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 ] (dialectics)
변증법은 아마도 마르크스주의 사상에서 가장 논쟁적인 주제일 것이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토론은 두 가지 주요 쟁점들에 집중되어 왔는데, 마르크스가 헤겔에게 진 빚의 성질이 어떤 것인가 하는 쟁점과 어떤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인가 하는 쟁점이 그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변증법 개념은 일반적으로 (a) 인식론적 변증법에서 예증되듯 방법, 즉 가장 흔하게는 과학적 방법으로서 (b) 실재의 어떤 부문이나 전체를 지배하는 일련의 법칙이나 원리, 즉 존재론적 변증법으로서, 그리고 (c) 역사의 운동, 즉 관계적 변증법으로서 가장 많이 강조된다. 마르크스에게서는 이 세 가지 모두를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들의 범례는 자본에서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방법론적 논평, 엥겔스가 반듀링에서 상술한 자연철학, 그리고 초기 루카치가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제시한 ‘탈헤겔적 헤겔주의’이다. 이 저작들은 각각, 마르크스주의 사회과학, 변증법적 유물론,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기초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헤겔의 변증법은 두 가지 활용 형식이 있는데, (a) 논리적 과정으로 활용되는 것과 (b) 좀 더 좁게는, 이 과정의 동력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a) 헤겔에게서 관념론의 원리, 즉 실재를 (절대) 정신으로 파악하는 사변적 이해는 변증법의 두 가지 고대적 흐름, 즉 엘리아학파의 이성으로서의 변증법 관념과 이오니아학파의 과정으로서의 변증법 관념을 자기 발생적이고 자기 분화적이며 자기 개별화적인 이성의 과정으로서의 변증법 관념 속에 통합한다. 이성으로서의 변증법 관념은 제논Zeno의 역설에서 시작되어 각기 구별되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들을 거친 뒤 중세적 논쟁을 통하여 칸트적 비판으로 이어졌다. 과정으로서의 변증법 관념은 전형적으로 이중적 형태를 띠었다. 상승하는 변증법에서는 고급한 실재(예컨대, 형식이나 신)의 존재가 입증된다. 그리고 하강하는 변증법에서는 그 실재의 현상 세계에서의 현현顯現이 설명된다. 그 원형은 고대 회의주의의 물질의 초월적 변증법과, 플로티누스Plotinus와 에리우게나Eriugena 이후의 신플라톤주의적 및 기독교적 종말론의 신의 자기실현의 내재적 변증법이다. 상승 국면과 하강 국면의 조합은 원래의 통일, 상실 또는 분할, 그리고 복귀 또는 재통일의 준準시간적 유형이나, 원질과 현실화의 준논리적 유형을 낳는다. 엘리아학파의 흐름과 이오니아학파의 흐름의 조합은 헤겔의 절대자를 낳는다. 이것은 자신을 스스로 소외시킴으로써 자신을 실현하고 이러한 소외를 그 자체의 자유로운 표현이나 현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함으로써 그것의 자기 통일성을 복원하는 논리적 과정 또는 변증법이며, 헤겔 체계 자체에서 요약되고 완성되고 있다.
(b) 이러한 과정의 추동력은 훨씬 더 협소하게 인식된 변증법이다. 이것을 헤겔은 “그것들의 통일 속에서의 대립물들에 대한 파악, 또는 반反 속에서 정正에 대한 파악”이라고 부른다. G. W. F. Hegel, Science of Logic, vol. 2, London, 1969, p. 56.
