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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間島)] ()

두만강과 마주한 곳. 북간도라고도 불리우는데, 이는 특히 간도 지방의 동부를 일컫는다.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 경지는 적고 임업이 활발하며 광물 자원이 많다. 비슷한 위치로 만주는 중국 동북 지방을 일컫는데, 요령, 길림, 흑룡강의 동북 삼성(三省)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과 북쪽은 러시아와 접해있고, 남쪽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반도와 접해 있다. 간도를 중심으로 우리 동포가 많이 산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중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한반도와 인접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늘 정치 경제 문화상에서 한민족과 연면한 관계를 가져왔다. 백두산에 「西爲鴨綠東爲土門(서위압록동위토문)」이라는 정계비(定界碑)가 세워진 1712년 후에도 관북지방의 농민들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삶의 근거지를 서북간도로 옮겨 갔으며, 1845년(헌종11년) 청의 성지금입정책(聖地禁入政策)이 풀린 이후에는 더욱 더 한인의 월경개간자(越境開墾者)들이 줄을 지었다. 한인들이 강을 건너가 농사짓는 것은 이제 밀경(密耕)이 아니라 반공식화된 것이었다. 그 후로도 한인의 간도 이민 및 춘경추귀(春耕秋歸) 현상은 날로 늘어나 1903년에 서간도 일대에 거주한 한인 인구수는 남자 23,937명, 여자 21,656명(계 45,593명)에 달하였으며, 1908년에는 89,000명, 1909년에는 109,500명, 1916년에는 203,426명, 1921년에는 307,806명, 1926년에는 356,016명, 1931년에는 395,847명으로 급증, 한인과 만주인의 구성비는 3대 1이었다.
이 이후로도 일본제국주의의 농업수탈과 궁핍화 정책에 의해 간도를 비롯한 만주 이민은 가속되어 갔으며, 일본의 만주침공이 이루어진 1931년에는 한국인들을 만주로 이동시키기 위한 일제의 이민정책에 의해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주로 선만척식주식회사(鮮満拓殖株式會社)와 만주척식주식회사(満洲拓殖株式會社)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한 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1910년으로부터 1927년 현재 추정되는 만주의 한인의 이민수는 839,079명으로 나타나 있는데, 그 중 북간도 및 훈춘(琿春) 지방에 291,400명, 서간도 지방에 178,263명, 동청철도 연선 및 그밖의 지역에 369,418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또한 고승제의 연구에 따르면 1927년 말에서 1930년 말에 이르는 3년간에 한국이민수는 558,280명에서 607,119명으로 되어 48,839명의 증가를 보이고 있으나 1933년 말에서 1936년 말의 3년간에 한국 이민수는 677,794명에서 888,181명으로서 무려 214,387명의 증가를 보이고 있다. 만주사변 이전의 3년간에는 연평균 16,279명이었던 것이 만주국 수립후에는 71,462명으로 5배 가까운 증가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1929년 한반도에 거주하는 일본인 호수가 127,300호 인구수 488,487명이었던 것이 만주국 성립 연후에(1933년도) 호수 135,707호, 인구수 543,104명, 1938년에 호수 158,843호 인구수 633,320명의 증가율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면을 보여준다. 한국인은 만주로 강제이민 가고 일본인은 한국으로 이주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한국인의 강제이민은 조선총독부가 국가정책으로 결정한 것으로서 1936년에는 이를 위한 선만척식주식회사를 특수회사로 설립하고 한국농민의 만주이민사업을 전담하였다. 이 계획에 따르면 15년간에 걸쳐 한국 자작농가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11,000호를 만주에 이주시키고 소작농가 또한 39,000호를 이주시킬 계획이었다. 이리하여 1970년에 발행된 한 통계에 따르면(『東亞年鑑』) 1945년 6월 현재의 재만 한인수는 2,163,515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간도를 중심으로 한 만주 일대의 한인들의 사회적 성격은 이민의 시기에 따라서 각기 다르다. 이는, 「최근간도사정」 등을 비롯한 여러 자료에 의해 정리해 보면, 한일합병 이전은 관 및 지주들의 가혹한 착취에 따른 민중의 궁핍화에 의해서 살길을 찾아 월경, 농사를 지었으나 한일합병 이후에는 간도(내지 만주)를 군사기지화하기 위한 항일 유생계층, 기독교 인사들이 이주했고,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에는 총독부 이민정책에 의해 농민들의 만주 이민이 강제적으로 대거 행해진 것이다. 따라서 간도 내지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은 이들 상이한 계층의 이해와 밀접한 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간도를 군사기지화하기 위한 항일 유생계층 및 기독교 계층이 보수 민족주의적 성질을 띠고 있다면 그 이전의 월경농민이나 1930년대의 총독부에 의한 강제농업이민은 反日적이면서 또한 反보수적·사회주의적 성격을 구조적으로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회영 · 이시영 · 이상룡 · 이동녕 · 홍범원을 비롯한 초기독립운동가와 기독교 세력, 국민회 및 군정서가 1920년대 후반에 세력 기반을 잃게 된 반면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 주류를 이루게 되는 사회적 배경이 있는 것이다. 1930년 초 일제는 재만 한인회의 成人중 열에 하나는 “공산당원이거나 그 동조자”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이는 간도의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 나아가서는 재만한인의 사회적 성격만으로써 해명될 수 없다. 