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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 ] (alienation)

마르크스적 의미에서 인간, 집단, 제도 혹은 사회가 ⑴ 그 자신의 행위의 결과나 혹은 산물(그리고 행위 자체)에 대해서, 그리고 (혹은) ⑵ 스스로가 그 속에서 생존하는 자연에 대해서, 그리고(혹은) ⑶ 다른 인간에 대해서, 그런가하면―게다가 ⑴부터 ⑶까지의 전부 혹은 어느 것이든지를 통해서―또한 ⑷ 그 자체에 대해서(그 자신의 역사적으로 창조된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서) 소원하게 하는 행위 (혹은 소원하게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소외는 항상 자기소외, 즉 자신(자신의 행위)을 통한 자신(그의 인간적 가능성들)으로부터의 자기(그의 자아)소외이다. 특히 이 자기소외는 소외의 여러 형식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다름 아닌 소외의 본질이며 그 기본적 구조이다. 한편, '자기소외'는 단순히 하나의 (서술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것은 세계의 혁명적 변화(탈소외)에 대한 호소이며 요청이기도 하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중심 개념으로 간주되며, 또한 마르크스주의자나 비마르크스주의자 모두에 의해서 널리 사용되는 소외 개념은 20세기 후반부에 와서야 처음으로 철학사전에 수록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철학적 용어로서 인정되기 이전에도 소외 개념은 철학 영영 이외에서 폭넓게 사용되어 왔다. 즉 일상 생활에서는 옛 친구나 동료에게서 떠난다거나 격려된다는 의미에서, 경제나 법률에서는 소유한 사람이 자기 것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한다는 의미에서(즉 매매, 절도, 선사 등을 통하여), 의학이나 정신의학에서는 정상으로부터의 일탈, 정신이상 등의 이름으로 사용되어 왔다. 또한 이 소외 개념이 마르크스에게서 반철학적인(혁명적인) '개념'으로 발전되기 전에 이미 헤겔과 포이에르바하에 의해서 철학적인 개념으로 발전되었다. 헤겔은 소외 문제를 발굴해 내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적 선구자들과 접할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소외를 헤겔적인(혹은 마르크스적인) 의미와는 동떨어지게 사용한 경우도 있었고, 혹자는 그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으면서도 그러한 관념만을 사용한 경우도 있었으며, 또한 어떤 경우에는 그 관념과 용어 사이에 일치점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기독교의 원죄와 구원의 이론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인간의 소외와 탈소외라는 설화에 대한 첫 번째 설명 중의 하나로서 간주되어 왔다. 어떤 사람은 소외의 개념이 서양사상의 테두리에서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우상숭배의 개념에서 최초로 발견된다고 주장하였다. 헤라클레이토스에 있어 인간과 로고스의 관계도 또한 소외라는 말로 분석될 수가 있다. 그리고 절대정신의 자기소외된 형식으로서의 헤겔의 자연관의 근원은 플라톤의 이데아라는 숭고한 세계에 대한 불완전한 그림으로서의 자연적 세계관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근대에 와서는 소외라는 용어와 그 불명료함은 특히 사회계약 이론가들에게서 발견된다. 그리하여 그로티우스는 주권이 한 사람으로부터 타인에게로 양도되는 데 대한 명칭으로 소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하여간에 이들이 그 용어를(그로티우스와 같이)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간에(홉스나 로크와 같이), 바로 사회계약의 이념은 조심스럽게 구분될 수 있는 부분적인 소외를 통한 탈소외로의 진전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시도(더욱 자유를 성취하거나, 최소한 안전을 확보하려는)로 해석될 수가 있다. 이러한 개념을 사용한 선구자들의 명단은 장황하게 나열될 수가 있다. 그러나 헤겔 이전에 그 어떤 사상가도 루소만큼이나 소외와 탈소외라는 용어를 더 잘 해석하고 이해하였던 경우는 없었을 듯싶다. 여러 가지 연관된 사실 중에서 단 두 가지만 언급한다면, 루소가 자연적 인간(l`homme de la nature, l`homme naturel, le savage)과 사회적 인간(l`homme police, l`homme civil, l`homme social) 사이에 그어놓은 대조는 바로 소외되지 않은 인간과 자기소외된 인간의 대조와 서로 비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의지(volonte generale)와 특수의지(volonte particuliere) 사이의 모순에 주목하려는 그의 시안은 자기소외를 제거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간주될 수가 있다. 그러나 루소를 포함한 모든 선구자들의 논의에도 불구하고, 소외의 진정한 철학적 역사는 헤겔과 더불어 시작된다.
