 20평씩을 평당 2천원에 분양해 주고 그 대금을 2년 거치 3년 상환토록 했었다. 그런데 이곳에 토지 투기붐이 일면서 전국 각지에서 온 6천 343가구의 전매입주자가 정착하고 있었다는 당시의 통계가 나와 있다.
문제는 서울시와 경기도 당국이 이들 전매입주자들에게 무리한 고지서를 발부한 데 있었다. 즉, 전매입주자는 평당 8천〜1만 6천원에 이르는 땅값을 일시불로 내게 하고, 게다가 단지 안의 모든 주민들에게 취득세 · 재산세 · 영업세 · 소득세 등 조세를 부과했던 것이다. 땅값을 기일 내에 납부하지 않을 때에는 해약은 물론 법에 의해 6개월의 징역 또는 30만원의 벌금을 부과한다는 단서까지 붙였다. 등기도 안된 가옥취득세 또한 1만원에 달했다. 그리고 이러한 고지서 발부가 7월10일〜20일 사이의 일인데, 납부기한은 7월말까지로 되어 있었다. 선거 이후 단지 내 경기의 급속한 후퇴로 주민 대부분이 실업상태에 빠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지서 발부와 납부기한 간의 시차가 이렇게 짧은 것, 그리고 심지어 징역의 위협까지 가한 것 등은 주민들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했다. 7월 17일에 주민대표 184명은 〈불하가격시정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당국에 대하여 불하가격을 1천 5백원〜2천원 사이로 할 것, 세금부과 연기, 긴급구호대책, 취역장 알선 등의 요구사항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당국은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번번이 묵살하였고 그 때문에 주민들의 불만은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을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1971년 8월 10일, 화요일. 억수같이 퍼붓는 비 속에서 5만의 광주단지 주민은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 주변에 모여 11시에 대화하러 오겠다고 약속한 양택식 서울시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11시 45분까지도 도착하지 않는 서울시장에게 또 한번 속았다는 느낌이 주민들 사이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격분한 군중들은 성남출장소를 습격하여 서류와 집기를 불태웠다. 출장소 앞에 세워둔 지프를 불태운 다음 출장소에서 1백여 미터 떨어진 서울시 파견 광주단지 사업소에 가서 기물을 부수었고, 사업소 앞에 세워 둔 빈 트럭을 부근 탄리천(炭里川)에 밀어넣었다. 출동한 소방차 2대와 63명의 경찰들도 중과부적으로 속수무책이었다. 군중은 지나가던 버스 · 트럭 등을 강제로 빼앗아 타고 다니며 대단지 거리를 누볐다.
오후 1시 40분경 서울시경과 소속 기동경찰 7백명이 나타나자 군중들의 흥분은 더욱 가열되었다. 이들은 성남지서를 부수고 경찰백차 1대를 불질렀다. 당일 관용차 번호를 단 차들은 이렇듯 수난을 당했으니, 주민들이 관에 대해 품은 감정의 강도를 알 수 있다.
경찰과 주민들이 여러 시간 빗속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다가 오후 5시반경 양택식 시장이 주민들의 요구조건을 무조건 수락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져 주민들은 해산하였다. 6시간 동안의 도시반란이었던 셈이다. 이날 폭동으로 주민과 경찰 1백여 명 부상, 2천여 만원의 재산피해가 났다. 또 난동에 가담한 주민 23명이 구속되었다. 양택식 시장은 주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을 약속했다.
① 전매입주자의 토지불하가격은 원 철거이주민에게와 같이 평당 2천원선으로 낮춘다. ② 주민들의 복지를 위해 구호양곡을 방출한다. ③ 주민들이 요구한 토지취득세 면제는 경기도 당국과 협의해서 부과를 보류하고, 면세혜택을 입도록 적극 추진하겠다. ④ 공장을 빨리 가동시켜 실업자 구제에 최선을 다한다.
광주대단지 주민폭동의 엄청난 과격성에 놀라고 그 파급효과를 우려한 정부는 일련의 후속 행정조치를 펴서 주민들의 불만을 달래지 않을 수 없었다. 8월 11일에 내무부는 광주대단지를 성남시로 승격시키겠다고 발표하는 한편, 자조근로사업을 펴서 1인당 3.6kg의 구호밀가루를 지급했다. 9월 3일에는 광주대단지와 경부고속도로 서초리 인터체인지를 잇는 도로가 개통되어 서울과의 거리가 40분으로 단축되었다. 9월 28일에 경기도는 성남단지 월동대책에 9억 550만원을 배정했다. 10월 14일에 정부는 서울시 주관이었던 대단지사업을 경기도에 이관, 경기도가 앞으로 3년 동안 56억원의 사업비를 투자하여 성남시를 서울의 위성도시로 개발하도록 확정했다.
광주대단지의 폭동사건은 해방 이후의 최초의 대규모 도시 빈민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급증한 공업화에 따른 도시의 비대화는 필연적으로 빈민밀집거주지역을 낳는다. 도시의 효율적인 개발을 위해 이들 빈민거주지는 상당한 장애요인으로 부각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빈민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 주거환경을 개선케 하지 않고 행정편의 위주로 강제 철거할 때 오는 사회적 저항은 사회질서 유지에 큰 교란요인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광주대단지 사업은 계획 자체로서는 무난한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추진방식이 60년대의 불도저식을 답습하였기 때문에 큰 무리를 범하고 만 것이다.
(3) 끝으로 광주대단지 사건에서 우리는 국가기구의 계급적 속성을 알아차리게 된다. 대단지 주민의 입장에서 볼 때 국가기구는 자신들을 억압하기만 하는 존재였다. 그것은 급속한 도시화 · 공업화 과정에서 잘 사는 사람들에게만 봉사하고, 잘 못사는 사람들에게는 생존의 최후 근거까지도 행정편의를 위해 박탈할 수 있는 압제적 통치기구였던 것이다. 다행히 폭동 이후 정부가 취한 정책은 대단지주민의 생활상의 권익을 옹호하려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제2, 제3의 광주대단지 사건이 70, 80년대를 꿰뚫어 이곳저곳에서 재발해 왔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근년에 이르러서도 목동 철거민 항쟁, 사당동 철거민 항쟁이 두드러져 보인다. 이 두 사건에 있어서도 서울시는 재개발 사업이라는 이름 아래 토지투기와 아파트건립을 통한 영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규모와 방법은 달랐지만, 광주대단지 사건에서 보여준 관의 경직성과 행정편의 위주, 위협적 자세 등은 이들 사건에서도 여전히 드러난다. 지금도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각종의 재개발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요즈음은 다행히 주민들의 자체조직을 십분 활용하여 갈등의 요소를 최소화하고 있으나, 폭발의 잠재력은 상존한다 할 수 밖에 없다./ 최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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