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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間島) 및 만주방면 독립군] ()

간도 독립군의 남상은 한일합병을 계기로 하여 급격히 증가한 이주민들과 독립운동가들로 형성되는 바, 그 주류는 합방 직후 무장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1911년 李會榮 · 李始榮 형제와 李東寧 · 李相龍 · 金昌換 · 朱鎭沫 등이 간도 삼원보(三源堡)에 이주, 그곳에서 조직한 민단적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와 부설기관으로 설립한 신흥강습소(新興武官學校 전신) 등이다. 서간도의 대표적인 독립기지이자 독립운동단체로 발전된 이 경학사는 부민단(扶民團) · 한족회(韓族會)로 확대 개편하는 한편 군정서(軍政署, 뒤에 이름을 西路軍政署라 함)를 두고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을 교육,그 졸업생들을 수용하였다. 또한 安昌浩 · 曹成焕 · 李鍾浩 · 李東煇 · 梁起鐸 등이 중심이 된 신민회(新民會)에서도 국외에 독립운동기지 건설이 당면과업이라고 보고 1910년 밀산현 봉밀산자(密山縣 蜂密山子) 부근의 미개간지 10만평을 구입하여 독립운동기지를 세웠다. 신민회는 구한국군 교관들을 초빙하여 밀산현 봉밀산자에 밀산무관학교를 세워 1천 5백여명을 훈련시키고 소련을 통해 소총과 권총 1만 5천 정을 구입했다. 또한 이동휘는 왕청현(汪淸縣)의 나자구(羅子溝) 대순자(大荀子)에 1913년 동림(東林)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했으며 노령의 니콜리스크에도 연해주와 간도지방의 청년 1만명을 모아 군사 훈련을 시켰다. 이밖에도 의병장 출신의 李範倫 · 洪範圖 등이 연길현 명월구(明月溝)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양성했으며, 대종교(大倧教)의 학자 徐一등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창설했는바 金佐鎭은 그 사령관이었다. 이와 더불어 3·1 운동 직후에 창설된 국민회군도 빼놓을 수 없다. 국민회군은 기독교도와 지난날 만주독립운동의 중추세력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단체로서 간도 3·1 운동은 실제로 국민회의 金永學과 馬音·姜鳳羽 등이 주도한 것이었다.
이와같이 간도와 연해주 지방의 신흥무관학교,동림무관학교·ᅳ 밀산무관학교 등에서 배출된 수많은 독립군 병사들은 3·1운동 이후 각지에서 독립군 부대를 편성하여 일본정규군과 대결하여 대승리를 거두는 등 무장독립운동 발전의 기초를 세웠다. 또한 홍범도가 인솔하는 대한독립군과 서로군정서 독립군은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다. 홍범도 부대는 혜산진(惠山鎭) · 갑산(甲山) · 만포진(满浦鎭) 등 국경지방을 공격하여 한 때는 혜산진을 점령했다. 1920년초에는 대한독립군과 군무도독부군(軍務都督府軍)이 연합하여 만든 국민회군과 북로군정서군 등 2천여 명이 국경을 넘어와서 일본군 300명을 사살했으며 평안북도 강계·위성·삭주를 비롯하여 황해도 지방에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이처럼 독립군의 공격에 크게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공격하고 후퇴하는 독립군을 추격하다가 함정에 빠진 경우가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1920년 6월 홍범도· 崔振東 부대를 추격 월경했던 일본군 16사단의 경우였다. 이 무렵의 홍범도의 국민회계는 병력이 약 550명,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계는 670여명이었으며 기관총·소총·권총·탄환도 충분히 비축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미(新美) 중위가 인솔하는 남양(南陽)수비대는 1920년 6월 4일 삼둔자로 독립군을 추격해가다가 전멸당했으며, 이에 19사단이 삼둔자의 패배를 설욕키 위해 월강추격대를 편성하여 가지고 봉오산으로 진입하여 왔다. 홍범도는 일군을 봉오산의 분지로 유인,완전히 들어오자 일제사격을 개시,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 명을 부상시켰다. 이에 당황한 일본군은 만주를 다스리던 張作霖과 협상하여 독립군 소탕작전에 나섰고, 이때 출병한 일본군과 대적, 큰 승리를 거둔 것이 1920년 10월의 청산리전투였다. 