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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居昌)양민학살사건] ()

국민방위군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양민학살사건으로서 1951년 2월 11일 경남 거창군 신원면(新院面)에서 발생했다.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6 · 25 초기 진주 · 마산 · 창원 방면에 진주해 있던 북한 인민군 제2사단과 제6사단의 패잔병들은 지리산 산악지대에 포진, 약 4만명의 병력으로 노령산 맥의 줄기를 타고 순창 · 정읍 · 남원 · 장성 · 구례 등 호남지대와 거창 · 산청 · 함양 · 합천 등에 출몰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는 50년 10월 2일 공비토벌을 위해 육군 제11사단을 창설, 사단장에 崔德新 준장을 임명하 고 사단본부는 남원에 13연대, 광주에 20연대, 진주에 9연대를 배치했다(창설 당시 병력 1만여명). 그러나 공비토벌은 쉽지 않았다. 험준한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하여 기습공격을 가해오는 바람에 산골 마을에는 국군과 공비의 뺏고 빼앗기는 공방이 거듭되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낮에는 정부군이, 밤에는 게릴라가 지배하는 양상이 전개되었다. 거창군 신원면도 그런 지역의 하나였다. 거창읍으로 통하는 한가닥 길밖에 없는 이 고을에 중공군이 대거 남하하기 시작할 무렵인 12월 5일 약 400〜500명 게릴라들이 신원지서를 습격, 경찰과 청년의용대 대부분이 사살되고 10여 명이 간신히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제11사단 9연대(연대장 吳益慶)는 51년 2월 초 거창 · 함양 · 산청 등 지리산 남부지역 공비소탕작전을 펴기로 하고, 함양의 제1대대(대대장 이종태 소령), 하동의 제2대대(대대장 임영호 소령),거창의 제3대대(대대장 한동석 소령)에게 합동작전을 명했다. 이 합동작전에 따라 거창의 제3대대는 경찰과 청년의용대 등과 함께 51년 2월 7일 신원면에 진주했다. 군대가 진주하자 공비들은 아무런 저항없이 산골로 퇴각하였고 제3대대는 경찰과 의용대 병력을 남기고 작전계획에 따라 산청 방면으로 계속 진군했다. 군대가 신원면을 떠나자 공비들은 이 날 밤 다시 나타나 경찰과 교전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경찰병력만으로는 방어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 2월 11일 신원면에 재진주한 제3부대는 대현리 · 중유리 · 와룡리 주민 약 1000여 명을 신원국민학교로 소집, 경찰 및 지방유지 가족을 골라낸 뒤 산골짜기로 끌고 가 집단학살한 뒤 휘발유를 뿌려 불태웠다. 이같은 사건은 10일에도 대현리 · 덕산리 일대에서 행해졌다.
이 사건은 1개월이 지난 51년 3월 12일 육본과 국방부를 거쳐서 그 진상이 국회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국회에서는 진상조사차 합동조사반을 구성, 4월 7일 현장에로 들어가려 했으나 공비로 가장한 군인들의 공격을 받고 철수하였다. 이같은 우여곡절 끝에 사건조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6월 초부터 재개되었다. 헌병사령부는 제9연대장 오익경, 제3대대장 한동석, 동대대 정보장교 이종대 등을 구속,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51년 7월 27일 대구에서 열린 중앙고등군법회의 공판과정에서 제3대대장 한동석, 동 정보장교 이종대는 양민 학살행위를 모두 시인하였으나, 이것은 연대의 작전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그들이 합동작전 때 받은 작전명령에는 부록에, “작전 지역내 인원을 전원 총살하라”고 되어 있었으며, 이 사건이 문제가 되자 제11사단 본부는 원래의 작전명령을 회수하고 “작전지역 내 주민 중 이적행위를 한 자는 간이군법회의에 의해 처단하라”는 내용으로 변조된 작전명령이 내려 보내졌다고 주장했다. 51년 8월 6일 제5회 공판에서 증인으로 출두한 김종원 대령은 작전명령이 변조된 것은 사실이며, 이것은 국방장관과 참모총장으로부터 이 사건을 확대시키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자신이 꾸민 것이라고 밝히고, 합동조사단의 피습사건도 공비의 소행이 아니고 자신이 제9연대 병력을 조사단의 길목에 배치, 습격한 것이라고 진술하여 마침내 김종원은 구속 송치되었다. 51년 12월 16일 선고공판에서 김종원 징역3년, 오익경 무기, 한동석 10년, 이종대 무죄의 언도를 받고 거창사건의 책임추궁은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은 내생적 기반이 약한 이승만 정권의 통치방식에 있어서 테러리즘적 일면을 볼 수 있으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켜 주는 방어 메카니즘의 극단화를 보여준다. 사건은 지시되고 맹종되고 용인되는 것이다. 이같은 〈지시〉와 〈맹종〉〈용인〉의 관계는 군의 권력종속적인 성격을 잘 반영해주고 있거니와 그러한 권력 종속성은 창군에서부터 6 · 25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완성되고, 나아가 군부와 의회의 대립국면을 형성시킨다. 사건의 은폐를 위하여 군이 공비를 가장하여 국회조사단을 공격했다든가 거의 같은 시기에 발생한 국민방위군사건에 국회가 진상을 조사하여 주모자 5명을 사형시켰다는 것은 권력추종의 비이성적인 일부 군부집단에게는 의회의 군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현실화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체제변환을 시도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두 사건을 둘러싼 의회와 국민의 격렬한 비판은 권위주의적인 이승만의 통치방식으로서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건 해결을 위해 그의 추종자들을 의법조치하는 한편 의회의 힘을 약화시키고 의회민주주의의 절차에 대한 실질적 준봉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관제데모를 동원하고 군경을 국회에 진입시켜 간선제로 된 대통령선거법을 직선제로 고치는 헌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소위 부산정치파동이 그것으로서, 이승만(및 그의 추종세력)과 의회의 관계는 그만큼 악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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