소외의 이념이(실정성이란 이름으로) 헤겔의 초기 저작들에서 나타난다고는 하지만, 철학적 용어로서의 그에 대한 명확한 작업은《정신현상학》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리고 소외에 대한 논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정신, 즉 교양'을 다룬 소절에서 가장 직접적이며 집중적으로 행해지고 있는데 실로 이것이야말로 그 책 전체의 중심 개념이며 주도적인 이념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후기 저작에서는 소외에 대한 명확하고 집약된 논의가 행해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엔치클로페디아>>(Encyclopaedia of the Philosophical Science in Outline)와 좀 더 폭 넓게는 그의 후기 저작과 강의에서도 자주 나타나 있듯이, 헤겔의 모든 철학체계는 소외와 탈소외의 이념을 바탕으로 구축된 것이라고 하겠다.
어떤 기본적 의미에서 보면 자기소외의 개념이 헤겔에게서는 절대자에 적용되어 있다. 헤겔의 경우 유일한 실재인 절대적 이념(절대정신)은 바로 소외와 탈소외의 순환과정에 포함된 역동적인 자아인 것이다. 즉 이 역동적 자아는(절대적 이념의 자기소외된 영역인) 자연에서 자기로부터 소외되어 다시 이 자기소외로부터 유한한 정신, 즉(탈소외 과정에서의 절대자인) 인간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자기소외와 탈소외는 이러한 방식으로 절대자의 존재 형식을 이룬다.
이와 또 다른 기본적 의미(바로 앞에서 본 기본적 의미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되는)에서 자기소외는 유한적 정신, 즉 인간에 적용될 수가 있다. 인간이 자연적 존재인 한, 인간은 곧 자기소외된 정신이다. 그러나 인간이 (동시에 자연과 인간 자신을 의미하는) 절대자에 대한 합당한 인식을 획득할 수 있는 역사적 존재인 한, 인간은 탈소외된 존재, 즉 절대자의 구성을 성취하기 위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유한정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기본 구조도 역시 자기소외와 탈소외로서 묘사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소외가 인간에 귀속될 수 있는 또 다른 의미를 찾아보아야만 하겠다. 사물을 생산하고, 대상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며 자연적 사물이나 사회 제도 및 문화적 산물 속에서 자신을 객관화 하는 것은 유한적 정신(인간)의 기본적인 특성으로서 이 모든 객관화야말로 필연적으로 소외의 예증이다. 즉 여기서 산출된 대상은 생산자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소외는 오직 그것이 적절하게 인식된 존재라는 의미에서만이 극복될 수 있다.