이것은 변증법의 주석자로 하여금, 의식의 범주들, 관념들 또는 형식들이 서로에게서 생겨나서 점점 더 포괄적인 총체들을 형성하는 과정―전체로서의 범주들, 관념들 또는 형식들의 체계가 완성될 때까지―을 관찰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헤겔에 따르면, 진리는 총체이며, 오류는 일면성, 불완전성 그리고 추상성에 자리하고 있다. 오류는 그것이 발생시키는 모순들을 통해 인식될 수 있으며, 더 완전하고 더 풍부하며 더 구체적인 개념적 형식 속에서의 모순들의 통합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명한 지양의 원리를 목격할 수 있다. 변증법이 전개되더라도 부분적 통찰은 상실되지 않는다. 사실상, 헤겔의 변증법은 두 가지 기본적인 방식으로 진전된다. 하나는 일부의 관념들 속에 함축되어 있는, 그렇지만 명시적으로 정리되지는 않은 것을 드러내는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일부 관념 속의 어떤 부족이나 결핍이나 부적절성을 개선하는 방식이다. ‘반성적’ (또는 분석적) 사유와 대비되는 ‘변증법적’ 사유는 개념적 형식들을, 단지 그것들의 일정한 차이 속에서만이 아니라 그것들의 체계적 상호 연관 속에서 파악하며, 각각의 발전을 이전의 덜 발전한 국면의 산물로 이해한다(그 발전은 이 국면의 필연적 진리거나 완료이다). 그러므로 각 형식과, 되어감의 과정에서 그것이 보여 주는 모습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 잠재적인 역설 또는 전조적인incipient 놀라움이 존재한다.
헤겔 변증법에 관해 마르크스가 전개한 사유의 가장 중요한 국면들은 (i)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헤겔 변증법의 ‘신비화된’ 논리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것은 헤겔의 관념론적 노동 개념을 중심으로 논의하고 있는 경제학·철학 수고의 최종 원고에도 다시 나타난다), (ii) 곧 이어진 저작들, 즉 신성가족, 독일 이데올로기, 철학의 빈곤에서 사변철학 그 자체에 대한 격렬한 논쟁적 공격 속에 담긴 헤겔 비판, (iii) 강요 이래의 헤겔 변증법에 대한 일정 정도의 긍정적 재평가로 구분된다. 긍정적 재평가의 정도는 여전히 활발한 논쟁의 주제이다. 그렇지만 두 가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즉 마르크스가 헤겔 변증법 자체에 대해 계속 비판적이라는 점, 그렇지만 마르크스 자신이 헤겔 변증법과 관련된 변증법을 다루고 있다고 믿는 점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듀링Eugen Dühring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헤겔은 관념론자인 반면 나는 유물론자이기 때문에 내 전개 방법이 헤겔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은 그도 매우 잘 알고 있다. 헤겔의 변증법은 모든 변증법의 기본 형태이지만, 오직 그것의 신비화된 형식을 벗어 버린 뒤에만 그러하며, 그러므로 바로 이 점에서 그것은 나의 방법과 구별된다.” Marx to Kugelmann, 6 March 1868.
그리고 자본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헤겔의 손에서 변증법은 신비화되었지만, 이 때문에 헤겔이 변증법의 일반적 운동 형태를 처음으로 포괄적이고 의식적인 방식으로 제시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헤겔에게서 변증법은 그것의 머리로 서 있다. 그것의 신비적 외피 속에 있는 합리적 핵심을 발견하려면 그것을 전도시켜야 한다.” Marx, Capital, vol. I, 2판 후기.
전도와 핵심이라는 이 두 가지 비유는 거의 신학적인 사변의 주제가 되어 왔다. 핵심이라는 비유는 마르크스가, (i) 헤겔 체계로부터 변증법적 방법의 완전한 추출이 가능하다는 청년 헤겔주의적 및 엥겔스류의 견해와 (ii) 추출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즉 헤겔 변증법은 헤겔의 관념론에 의해 완전히 손상되었다는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으로부터 콜레티에 이르기까지의 실증주의적인 성향의 비판자들의 견해 둘 다에 반대하여, 헤겔 변증법의 핵심 부분을 뽑아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불행하게도, 마르크스는 “헤겔이 발견했지만 동시에 신비화한 방법 속의 합리적인 것을 일반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게, 인쇄 전지 두세 장에 밝히고자 한” 자신의 소망을 실현하지 못했다. Marx to Engels, 16 January 1858.
마르크스가 헤겔에게 진 빚이 어떤 것이거나 간에, 1843년부터 1873년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의 헤겔 비판에는 뚜렷한 일관성이 있다. (a) 형식적으로는, 공격의 세 가지 주요한 표적이 있다. 헤겔의 전도, 헤겔의 동일성의 원리, 그리고 헤겔의 논리적 신비주의가 그것이다. (b) 실질적으로는, 마르크스는 헤겔이 자연의 자율성과 사회 형식들의 역사성을 입증하지 못한 점에 초점을 맞춘다.