그것은 간도 내지 만주에서의 그들이 현재 처한 삶의 현실적 조건과도 밀접히 관련된다. 처음 재만한인들은 뛰어난 수전(水田)경작 기술 때문에 은근히 환영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민수가 늘어나고, 개간 토지에 대한 소유권 문제가 발생, 양국민은 물론 양국관계도 대립 국면을 보이게 되었다. 이리하여 조선정부는 이범윤을 북변간도 관리사로 임명, 개척한인의 보호에 힘썼으며, 노일전쟁 이후 조선의 외교·재정·경찰권이 일본에 넘어가자 1907년 통감부는 용정촌에 간도 파출소를 설치하고 개척 한인의 문제를 취급하였다. 그러다가 당시 재만한인들은 극심한 경제적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1909년 일본과 청국(淸國)정부 사이에 체결된 간도협약(間島協約)에 의해 한국인은 간도에서의 토지와 재산에 대해 중국인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 받았다. 그러나 간도를 제외한 만주지역에서 한국인들은 중국에 귀화하지 않는 한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다. 당시 간도지방에서조차 중국인의 23.7%만이 순소작농(純小作農) 내지 자소작농(自小作農)이었던 반면, 한국인의 경우 전체의 56.6%가 이에 해당되었다.
또한 만주의 한인 농민들이 겪어야 했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중국관헌들의 탄압이었다. 1925년 이전에는 이같은 상황은 없었다. 당시 중국당국은 한국 민족주의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재만한인들이 점차 일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아니라 일제권력 그 자체로 비춰짐에 따라 이같은 우호적인 관계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일제당국은 재만한인의 1/10이 ‘친공산주의적’이었다고 보고 있는 반면 중국인들은 9/10가 ‘친일적’ 내지 일제침략의 편리한 도구라는 데 주목했다. 재만한인사회가 발전할수록 만주의 일본경찰과 영사관 관원의 수는 증가했다. 때로는 ‘충성스러운’ 한인을 보호하고, ‘불령선인(不逞鮮人)’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일제는 군대를 파견하기조차 하였다.
1925년 장작림의 봉천정부(奉天政府)와 조선총독 사이에 불령선인 문제를 골자로 하는 협정(소위 三失協定)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 의해 일제는 봉천정부의 적극적 협력에 대한 대가로 한국 독립운동가가 체포될 때마다 중국측에 보상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그 결과, 재만한인의 민족주의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으며, 정치문제에 개입하지 않은 많은 한국인들조차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중국관헌들은 ‘불령선인’을 색출하라는 지시를 권력남용의 면책특권으로 사용했다, 급진주의자를 탄압한다는 명목으로 중국관헌들은 무고한 농민들을 학살·체포하고 괴롭혔으며, 그들로부터 많은 ‘벌금’을 징수하거나 토지를 약탈한 것이다.
이같은 환경은 한인 공산주의운동이 발전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되어 주었으며, 그 위에 만주의 지형적 조건은 더욱 공산주의 운동에 중요성을 부과했다. 북동쪽으로는 소련, 서쪽으로는 중국, 남쪽으로는 한국과 접해 있는 만주는 처음에는 동북아시아를, 나아가 전세계를 소용돌이 속에 휘몰아넣은 정치·군사적 투쟁의 요충지로 되어 갔으며, 그 중에서도 간도는 함경도의 유격대의 후방기지가 됨과 동시에 홍원·재천·영천·영명의 적색농조가 30년대 말까지도 투쟁을 계속할 수 있게 한 동력이 되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은 1933〜1936년 간의 동만주 공산주의 운동의 현황에 관한 일제의 통계가 강력히 시사해 준다. 간도의 공산주의는 1930〜32년의 당과 그 외곽단체에 대한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존명되었으며 1933〜34년 간의 당원수는 대략 500명이었다. 그러나 그 당원들은 대부분 소련지역 내에 설치된 혁명위원회 내에서 활동하였거나 그것도 대부분 젊은 공산주의자였으리라 추측된다(고참 당원들은 살해되었기 때문). 표 1, 2에도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공산당원 외에 외곽 단체 숫자까지 합하여 볼 때 1933년도에 13,770명, 1934년도에 4,650명, 1934년도에 3,204명으로 해마다 1천명 이상의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으나, 반일회(反日會)의 극심한 감소에 비해서 인민혁명군은 증가되어 가고 있다. 이로 볼 때 일제가 간도 한인을 대부분 공산주의자로 본 것은 민족주의자들은 물론 반일적인 성향의 인사까지 포함시켰음에 틀림없다.
간도는 해방 후 중공의 치하에 들어갔으나 한국인의 자치구가 되었다. 이른바 “연변자치국”이 그것이다. 이 지구에는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의 풍습도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1920년 이후 만주의 한국인 증가표

년 도 재만조선인 수
1920 459,427
1921 488,656
1922 516,865
1923 528,027
1924 531,857
1925 531,973
1926 542,185
1927 558,280
1928 577,052
1929 597,677
(자료: 『조선경제도표』, P.53)


〈표 13〉재간도(在聞島) 공산주의자 현황

종 별 1933년 9월 1934년 4월 1934년 12월
공 산 당 580 360 465
공 청 830 418 731
반일회 11,800 2,960 912
인민혁명군 560 920 1,096

자료 : 간도총영사의 보고, 「满洲共産匪の研究』, P.96에서 재인용
■ 인접어

9월총파업과 10월항쟁
9월테제
가곡원류 歌曲源流
가쓰라-태프트 밀약 桂-Taft 密約
가트GATT (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간도(間島)
간도(間島) 및 만주방면 독립군
간도 5 · 30 사건 間島五三十事件
간도間島(젠다오)
간도공산당사건 間島共産黨事件
간도국민회 間島國民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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