예컨대 샤흐트(Schaht)와 같은 철학자에 의해 소외의 또 다른 여러가지 의미가 헤겔에게서 발굴되었는 데, 그에 의하면 헤겔이 전혀 서로 다른 두 가지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했다고 결론지었다. 즉 '개인과 사회적 실체 사이에서, 도는 ("자기소외"로서) 개인의 실제적인 조건과 본질적 성질 사이에서 얻어지는 것과 같은 분리나 부정합의 관계'를 의미하는 소외', 그리고 '소외의 극복 및 통일의 재성취와 관련된 특수성과 자의성의 단념이나 굴복'을 의미하는 '소외'와 같은 경우가 그것이다.(Schacht, 1970, p. 35)
포이어바흐는 그의 '헤겔철학 빌판 서문'(1839), 그리고 그 뒤 저서 (<<기독교의 본질>>(1841)과 <<미래 철학의 원리>>(1843)와 같은)에서 자연은 절대정신의 자기소외된 형식이며, 인간은 탈소외의 과정에 있는 절대정신이라고 한 헤겔의 견해를 비판한다.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인간이 자기소외된 신(God)이 아니라, 신이 곧 자기소외된 인간으로서 결국 신은 단지 인간으로부터 추상되고 절대화되고 또 이반된, 인간의 본질일 뿐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 창조하면서 상상된 더 높은 어떤 이질적 존재를 자신 위에 모셔놓고, 노예와 같이 그 앞에서 복종하는 가운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결국 인간의 탈소외는 신으로 받들어지는 인간의 소외된 모습을 제거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
포이어바흐의 소외 개념이 처음에는 헤쓰(Moses Hess)에 의해서 비판되고 개진되었으나, 이보다도 (그 당시에) 헤쓰의 연하의 친구엿던 마르크스(특히 경제학-철학 수고)에서)에 의해서 그와 동일한 노선에서의 비판이 보다 완전하고 깊이 있게 행해졌다. 마르크스는 헤겔이 '과정으러서의 인간이 자기산출, 즉 탈대상화로서의 대상화를 소외이며 또 이 이 소외의 초월로서 ......'(세번쩨 초고) 파악했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헤겔이 대상화를 곧 소외와 동일시 하면서 인간을 자기 자기의식으로서 간주함으로서, 바로 인간의 소외를 인간 의식의 소외로 간주하였음을 비판하였다. '헤겔에 있어서 인간 생활, 인간은 곧 자기의식과 동등하다. 따라서 인간 생활의 모든 소외는 오직 자기 의식의 소외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따라서 소외된 대상적 본질을 다시 획득하는 일체의 활동은 자기의식 속에서의 구체화로서 나타난다."(세번째 초고)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종교적 소외 비판에 동의하였으나, 그는 종교적 소외는 인간적 자기소외의 많은 형식들 가운데 단 한가지일 뿐임을 강조하였다. 즉 인간은 신의 형식으로 자신의 한 부분을 소외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철학, 상식, 예술, 도덕과 같은 형식으로 자신의 지적 활동의 또 다른 산물들을 소외 시킨다. 또 인간은 상품, 화폐, 자본의 형식으로 자기의 경제적 행위의 산물을 소외시키며, 더 나아가서는 국가, 법률, 사회제도 등의 형식으로 자신의 사회활동에서 얻어진 산물들을 소외시킨다. 결국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그의 행위의 산물들을 소외 시키면서, 이 산물들에 대하여 인간이 노예와도 같이 무기력하게, 그리고 의존적으로 관계하는 분리되고 독립적이며 또 위력적 세계의 여러가지 형식들이 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산물들을 소외 시킬 뿐만 아니라, 또 그는 이들 산물이 산출하도록 하는 행위로부터,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자연과 타인으로부터도 자신을 소외시키는 것이다. 이 모든 종류의 소외는 결국 하나로 귀착되는 바, 그것은 곧 인간의 자기소외의 서로 다른 측면, 또는 형식들, 즉 인간의 '본질' 또는 '본성'으로부터의 인간 소외의 서로 다른 형식인 것이다.