(a) (1) 마르크스에 따르면, 헤겔은 주어와 술어에 대한 삼중의 전도라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그리고 각 측면에서 마르크스는 헤겔의 입장을 전도로 서술하면서, 자신의 입장이 헤겔의 입장에 대한 전도라고, 즉 전도에 대한 전도라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적 존재론, 사변적 합리주의적 인식론, 그리고 실질적 관념론적 사회학에 대하여, 개별적인 것들의 속성들로서의 보편적인 것의 개념, (다른 것으로) 환원 불가능하게 경험적인 것으로서의 지식 개념, 그리고 국가의 기초로서의 시민사회(뒤에는 생산 양식) 개념을 대립시킨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단순히 헤겔의 반대 입장을 지지하는가 아니면 그것의 문제틀을 변환하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사실상, 그는 대체로 후자를 수행한다. 마르크스의 비판은 헤겔의 ‘전도’를 겨냥하는 것만큼이나 헤겔의 용어들과 관계들을 겨냥한다. 마르크스는 무한한 정신을 (소외된) 유한한 존재자들의 환상적 투사로, 그리고 자연을 초월적으로 실재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무한한 정신과 석화되고petrified 유한한 정신으로 구성되는 헤겔의 내재적인 정신적 목적론은, 역사적으로 발현적인 발전하는 인간과 다른 것으로 환원 불가능하게 실재적인 (그러나 변경 가능한) 자연 안에서의 그리고 이것들 사이에서의 인과적 관계에 대한 경험적으로 통제된 탐구에 대한 방법론적 개입으로 대체된다. 또한 마르크스는 헤겔에게서 찾아낸 세 가지 전도를 명확하게 구별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들의 특이성은, 헤겔이 존재함을 앎으로 환원하고(인식적 오류) 과학을 철학으로 환원한다(‘사변적 환상’)는 점을 정밀하게 지적하는 마르크스의 제2 및 제3의 비판 노선에 함축되어 있다.
(2) 헤겔의 동일성(사유 속에서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 원리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이중적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의 변형적 방법의 노선을 따르는 외재적 비판에서는 경험 세계가 어떻게, 헤겔이 사유를 실체로 상정하는 것의 결과로 나타나는가를 제시한다. 그렇지만 내재적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경험 세계가 실질적으로 사유를 실체로 상정하는 것의 비밀스런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헤겔이 독립된 주체(관념)로 변형된 그 자신의 활동을 또는 일반적으로 사유 과정을 어떻게 경험된 세계의 조물주로 제시하는가 밝힌다. 그런 다음 마르크스는 사변철학자의 사유의 내용이 사실상 이미 존재하는 일의 상태―이런 식으로 물상화되고 외부화된―에서 흡수된 경험적 자료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림 1>은 마르크스의 반대 논리를 보여 준다.
<그림 1> 헤겔의 동일성 원리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
마르크스의 분석은 (i) 보수주의나 변호론은 좌파 헤겔주의자들이 상정하는 것처럼 어떤 개인적 약점이나 타협의 산물이 아니라 헤겔의 방법에 내재해 있는 것이며 (ii) 헤겔 변증법의 단계들이 비변증법적이고 비반성적이며 다소간 조악한 경험적 고려들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헤겔의 논리 이론은, 그의 현실적인 실천과 일관되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3) 헤겔의 ‘논리적 신비주의’와 이것이 허용하는 개념의 단성생식 및 이데올로기적 속임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철학(그리고 일반적으로는 관념)의 자율성 또는 최종적인 자기 충족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삼는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마르크스가 (i) 문자 그대로의 전도, 즉 독일이데올로기 시기의 논쟁들에서 보이는 것처럼 과학이 철학(또는 철학의 실증주의적 대체물)을 흡수하는 것을 옹호하는가, 아니면 (ii) 이절적hetereonomous인 것으로서의 철학의 변형된 실천, 즉 과학 및 다른 사회적 실천들에 의존하지만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그 자체의 기능들을 갖는 것으로서의 철학의 변형된 실천―마르크스 (그리고 엥겔스) 자신의 실천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을 옹호하는가는 분명하지 않다.
