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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 (sociology)

마르크스 사후, 사회학이 학문의 한 분야로서 확립되기 시작한 시기에,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사회이론과 사회학 사이의 밀접하면서도 다소나마 적대적인 관계가 시작되었다. 틀림없이 마르크스주의는 사회학 형성 그 자체에 중요한 자극이 되었다. 유명한 저서《공동사회와 이익사회》(1887)의 서문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발견자로 묘사된 마르크스에게서 영향을 받았음을 스스로 인정한 퇴니스[Tonnies]는 자신이 새로운 개념으로 표현하려 했던 현대사회에 관한 똑같은 생각을 공식화하는 데 주력했다. 1894년 제 1차 국제 사회학회의에 참석한 여러 나라 학자들(그들 중에는 퇴니스와 러시아의 코발레프스키[Kovalevsky]가 있었다)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다룬 논문들을 발표했다. 이 시기는 또한 현대 사회학의 창시자인 막스 베버와 에밀 뒤르껭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반대 입장에 서서 상당한 정도의 다른 방법을 구사하여 새 분야의 영역과 원리들을 확립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마르크스주의와 현대 사회학의 관계는 막스 베버의 경우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즉 자본주의의 기원과 발달에 관한 실질적 연구와 국가, 계급과 계층,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에 관한 분석에서뿐만 아니라, 사적 유물론에 대항하는 방법론적 저작에서까지도 그의 연구는 광범위하게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보다 정도 상으로는 덜하겠지만 뒤르껭 역시 마르크스 이론에 몰두했다.(그가 창간하고 발행한)《사회학 연보》(Annee Sociologique)는 초기 서평에서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에 깊은 주의를 기울였다. 1895년, 뒤르껭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포괄적인 고찰을 목적으로 하였던(비록 목표에 이르기 전에 중단되었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고, 그의 마지막 저서(1912년)에서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사적 유물론에 의해 제기된 '전(全)사회적 해석'과 자신의 개념을 구별하기 위해 노력했다.
19세기 말에 실재적이고 독자적인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의 논문이 나왔다. 프랑스 혁명에 관한 카우츠키의 연구(1889)를 비롯하여 예술과 문학, 관념의 역사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과학의 기초를 닦았던 메링의《레싱 전(傳)》(1893)과《사회의 생성》(1895)에서 쏘렐이 한 뒤르껭 사회학에 대한 비판적 검토, 그리고 노동운동의 역사와 농지연구에 대한 그륀베르크의 초기연구들이 그것이다. 러시아에서는 마르크스의 저작이 보급됨에 따라, 주요 인물인 플레하노프의 등장과 함께, 사회과학에서의 마르크스주의 사조가 강하게 일어났다. 얼마 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사회학파가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의 모습으로 등장했는데, 이 학파의 사상가들은 이후 4반세기동안 자본주의의 발전, 계급구조, 법과 국가, 국민성과 민족주의에 관한 주요한 사회학적 연구 업적을 남겼다.
당시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의 성장은 전적으로 대학 밖에서 일어났고(대학에는 단지 두 '강단 마르크스주의자'인 그륀베르크와 라브리올라가 있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정치운동과 당 조직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마르크스 사상과 학문적 사회학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그 상황은 후에 뢰이스(1932)가 베버와 마르크스에 대한 연구에서 '사회과학은 우리의 실질적 사회와 같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부르주아 사회학과 마르크스주의로 나뉜다'고 명백하게 묘사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에 의해 포위된 노동자 국가의 강령으로 되었던 러시아 혁명 이후에 강화되었다. 1921년까지 부하린은 '사회학의 한 체계'로서 사적 유물론을 묘사하고, 베버나 미첼과 같은 이론적인 사회학자들이 업적을 비판적으로 연구할 수 있었지만, 스탈린의 대두와 함께 사회학은 공식적으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범주화되고 학문적, 지적 대상에서 제외되어 사적 유물론으로 대치되었으며, 추상적이고 독단적인 양식으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도식적 사상은 1945년 이후 동유럽 국가에 강요되었고, 이러한 양상은 1952년에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 사회학이 폐지되었던 중국에서도 역시 일반화되었다.