소외된 노동은 (1) 인간으로부터 자연을 소외시키고 (2) 자기 자신, 즉 인간 자신의 활동 기능, 생명활동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키므로 이 노동은 유(類)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킨다. ...(3) ...소외된 노동은 인간으로부터 자신의 육체, 외적 자연, 인간의 정신적 생활 그리고 인간적인 삶을 소외시킨다. .......(4) 결국 인간이 자기 노동의 산물, 자기 생명활동, 자기의 유적 생활로부터 소외되는 데서 초래되는 직접적인 결과는 인간으로부터의 인간의 소외이다.......일반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유적 생활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명제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으로부터, 그리고 또 양자가 다같이 인간 생활로부터 소외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과 자연으로부터의 인간의 모든 자기소외는 인간이 타인과 자기 자신, 그리고 자연 사이에서 가정하는 관계에서 나타난다. (<경제학-철학 수고>, 첫번째 초고)

소외의 (정체를 드러내는) 비판이 곧 마르크스가 목적한 바 그 자체는 아니었다. 그가 목표했던 것은 "인간의 재통합(reintergaration), 곧 인간의 자기복귀와 인간의 자기소외의 지양, 즉 인간의 자기소외로서의 사적 소유의 적극적 지양, 그럼으로서 또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적 본질의 현실적 획득(같은 책, 세번째 초고)으로서 이해된 공산주의 실현과 급진적 혁명으로의 길을 여는 것이었다. 비록 소외와 탈소외라는 용어가 마르크스의 후기 저작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지만, <<자본론>>을 포함한 그의 모든 저작들은 실존하는 소외된 인간과 사회에 대한 비판, 그리고 탈소외에의 요청을 제시하고 있다. 그 밖에 적어도 소외라는 전문용어가 폭넓게 활용되고 있는 후기 마르크스에 의한 하나의 위대한 저작, 즉 <<요강>>을 들 수가 있다.
1932년에 처음 출판된 <<경제학 및 철학 수고>>와 <<요강>>(1939년에 처음으로 출판)이 실제로 독자에게 접근 가능해진 것은 그것이 1953년에 재출판된 후의 일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아마도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10여년 동안 마르크스에 관한 모든 해석에서(그리고 전반적으로 철학적 논의에서) 소외와 탈소외 개념을 등한히 하게 된 주된 '이론적' 이유(물론 그밖의 실제적인 이유도 있지만) 중의 하나였다고 하겠다. 소외의 몇 가지 중요한 측면들은 최초로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물화라는 용어로 논의되었지만, 그러나 이 책에서는 소외에 대한 일반적이고 명확한 논의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결국 그러한 논의는 1932년 <<경제학-철학 수고>>의 출판 이후에야 비로소 시작된 셈이다. 마르쿠제(1932)는 <<경제학 및 철학 수고>>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소외 개념에 주의를 돌리게 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꼬르뉘(A. Cornu)(1934)는 더욱 자세하게 '청년 마르크스'를 연구한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아마도 르페브르(H. Lefebre)(1939)는 소외 개념을 이미 출판된 마르크스주의 해석에 도입하려고 노력했던 최초의 인물인 셈이다.
소외에 대한 더욱 광범위하고 열띤 논의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시작되었다. 그 논의에 참석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마르크스주의자는 물론 실존주의자와 인격주의자들(personalists), 그리고 또한 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심리학자(특히 정신분석학자), 문학비평가, 그리고 작가들까지 포함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사람들 중에서 특히 하이데거(Heidegger)는 소외 개념의 논의에 중요한 자극을 주었다.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 1967)에서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의 불확실한 양식의 근본 성질 가운데 하나를 묘사하기 위하여 '소외'(Entfremdung)를 사용하였으며, 1947년에 이미 그는 소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존재와 시간>>(1967)에서 그는 '고향상실성'(Heimatlosgkeit) 개념을 사용하였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도 역시 마르크스의 자기소외와 하이데거의 존재 망각(seinsvergessenheit) 사이의, 그리고 마르크스의 혁명과 하이데거의 회귀(回歸, Kehre) 사이의 우사성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자신의 실존주의적 내지 마르크스주의적 발전 과정에서 다같이 '소외' 개념을 사용한 사르트르(Sartre)도 중요한 자극을 주었고, 틸리히(P. Tillich)의 경우에도 소외 개념은 프로테스탄트 신학, 실존 철학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을 통하여 두드러진 역할을 담당하였다. 꼬제브(A. Kojeve)는 청년 마르크스로부터의 통찰력에 힘입어서 헤겔을 해석하였으며, 이뽈리트(J. Hyppolite)는 헤겔과 마르크스에서의 소외를 (그리고 소외와 대상화의 관게를) 논의하였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입각한 깔베(J. Y. Calvez)의 마르크스 비판은 소외의 서로 다른 형식들의 비판으로서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전체적인 해석에 근거한 것이었다. 또 바르트(H. Barth)는 진리와 이데올로기의 분석에 소외에 대한 상세한 논의를 포함시켰다.