(b) 마르크스는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헤겔을 비판하면서 두 가지의 개념적 공백, 즉 (1) 자연의 객관성의 공백,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유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인식되는, 또는 독립적으로 실재적이며 그 어떤 종류의 정신에 의해서도 목적론적으로 요청되지 않고 그 어떤 정신에도 인과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는 존재자의 객관성의 공백과 (2) 객관화와 소외 사이의 구별의 공백―헤겔이 절대적 주체의 자기 소외로서의 인간의 객관화라는 현재의 역사적으로 결정된 소외 형태를 이성적으로 변형하면서, 진정으로 인간적인, 즉 소외되지 않은 인간의 객관화 양식의 가능성을 개념적으로 차단하기 때문에 생겨난―을 지적한다. 더 일반적으로, “추상적 정신노동이 유일한 노동”이라고 파악하는 헤겔에 Marx, Economic and Philosophical Manuscripts, 세 번째 초고 마지막 부분.
대응하여 마르크스는 노동이 언제나 (1) “인간의 도움 없이 갖춰지는 물질적 하위층위”를 전제하며 Marx, Capital, vol. I, 1장 2절.
(2) 되돌릴 수 없는 손실과 유한성, 그리고 진정한 새로움과 발현의 가능성을 수반하는 실질적인 변형을 포함한다고 파악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객관적으로 조건 지어지고, 절대적으로 유한하며, 전망적으로 개방적(즉 비종료적)일 것이다.
헤겔의 동일성의 철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을 통해 제기되는 한 가지 가능성은, 마르크스(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이 단일의 현상을 상술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상이한 특징들과 주제들을 상술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 변증법은 철학이나 과학 또는 세계에서 나타나는 유형들이나 과정들을 가리키거나, 존재나 사유 또는 이것들의 관계를 가리키거나(존재론적 변증법, 인식론적 변증법, 관계적 변증법), 시간 ‘속’ 또는 시간을 ‘벗어난’ 자연이나 사회를 가리키거나(역사적 변증법이나 구조적 변증법), 보편적이거나 개별적인 것, 초역사적이거나 일시적인 것들과 관련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범주들을 더 세부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식적 변증법은 어느 것이든 메타개념적이거나, 방법론적(비판적 또는 체계적)이거나 발견적이거나 실질적(서술적 또는 설명적)일 수 있다. 관계적 변증법은 일차적으로 (루카치의 예에서 보이듯) 존재론적 과정으로 인식될 수도 있고, (마르쿠제의 예에서 보이듯) 인식론적 비판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이러한 변증법적 양식들은 (a) 공통의 조상과 (b) 마르크스주의 안에서의 그것들의 체계적 연관들에 의해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c) 그것들이 공통의 본질이나 핵심이나 근원을 갖는다는 점, 더욱이 (d) 이것을 헤겔에게서 (변함없이) 찾아낼 수 있다는 점에 의해서 연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헤겔 변증법이 완전히 변형되고 (그러므로 핵심이라는 비유나 전도라는 비유가 적용되지 않고) 그리고/또는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하더라도 마르크스는 여전히 헤겔 변증법에 긍정적으로 빚지고 있을 것이다.
대체로 마르크스적 변증법에서 공통적으로 제시되는 긍정적 이론들은 (i) 세계에 대한 개념(엥겔스나 변증법적 유물론이나 마오쩌둥이 제시하는 것과 같은)과 (ii) 이성에 대한 이론(델라 볼페G. Della Volpe나 아도르노Theodor Adorno가 제시하는) 그리고 (iii) 본질적으로 그것들 (또는 사유와 존재, 주체와 객체, 이론과 실천 등)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이론(루카치나 마르쿠제가 제시하는)이다. 마르크스 자신이 인식론적 변증법 개념을 일차적으로 강조한다는 것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흔히 마르크스는 ‘변증법’이라는 용어를 ‘과학적’ 방법의 동의어로 사용한다. 자본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방법에 대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논평자가 분명히 실증주의적으로 서술한다고 인용하면서 “그 필자는 자신이 나의 실제적 방법이라고 불렀던 것을 그렇게 적절히 서술하고 있는데 그가 서술하고 있는 것이 바로 변증법적 방법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언급하고 있다. Marx, Capital, vol. I, 2판 후기.