이 전투의 주력부대는 金佐鎭·羅仲昭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으로서 그 병력은 이 해에 사관학교를 졸업한 298명을 포함하여 약 1천 6백 명이었고 무기는 소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홍범도가 인솔한 연합부대도 이때 청산리 일대와 이도구 어랑촌 일대에 포진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10월 20일 일본군 토벌대 약 2만여 병력이 청산리 계곡으로 추격해오자 기다리고 있던 김좌진부대는 200여 명의 전위부대를 전멸시켰으며, 22일에는 완루구(完縷溝)에 서 홍범도의 부대가 기습, 400여 명을 살상시켰고,같은 날 어랑촌에서는 김좌 진,홍범도의 양 군대가 연합, 일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청산리전투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 전투에서 일군은 300여 명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청산리 대첩을 거둔 만주지방의 각 독립군부대는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과 재만교포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막기 위해 소련과의 국경지대인 밀산(密山)으로 집결했다. 여기에서 서일·홍범도·김좌진·曹成焕·최진동·李青天 등이 이끄는 부대 병력 약 3천 5백 명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밀산지방이 독립군의 근거지로서는 부적당하다고 판단한 그들은 곧 50만의 교포가 사는 노령 연해주의 이만으로 이동했다. 이만은 하바로프스크의 러시아 적군과 블라디보스톡에서 스파스크에 이르는 지대에서 주둔한 일본군과의 완충지대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곳 역시 여의롭지 못하자 독립군은 일부는 만주로 돌아가고 일부는 자유시로 옮겨갔다. 그런데 마침 자유시는 이동휘계의 한인사회당 세력과 러시아 귀화인이 중심이 된 대한국민회가 기득권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으로 온 독립군들이 한인사회당과 합세하는 듯하자 최고려 · 오하묵이 이끄는 대한국민회 및 자유대대는 독립군을 포위, 무장해제시키고 일부를 적군에 편입시켰으며 나머지 일부는 연해주 · 만주 지방으로 되돌려보냈다.
일본군의 간도지방에서의 학살과 자유시 사변 등으로 만주 ·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은 한 때는 매우 침체되었으나 1922년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 계통이 먼저 통합에 나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조직했고, 이어서 이를 다시 확대 발전,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했다. 대한통의부는 통화현(通化縣)과 집안현(輯安縣)을 중심으로 중앙조직과 지방 행정조직을 갖추어 이 지역 교포사회를 바탕으로 한 정부형태를 갖추는 한편, 대한통의부 의용군이란 군사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한통의부는 내부 분열이 생겨 일부 세력이 의군부(義軍府)로 분리되고, 다시 통의부 의용군 중심으로 상해임시정부와 연결하여 참의부(參議府)를 만들어(1923) 집안현을 중심으로 한 교포사회를 통할하는 일종의 자치정부 역할을 하였다. 또한 참의부 성립 후 대한통의부 · 대한독립단 등이 중심이 되어 정의부(正義府)를 발족시켰다(1925). 金東三 등이 주도한 정의부는 그 통치구역을 하얼뻔과 간도선 이남의 만주 전체로 했는데, 실제로는 길림성과 봉천성에 거주하는 교포들을 통치하였다.
이리하여 남만주지방의 교포사회는 정의부와 참의부가 통치하고, 북만주와 북간도 일부 지역은 자유시사변 후 만주로 다시 돌아온 독립군을 중심으로 결성된 신민부(新民府)가 통치하였는바, 김좌진 총사령이 이끄는 신민부의 군사위원회는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였다.
참의부 · 정의부 · 신민부는 일본의 세력이 강하게 미친 북간도 지방을 제외한 전체 만주의 교포사회를 3분하여 통치한 사실상의 3개 정부였으며, 3·1 운동 이전의 각 독립전쟁 기지를 한층 더 발전시켰다. 또한 이들 3부는 모두 민주공화제를 정체로 하고 3권이 분립된 정부기구를 갖추고 있었음은 물론 일부 의무병제를 실시하였으며, 교포 사회로부터 세금을 징수, 정부를 운영하고 독립군을 양성했다. 1925년 상해임시정부가 만주지방으로의 이전 및 독립 운동 노선을 둘러싸고 이념분쟁을 일으켰던 것도 사실은 간도·만주지방에서 무장독립운동의 성과와, 이들 정의부 · 참의부 · 신민부의 재만 한인들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 및 영향력 행사와 독립전쟁 및 공화주의적 자치정부의 설립에 자극받은 바 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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