마르크스주의자 중에서는 루카치가 헤겔(특히 청년 헤겔)과 마르크스에서의 소외를 연구하면서 자신의 소외개념을 (그리고 물화와의 관계를) 구체화 하는데 힘썼다. 소외 개념에 대하여 특별히 역점을 두지 않고 그 개념을 사용한 블로흐(Bloc)는 소외와 이질화(Verfremdung) 사이에 분명한 구별을 짓고자 하였다. 프롬(E. Fromm)은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을 조심스럽게 연구하였음은 물론, 그것을 자신의 사회학적, 심리학적 그리고 철학적 탐구의 핵심적인 분석 도구로 삼았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마르크스의 소외이론을 부활시키고 또 발전시키고자 시도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관념론과 헤겔주의의 탓으로 신랄한 비판을 받았는데, 그러한 비판은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에 대한 기존의 (스탈린주의적) 해석을 이끌어 온 대표적 인물들에 의하여,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른바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 (예를 들어 알뛰세와 같은)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소외 이론에 대한 이들 반대자들은 전기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소외로 불리는 것은 후기에서 사유재산, 계급지배, 착취, 분업 등의 과학적 용어에 의해 더욱 적절하게 묘사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외와 탈소외 개념은 이를 대체하기 위해 제시되는 그 어떤(또는 그 모두의) 개념으로의 충분한 환원도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참다운 혁명적인 마르크스 해석에 따르면 소외 개념은 필요불가결한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논쟁의 결과로서 아직도 소외라는 용어의 용법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숫자는 상당히 감소되었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는 많은 사람들도 비역사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자기소외 개념을 수용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소외 개념은 고착된, 그리고 변화하지 않능 인간의 본질 또는 본성이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인간성).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는 실제적이거나 이상적인('규범적인') 인간의 본성으로부터의 소외로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창조된 인간의 가능성들, 특히 자유와 창조성에 대한 인간의 능력으로부터의 소외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다라서 인간에 대한 고정적이며 비역사적인 견해 대신에, 자기소외의 관념은 인간의 항구적인 부활과 발전에의 외침이 된다. 이러한 점은 캉그르가(Kangrga)에 의해서 강렬하게 논의되었는 데 즉, 그는 자기소외된다는 것은 "그 자신의 작업(work), 자기행위(self-activity), 자기창조(self-creation)의 주체로서의 자신으로부터 자기소외됨을 뜻하며, 또 인간의 실천과 산물로서의 역사로부터 소외됨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마르크스 저작에서의 소외의 문제' 1967, p. 27). 따라서 '인간은 그가 생성된 인간이 아닐 때, 소외 또는 자기소외된다'. 그리고 이것은 있는 것과 있엇던 것이 확실한 것으로, 그리고 유일한 진리로서 간주될 때, 또는 인간이 '기존의 세계 안에서' 일하고 '실천적이며 비판적으로 (혁명적인 방법으로) 적극성을 띠지 않을' 때 일어난다......(같은 책)
그 밖에 논의의 여지가 있는 문제로는 소외는 무엇보다도 먼저 개인에게 적용되는가, 아니면 전체로서의 사회에 적용되는가에 관한 것이다. 개인에게 먼저 적용된다고 보는 사람들에 따르면, 개인이 그가 살고 있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그의 소외에 대한 표시라고 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예를 들어 <<건전한 사회>>에서의 프롬) 사회 또한 병들고 소외될 수 있는 까닭에 기존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개인 그 자신이 필연적으로 '소외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소외를 개인에게만 적용될 있는 것으로서 간주하는 많은 사람들은 소외를 더욱 좁혀서 마음의 상태 또는 감정의 탓으로 돌리는 순수한 심리학적 개념으로 삼았다. 따라서 에릭 조셉슨과 메리 조셉슨에 따르면 소외는 '자아와 타인과 그리고 세계로부터 분리된 개인적인 감정, 또는 상태'라고 한다(Josephson, Eric and Mary eds. 1962, p. 191). 다른 사람들은 소외는 단순히 감정이 아니라, 그것은 무엇보다도 객관적 사실, 즉 존재 방식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오구르초프(A. P. Orgutsov)는 소련 <<철학사전>>에서 소외를 '인간의 행위와 그 결과가 인간을 지배하여 또 인간에게 적의가 있는 독립적인 힘 속으로 객관적으로 변형되는 것을 표현하며, 또한 능동적으로 주체의 사회과정의 대상으로의 인간의 변형에 일치하는 철학적 내지 사회학적 범주'라고 정의하였다.