그렇지만 마르크스의 자연주의적이고 경험주의적인 방법은 실증주의적이 아니라 실재론적이라는 점, 그리고 그의 인식론적 변증법 때문에 그는 특수한 존재론적 변증법과 조건적인 관계적 변증법을 취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과학적 변증법의 비밀”이 “경제적 범주들을 물질적 생산의 특정 발전 단계에 조응하는 역사적 생산관계에 대한 이론적 표현”으로 파악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지적한다. Marx to J. B. Schweitzer, 24 January 1965.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과학적이다. 왜냐하면, 사유 속의 모순과 사회경제적 삶의 위기를 그것들을 발생시키는 특정의 모순적인 본질적 관계(존재론적 변증법)에 입각하여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역사적이다. 왜냐하면, 그의 변증법은 그것이 서술하는 관계와 상황들의 변동들에 뿌리박고 있으며 또한 그 변동들의 (조건적으로) 동인動因이기(관계적 변증법)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경험적으로 통제된 탐구 양식과 준準연역적인 서술 방법을 구별하는데, 이 구별에 조응하여 우리는 그의 비판적 변증법과 체계적 변증법을 구별할 수 있다. 역사에 대한 실천적 개입이기도 한 비판적 변증법은 (경제적 교의들, 행위주체의 개념들, 그리고 그것들의 기저에 있는 발생구조들과 본질적 관계들에 대한) 삼중의 비판이라는 형식을 취하며, 이것은 (아들러가 처음 강조한) (역사화된) 칸트적 계기―여기에는 공격을 받고 있는 여러 가지 범주들, 이론들 그리고 형식들의 타당성과 실천적 적합성의 역사적 조건이 꼼꼼하게 위치 지어져 있다―를 통합한다. 마르크스의 비판적 변증법은 아마도 경험적으로 개방적이며, 물질적으로 조건 지어져 있으며, 역사적으로 한정된 변증법적 현상학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마르크스의 체계적 변증법은 자본 1권 1장의 상품의 변증법에서 시작하며 비판적 정치경제학사인 잉여가치 이론들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모든 모순은 상품의 가치와 사용가치 사이의, 그리고 상품이 체화하는 노동의 구체적인 유용성 측면과 추상적인 사회적 측면들 사이의 구조적으로 근본적인 모순들로부터 유래한다. 이러한 모순들은, 그 모순들이 근거 짓는 다른 구조적 및 역사적 모순들(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 생산 과정과 가치화 과정 사이의 모순, 임노동과 자본 사이의 모순 등의)과 함께, (i) 모순의 항項들이나 극極들이 존재적으로 서로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실재적이고 포괄적인 대립이며, (ii) 외양이라는 신비화하는 형태와 내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러한 변증법적 모순은 무모순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며(왜냐하면, 그것이 일관성 있게 서술될 수 있으므로), 중력의 법칙을 위반하는 것도 아니다[왜냐하면, 관련된 객체로 인해 발생하는, 실재하는 객체의 실질적이고 전도된(그릇된) 재현이라는 개념이 비경험주의적인 층화된 존재론―마르크스가 채택하는 것과 같은―과 쉽게 조화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근본적인 구조적 모순을 그 자체가 (i) 생산 수단과 생산 재료로부터 (ii) 그들 서로로부터 그러므로 (iii) 사회적 관계의 연계―그 안에서 자연에 대한 그들의 행위(와 반작용)가 일어나는―로부터 직접 생산자들의 분리에 따른 역사적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역사를 원래 분화되지 않은 통일체 → 파편화 → 복원되었지만 분화된 통일체로 보는 수정된 실러F. Shiller의 역사 도식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이 담겨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설명해야 할 것은 또는 역사적 과정의 결과는, 자연과의 물질 교대적 교환이라는 자연적, 비유기적 조건 속에서, 그러므로 인간의 자연 점유라는 조건 속에서 살아가며 활동하는 인간의 통일성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실존의 이러한 비유기적 조건과 이러한 활동적 실존으로부터의 인간의 분리, 즉 오로지 임노동과 자본의 관계 속에서만 완전하게 설정되는 분리이다.” Marx, “Chapter on Capital” in Grundrisse, Notebook V.