따라서 1920년대 중반부터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은 소련의 외부와 볼세비키 정통성에 반대하는 곳에서만 발견할 수 있었고, 그것은 서구 마르크스주의로 불려온 일련의 주요 사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극도로 다양한 견해들로 특징지워지기 때문에 단지 하나의 지류일 뿐이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들의 사회학적 연구를 추진하는 한편 코르쉬, 루카치, 그람시 등은 사회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고, 오히려 그것을 역사철학으로 간주했다. 바로 독일이 관념철학이 부르주아 혁명운동의 표현이었던 것과 같이 코르쉬(1923)는 마르크스주의를 '노동계급의 철학',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의 이론적 표현'으로 간주했다. 루카치는 사적 유물론에 관한 부하린의 저술에 대한 서평에서 '변증법은(사회학과 같은) 독립적이고 실제적인 성과 없이도 가능하며, 그 영역은 전체로서 역사과정이고…총체성은 변증법의 영역이다'라고 논하면서, 부하린의 '잘못된 방법론'과 "일반 사회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개념'을 비판했다. 이와 유사하게 그람시도 부하린에 대한 논평에서 '진화론적 실증주의'로서의 사회학을 거부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전체적이고 완전한 세계관을 정립하고, 전체적이고 완전한 문명을 이루는 데 필요한 모든 기본적 요소들'을 그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는 철학적 세계관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은 코르쉬(1938)가 '사적 유물론의 주요 경향은 이미 "철학적"이 아니라 경험 과학적 방법으로 나타나고 있다'(p203)라고 결론지으면서 다시금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는 것에 의해서 입증된다.
사회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다양한 태도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저작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비록 그의 주요한 사상적 측면에서 코르쉬나 루카치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프랑크푸르트 학파, 더군다나 그 학파의 뿌리였던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는 폭넓고 다양한 견해들을 망라했다. 초기에 그 연구소는 그륀베르크의 지도 하에 있었는데, 그의 주된 관심사는 사회사 분야였고 사회학에도 밀접해 있었다. 회원 중에는 사회학자, 정치학자, 경제학자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중에는 프란쯔 노이만[Franz Neumann]도 있었는데 그의《거수(巨獸)》(1942)는 파시즘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연구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이 학파가 '비판이론'의 형식을 띠고 주로 철학적 사상에 의해 지배도기 시작한 것과, '이데올로기 비판'의 형식으로 사회과학에서 실증주의와 대립하게 된 것은 1945년 이후, 특히 1960년대였다. 이 학파는 마르크스 이론을 이데올로기로 취급되는 과학과 기술을 포함하여 문화적 현상의 비판에 집중시켰다. 그러나 최근의 발전에서 하버마스와 오페에 의한, 역사이론으로서의 사적 유물론의 기초에 관한 뛰어난 연구, 선진 자본주의에서 국가개입의 중요성에 관한 연구 등에서 비판이론의 경향은 경제 정치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쪽으로 점차 변화하였다. 1960년대이래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새 접근법이 구조주의의 영향 하에 발전하였다. 주로 알뛰세의 저작으로부터 대두되었지만, 언어학과 인류학에서의 전반적인 구조주의 운동에서 강하게 영향 받은 마르크스주의적 구조주의는, 역사주의라 하여 거부된 역사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문제들과 이념에서 벗어나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그리고 이론상의 '수준'이나 '실례'가 전체 체제 속에서 다양하게 상호 관련되어 있는 '구조'라는 관점에서 사회의 특수한 형태,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분석(비록 고들리에가 공납제 사회 분석에 똑같은 접근법을 사용하였지만)으로 크게 방향을 바꾸었다. 따라서, 풀란차스는 사회계급들과 정치권력 사이의 관계와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쁘띠 부르주아지, 혹은 주안계급의 위치를 구조주의적 용어로 분석한다. 그러나 광범한 구조주의 운동 내에서조차 상당한 다양성이 있으며, 하나의 특징적인 접근법은 골드만의 경우로 그의 '발생론적 구조주의'는 역사적 분석방법과 구조주의적 분석방법을 결합시켰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스탈린적(최근에는 레닌적인) 정통성의 지적 영향력의 급격한 쇠퇴와 1960년대의 '신좌익'의 대두와 함께, 비록 일찍이 사회학파로서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새로워졌다고 하더라도, 비판이론과 구조주의의 이념에 의해 기본적으로 고무된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이 서구에서 다시 부활이 되었다. 