'소외'를 마음의 상태라고 규정짓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그것을 정신 병리학의 사실이나 개념으로 간주한다. 그 외의 사람들은 비록 소외가 '좋은', 또는 바람직한 것은 아닐지라도 엄격하게 병리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종종 서로가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동일한 개념은 아닌, 아노미(anomie)와 인격해체(oersonal disorganization)는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고 부언한다. '소외는 소원(疏遠)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분류는 저마다 장단점이 있다. 따라서 그러한 형식들의 완전한 목록을 작성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분류가 이루어지는 데 (또는 실제로 만들어져 왔지만) 따르는 근본적 기준을 명료화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광범위하게 논의되어 왔던 문제는 자기소외가 인간의 근본적이며 항구적인 소유물인가, 아니면 인간 발전의 역사적 단계에서 나타나는, 단지 하나의 특질일 뿐인가에 관한 것이다. 어떤 철학자들은(특히 실존주의자들은) 소외가 인간 실존의 영원한 구조적 요소라고 주장하였다. 즉 인간은 그의 확실한 실존 외에. 또한 불확실한 실존도 거느리는 까닭에 인간이 언제든 확실하게 살아 있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환상이다. 반대 견해는 원초적으로 자기소외되지 않은 인간이 발전단계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지만, 미래에 다시 자신으로 되돌아 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엥겔스 오늘날의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난다. 마르크스 자신은 인간은 이제까지 항상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 듯 하다.
탈소외화로서의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를 받아들였던 사람들 가운데도 탈소외의 가능성, 한계 및 형식에 대해서는 서로 다는 의견이 있었다. 한쪽 편에서는 절대적인 탈소외는 가능하며 모든 소외-사회적이거나 개인적인-는 단호하게 종식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낙관적 관점을 지닌 가장 급진적 대표자들은 모든 자기소외는 이미 사회주의 국가에사 원칙적으로 제거되었으며, 그것은 개인적 정신착란이나 무의미한 '자본주의의 찌꺼기'로만 남아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러한 견해에 맞추어서 문제를 보는 것은 어렵지는 않다. 절대적 탈소외은 오직 인간성이 단번에 주어지는 듯한 어떤 것이나, 불변적인 것일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또 사실적 견지에서도 '사회주의'로 불리는 것 안에 '낡은' 소외는 물론이고 많은 '새로운' 형태의 소외가 존재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따라서 그와 같이 절대적인 탈소외를 옹호하는 입장에 반하여 오직 상대적인 탈소외만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모든 소외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모든 소외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자기소외되지 않은, 즉 참으로 인간 개개인의 발전을 고무하는, 근본적으로 소외되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기소외의 본질에 관한 견해에 의존함으로서 소외의 극복을 위해 요구되는 수단들도 또한 다양하다. 자기소외를 '심리적'인 사실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환경'안에서의 외부적 변화의 중요성이나 그러한 관련성까지도 논의하면서, 개인의 도덕적 노력, 즉 '자아 안에서의 혁명'이 유일한 치료법이라고 제안하였다. 그런가 하면 또 자기소외를 신경증상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일관되게 그에 대한 정신 분석학적 치료법을 제공한다. 이와는 반대편에서 '경제적 결정론'이라고 불리는 마르크스주의의 퇴보된 변형에 터전을 두고 있는 철학자 및 사회학자들은 개인을 곧 사회적(그리고 특히 경제적) 조직의 수동적 산물로 간주한다. 그러한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하면, 탈소외의 문제는 사회변형의 문제로 환원되고 사회 변형의 문제는 다시 사유재산의 폐지 문제로 환원된다.