그는 이것을 경험적으로 확인된 것으로 간주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개념을 과학 밖으로 추방하는 것은 지나치게 제한적이라고 생각된다. 예컨대, 그것은 형이상학적 발견법으로 기능하거나 경험적 함축을 갖는 (그 자체를 직접 시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발전하는 연구 기획의 핵심hardcore으로 기능할 수 있다.
특징적인 것은 마르크스의 이른바 ‘변증법적’ 정의나 도출이 아니라, 대립하는 힘들이나 경향들이나 원리들을 공통의 인과적인 존재 조건에 입각하여 설명하는 그의 변증법적 설명과 부적절한 이론들과 현상들 등을 그것들의 역사적 조건에 입각하여 설명하는 그의 비판이다. 정치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왜 ‘지양’Aufhebung이라는 외양 형태를 취하는가? 새로운 이론은 언제나 그것이 대체하고자 하는 기존 이론들이 성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대부분의 현상에 대한 설명을 유지하도록 제시될 것이다. 그렇지만 현상들에 대한 설명을 이론적으로 유지하면서 마르크스는 그것들에 대한 서술을 근본적으로 변형하고, 현상들을 새로운 비판적설명적 구역 속에 위치시키면서 그것들에 대한 실천적 변형 과정에 기여한다. 비판적 변증법이나 체계적 변증법에서 마르크스는 헤겔의 실재 개념에 빚지고 있는가? 헤겔 존재론의 세 가지 열쇠는 (1) 실현된 관념론 (2) 정신 일원론 (3) 내재적 목적론이다. (1)에 반대하면서 마르크스는 헤겔의 절대자와 배열적 동일성constellational identity의 형상 둘 다 기각하고, 물질과 존재가 정신과 사유(의 소외들)로 환원될 수 없다고 파악한다. (2)에 반대하면서 알튀세르는 분화와 복합성이 마르크스에게 핵심적이라고 정확히 주장했으며, 델라 볼페는 마르크스의 총체성들은 사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적절히 강조했다. 그리고 (3)에 찬성하면서 마르크스는 개념적 필연성이 아니라 인과적 필연성을 강조했다. 목적론은 인간 실천에만 한정되며, 다른 경우에 나타나는 목적론은 “이성적으로 설명된다.” Marx to Lassalle. 16 January 1861.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마르크스는 역사 과학의 시작, 존재론적 층화 그리고 되어감이 환원 불가능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반면, 헤겔은 그것들을 본질과 존재라는 논리적 영역들 속에서 다룸으로써 각각 현실성과 무한성으로 분해한다(그러므로 그것들을 관념의 자기 설명적 영역으로 분해한다). 철학적으로 중요한 모든 측면에서 마르크스의 존재론은 원자론적 경험주의의 존재론과 차이가 나는 만큼 헤겔의 존재론과도 차이가 난다. 원자론적 경험주의의 존재론은 엥겔스의 후기 철학적 작업의 표적이며, 마르크스도 철학적 비판에 주력했던 그의 청년기에 헤겔의 관념론이 암묵적으로 원자론적 경험주의의 존재론을 전제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변증법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세 가지 입장은, 그것이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견해(베른슈타인)와 그것이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것이라는 견해, 그리고 그것이 개념적 그리고/또는 사회적 영역에는 적용 가능하지만 자연의 영역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견해(루카치)이다. 엥겔스는 두 번째의 보편주의적 입장에 그의 막대한 권위를 부여했다. 엥겔스에 따르면 변증법은 “자연과 인간 사회와 사유의 운동 및 발전의 일반 법칙에 대한 과학”이다. Engels, Anti-Dühring, 1부 13장.
이 법칙은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Engels, “Dialectics” in Dialectics of Nature.
이들 법칙은 (1) 양의 질로의 전화 및 그 역, (2) 대립물들의 상호 침투, (3) 부정의 부정이다.
