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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지론 ] (agnosticism)

엥겔스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기 위해 반증하려는 고된 노력은 설득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간 낭비정도로 여겼던 듯하다(《반듀링론》1부 4장). 엥겔스와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종교란 역사적 및 사회적 현상으로 다루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만 허황횐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이 문제에 대한 개방적인 안목을 유지한다거나, 신을 증명되지 않는 가능성을 여기는 불가지적 입장은 결코 그들이 진지하게 다루고자 했던 문제는 아니었다. 그들은 종교개혁을 '혁명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는데 그것은 종교개혁이 봉건제에 대한 신흥계급의 도전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긴 안목에서 볼 때 구교회의 전복은, 종교란 결국 가면 갈수록 극히 사적인 관심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지식계급 속에 점진적으로 세속화의 물결이 퍼져나가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1854년 '종교적 권위의 쇠퇴'에 관한 소논문에서, 종교개혁 이후 철학이 올바른 영향력을 행사했던 18세기까지 신교도 국가에서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식자층이 '모든 종교적 신념으로부터 개별적으로 벗어나기 시작했다'라고 쓰고 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는 자연신교(自然神敎)란 불가지론과 마찬가지로 역시 낡아빠진 교리를 벗어 던지는 편리한 방법일 뿐이었다. 프랑스혁명은 상류계급에게 불안감을 줌으로써 중대하긴 하지만 피상적인 변화, 즉 상류계급과 교회간의 표면적인 동맹관계를 초래했는데 이것은 1848년 분규를 거치면서 다시 소생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이것은 불안정한 것이었고 정부는 단지 편리한 선에서만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마르크스는 1854년 영국과, 터키 측의 프랑스 사이에서 발발했던 크리미아 전쟁에서 신·구교의 성직자들이 같은 기독교인에 대해 이교도들이 승리하기를 기원할 수밖에 없었던 점을 들어 이러한 상황을 예증하였다. 더욱이 그는 그러한 성직자들이 장래에는 정치꾼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엥겔스에 따르면, 19세기 중엽에 영국에 정착한 교양있는 외국인들은 중산층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엄숙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이제는 범세계적인 영향이 그가 말하는 이른바 문명의 효과(《사적 유물론에 관하여》)를 가져오고 있다고 했다. 테니슨과 아놀드같은 시인들이 애처로운 어조로 슬퍼하던 신앙의 쇠퇴가 엥겔스에게는 희극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1892년 다음과 같이 썼다. '불가지론은 이제 거의 영국 국교회 만큼이나 존경을 받게 되었고 구세군 못지 않게 많은 수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사실 랭카셔 말을 빌자면‘낮간지러운’유물론이다'(《공상적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서문)라고 말했다. 엥겔스는 여기서 다시 불가지론을 물질의 실체나 또는 인과관계에 관한 불확실성이라는 철학적 의미에서 논의하고 있는데, 결국 불가지론이란 단어는 이러한 용법으로 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서 가장 빈번히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레닌은 경험비판론을 공박하는 논쟁(1908)에서, 마하와 그의 실증주의 학파에 의한 새로운 사상이란 사실 엥겔스가 유해한 불가지론이라고 공격했던 흄에서 유래된 옛 사상과 다를 것이 없다는 주장을 하려고 크게 애태웠다. 우리의 감각이 물질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인정은 하면서도 감각이 우리에게 물질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가의 여부는 해명되지 않은 의문이라고 보는 견해는 레닌의 생각으로는 단지 말장난에 불과할 뿐이다(앞의 책, 2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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