이상 두 가지 견해 모두에 반대되는 세번째 개념은 사회의 탈소외와 개인의 탈소외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 가운데 어느 한 가지 없이는 어느 것도 이루어질 수 없고, 또한 어느 쪽도 다른 한쪽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제안으로 나타났다. 결국 탈소외화된 개인의 발전에 적합한 사회체계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러한 개인들을 자동적으로 산출하는 사회를 조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인은 오직 그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만 소외되지 않은, 자유롭고 창조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의 탈소외와는 단지 사회의 탈소외로만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그야말로 사회의 탈소외도 역시 다른 모든 영역이나 인간 생활의 모든 양태 속에서의 변화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수반되는 경제 조직상의 변화로서만 단순하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이루는 영원한 사실과는 거의 무관하게 상로 독립적인 갈등영역(경제, 정치, 법률, 예술, 도덕, 종교 등)으로의 사회분화와 경제적 영역의 우월성은 바로 마르크스에 있어서 자기소외된 사회의 특징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의 탈소외화는 서로 다른 인간 행위 상호간의 소외의 제거 없이는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경제 생활의 탈소외화 문제도 사유재산의 단순한 폐지에 의해서 해결될 수는 없다. 사유재산의 국가재산으로의 변형은 노동자나 생산자의 상황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경제 생활의 탈소외화는 또 국가재산의 폐지, 즉 실제의 사회재산으로의 변형을 필요로 하며, 특히 여기서는 사회생활 전체를 직접 생산자의 자주관리 토대 위에 조직하지 않고서는 성취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생산자의 자주관리가 경제 생활의 탈소외화의 필요조건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곧 그 자체로서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것은 분배와 소비에서의 탈소외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으며, 심지어 그것만으로는 생산의 탈소외를 위해서도 충분한 것이 아니다. 생산에서의 소외의 몇 가지 형태는 현대적 생산수단의 본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형식들은 생산관리면에서의 단순한 변화만으로는 제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관련자료]
Fromm, Eric 1961: marx's Concept of man.
Israel, Jochim 1972: Der Begriff Entfremdung.
Joseph, Eric and Mary eds. 1962: Man Alone: Alienation in Modern Society.
Kangrga, Millan 1967: "Das Problem der Entfremdung in Marx's Werk'.
Mészáros, Isrván 1970: Marx's Theory of Alienation.
Ollman, Bertell 1971(1976): Alienation: marx's Concept of Man in Capitalist Society.
Petrović, gajo 1967: Marx in the Mid-Twentieth Century.
Schacht, Richard 1970: Alienation.
Schaff, Adam 1980: Alienation as a Social Phenomenon.
Vranicki, Predrag 1965: 'Socialism and the Problem of Alienation'. In Erich Fromm ed. Socialist Hum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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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jjmarx (2004-07-12 15:4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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