엥겔스의 논의에는 모호한 부분이 있다. 위의 법칙들이 어느 정도 선험적 진리로 상정되는지 아니면 초경험적인 일반화로 상정되는지, 또는 과학적 실천에 불가결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편리한 해설의 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엥겔스가 제시하는 사례들의 악명 높은 자의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사회과학이라고 추정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엥겔스의 변증법이 갖는 적합성은, 특히 그가 모든 환원적 유물론에 반대하기 때문에, 의문시될 것이다. 비록 마르크스가 엥겔스의 해설에 동의했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정치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아무런 자연변증법도 전제하거나 수반하지 않으며, 선험론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실재 속에 변증법적 과정들이나 다른 유형의 과정들이 존재한다는 주장의 후험적이고 주제 특수적인 특성을 함축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입장과 엥겔스의 입장 그리고 헤겔의 입장 사이의 관계는 <그림 2>처럼 제시할 수 있다.
자연변증법을 가정하는 것에 대해, 변증법은 오직 인간의 영역에서만 이해되는 모순이나 부정 등과 같은 범주들을 자연에 인격적으로 (그러므로 관념론적으로) 되돌려 투사하는 것인 만큼, 범주적 오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루카치로부터<그림 2>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많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비판자들은 자연과학이 사회역사적 세계의 일부로서 변증법적일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 그 자체의 변증법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명백히, 자연의 영역과 사회의 영역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두 영역 사이의 특수한 차이들이 그것들의 일반적인 유사성들보다 더 중요한가? 사실상 자연변증법의 문제는 자연주의라는 일반적 문제[자연과 사회를 동일한 방식으로 파악할 수 있는가옮긴이]의 한 변종으로 축소할 수 있으며,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은 변증법을 자연에까지 확대하는 것이 타당할 만큼 변증법을 충분히 광범하게 이해하고 사회를 충분히 자연주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률적인 답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연에도 변증법적인 양극과 내포적인 대립은 있을 것이지만 변증법적 이해 가능성intelligibility이나 이성reason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의 엥겔스 옹호자들(예컨대, 루벤P. Ruben)은 (1)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인식적 질문에는, 그리고 (2) 자연으로부터 인간의 역사적 발현에는, ‘초범주적’ 연계들의 이해 가능성을 유지하는 셸링의 (주체와 객체의) ‘무차별점’points of indifference(또는 변증법적 동일성)이 전제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측정이나 실험에서의 인식적 균질화 또는 동등화와 (진화에서의) 역사적 발현은 모두 관련된 자연 쪽 극들이 실천에서 독립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는 어느 것이나 비대칭적인 내적 관계―사회 형태들은 자연 형태들을 전제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라는 비非헤겔적 측면을 갖는다. 그러므로 인식론적 동일성이나 존재론적 동일성은 포괄적인 유물론적 비동일성 안에서만 발생한다.
단기적 관점에서, 엥겔스의 개입은 제2인터내셔널의 진화론적 마르크스주의의 초자연주의와 일원론 경향이라는 역설적 결과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예컨대 핵켈Ernst Haeckel이나 듀링이 제시하고 엥겔스가 의식적으로 반대한 실증주의와 여러 측면에서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는, 엥겔스의 헤겔 변증법 (여기서는 반영론이 동일성의 원리의 인식적 대용물로 작동하며, 과정적 세계관이 형식의 상동성을 지탱한다) 전유는 마르크스주의적 지식의 절대화 또는 독단적 폐쇄, 과학의 철학으로의 해소, 심지어는 소련 마르크스주의의 조화론적 관점에서의 현재 상태의 초월적 형상화라는 분명한 형식적 결과를 낳았다.