이 부활은 전체적으로 지적 생명에 있어 마르크스 이론의 위치에 중요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왜냐하면 189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의 시기에 마르크스주의는 정당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주로 당 조직 내에서(그리고 1917년 이후에는 집권당의 공인된 교리로서) 연구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로 하위문화로서 존재하였던 반면, 이제는 학문적 생명이 확립되고(인류학과 경제학 사상으로서의) 사회학 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 변화의 결과로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은 이제 사회과학의 개념과 방법에 관한 일반적 논쟁―구조주의, 실증주의, 사회변동 등에서 '인간의 행위'의 역할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비마르크스주의적 공헌으로 많은 유사성뿐만 아니라, 중요한 차이점이 나타났다―과 예를 들자면 정치권력의 분석에서와 같이 사회계급의 특수하고본질적인 문제에 관한 논쟁에 더욱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베버적 개념들이 직접적 협력은 아닐지라도 광범위하게 개정된 마르크스주의적 계획에서 더욱 중요하게 수용되는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부흥이 이루어졌는데, 소련과 동유럽에서는 1953년 후에(유고슬라비아에서는 좀더 일찍), 중국에서는 최근(1979)에 사회학이 하나의 학문분야로서 다시금 관심이 모아졌다. 그러나 이들 나라에서 이 사회학 분야는 비마르크스주의적 서구 사회학자에 의해 수행된 연구와 크게 다르지 않은 특정 분야―교육, 복지사업, 가족, 산업관계―에서 주로 사회조사와 경험적 연구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정책연구로의 이러한 몰두는 '초기 과제의 하나인 일련의 사회조사'를 수해하기 위해 새로이 설립된 사회주의 사회과학원에 대한 레닌의 초기 지도에 따르는 것이며, 더 일찍이 쓰여진 부하린에 대한 그람시의 비판에서 표현된, 사회학의 적절한 위치에 대한 그의 견해에 따른 결과였다. 이 비판에서 그람시는 통계학의 형태로, 예를 들어 계획의 기초를 제공하는 '실제적 관찰의 경험적 편집'으로서 사회학의 가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다른 이론과 비판적으로 대비하여 사회학적 이론으로 발전시키려는 시도(혹은 기회)가 거의 없었으며, 그런 노력을 기울임과 동시에 기존의 사회주의 사회의 구조에 관계된 기본적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은 번번이 불평분자로 취급되어 강제로 추방되었다. 사적 유물론에 대한 사회학적 이론의 정확한 관계는 아직까지 중대한 문제로 남아 있지만, 이로 인해 기능주의, 체계주의, 혹은 몇몇 나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녔던 초기의 사회학적 경향성과 같은 비마르크스주의적 서구의 개념에서 일정 부분을 차용하고, 또 부분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예를 들어, 폴란드에서 실증주의에 의해 강하게 주의를 끈 사회학 이론의 여러 개념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상황이 달랐으며, 기본적인 이론적 토론이 종종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를 포함하면서 일어났다(Markovic and Petrovic 1979와 1964∼74년의 잡지《실천》에 수록된 기고물들).
마르크스주의는 이제 사회학에서 주요범주의 하나로 인정된다. 물론 다른 경쟁이론보다 더 큰 응집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는 다른 사회학 체계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내적 다양성, 유동성, 그리고 불확실성으로 특징지워진다. 마르크스주의의 전망은 계급구조, 사회변동을 초래하는 계급과 타 사회집단의 역할, 국가와 사회, 개인과 집단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다루느냐에 달려있다. 혹은 보다 일반적인 말로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내적 본성에 대한 실제적인 분석'(루카치 1970년의 표현;→1971년 메스자로스[Meszaros]에게 보낸 노트 서문), 그리고 또한 오늘날의 사회주의의 내적 본성에 대한 실제적인 분석을 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진보에는 중심되는 이론적 개념의 더 많은 수정이 수반될 것이며, 사회사상과 사회적 실천의 일반적 흐름에 의해 영향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와 서구 마르크스주의 사이에 가로놓인 상당한 심연을 메우지 못한다면, 아직 달성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의 목표가 성취되리라고는 거의 기대할 수가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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