엥겔스가 부지불식간에 자연화된 역사 과정을 ‘새로운 절대자’로 확립했다면, 루카치는 바로 그 절대자―헤겔이 사변철학 속에서 헛되게 찾고자 했던―의 진정한 실현이 역사의 목적이라는 것을 입증하고자 했다(반면, 마르크스는 궁극적으로 그것을 정치경제학에서, 그리고 역사의 동일한 주체객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명과 역할에 대한 발견에서 찾았다). 엥겔스는 역사를 보편적 과정의 범주들에 입각하여 ‘객관주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리고 루카치는 역사를 자기실현의 무조건적인 행위(그것의 논리적 근거인)를 완료하는 수많은 매개나 계기라고 ‘주관주의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엥겔스와 루카치 두 사람 모두 ‘역사’가 사실상 실체를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본래적인 결점에도 불구하고, 변증법적 유물론과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두 전통은 모두 변증법의 몇몇 주목할 만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서구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루카치 자신의 역사적 자아의식의 변증법이나 주체객체의 변증법 이외에,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이론/실천의 모순, 마르쿠제의 본질/존재의 모순, 콜레티의 외양/실재의 모순 등이 있으며, 이것들은 모두 어느 정도는 직접적으로 헤겔로부터 유래한다. 벤야민Walter Benjamin에 따르면, 변증법은 역사의 불연속적이고 격변적인 측면을 나타낸다. 블로흐Ernst Bloch에 따르면, 변증법은 객관적인 환상으로 이해된다. 사르트르는 변증법이 개인 자신의 활동을 총체화하는 이해 가능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변증법이 탈소외적 인간성이라는 목표를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더 반反헤겔적인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 (콜레티도 여기에 포함된다) 가운데 델라 볼페의 변증법은 본질적으로 유연하고 비실체화된 사유이지만, 알튀세르의 변증법은 총체들의 복합성과 사전 구성성과 중층결정을 나타낸다. 양쪽 진영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면서 아도르노는 한편으로 모든 비판의 내재성과 다른 한편으로 비동일성 사유를 강조한다.
한편 변증법적 유물론의 전통에서는 스탈린이 엥겔스의 제3법칙[부정의 부정옮긴이]을 돌연히 탈락시켰고 마오쩌둥이 제1법칙[양의 질로의 전화 및 그 역옮긴이]을 제2법칙[대립물들의 상호 침투옮긴이]의 특수한 사례로 하락시켰다. 이 전통은 레닌 이후로 점차로 변증법이라는 짐의 대부분을 내려놓았다. 확실히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서는 (정치적 동기와 아울러) 훌륭한 유물론적 증명서가 있었다. 부정의 부정은 헤겔이 한정된 존재를 무한한 것으로 용해할 때 사용한 수단이다. 반면 고들리에Maurice Godelier가 지적하듯 변증법적 유물론자들은 헤겔의 대립물들의 동일성과 마르크스의 대립물들의 통일성 사이의 차이를 거의 인지하지 못했다. 이 전통 안에서 마오쩌둥은 유용성을 가질 수 있는 일련의 구분, 즉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 사이의, 주요 모순과 부차적 모순 사이의, 모순의 주요 측면과 부차적 측면 사이의 구분을 제시하고, (레닌 및 트로츠키Trotsky와 유사하게) 모순들의 ‘결합적이고 불균등한’ 발전을 강조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변증법의 길고 복잡한 역사에서는 그 다섯 가지 기본적인 의미 흐름이 두드러지는데, 이것들 각각은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다소간 변형되어 왔다. (1)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에게서 비롯되는 변증법적 모순―독립적이지 않은 원천들의 힘들의 내포적 대립이나 갈등을 포함하는―을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및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구성 요소로 판별한다. (2) 소크라테스에게서 비롯되는 논파법elenchus 또는 변증적 논증은 한편으로는 계급투쟁이라는 기호 아래 변형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부의 마르크스주의 사상 속에서는 여전히 ‘이상적 조건들’ (그람시의 공산사회와 하버마스의 ‘강제되지 않은 동의’) 아래에서의 진리의 규범으로 기능을 한다. (3) 플라톤에게서 비롯되는 변증법적 이성은, 개념적 유연성과 새로움―경험적이고 논리적이며 맥락적인 통제 아래 과학적 발견과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종류의―으로부터 계몽과 탈신비화(칸트적 비판)를 거쳐 집합적인 자기 해방의 물질적으로 근거 지어지고 조건 지어진 실천의 심층적 합리성에 이르기까지의 광범한 내포를 갖는다. (4) 플로티누스에서 실러로 이어지는 본원적 통일성의 역사적 분리와 분화적 통일의 변증법적 과정은 한편으로는 여전히 마르크스의 상품 형태의 체계적 변증법이 함축하는 반대 사실적 한계들이나 양극들로 남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를 향한 실천적 투쟁에서 박차로 작용한다. (5) 헤겔에게서 비롯되는 변증법적 이해 가능성을 마르크스는 그것이 사회적 객체들의 인과적으로 발생된 표상과 그 객체들에 대한 설명적 비판―역사적으로 특수하고 실천 의존적인 것들과 정말 그렇지 않은 것들의 존재 조건들에 입각한―을 포함하도록 변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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