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책 처음으로 | 사전 | 자유게시판 | 회원자료 | 로그인

 

       ■ 의견바로가기

[발전단계] (stages of development)

세계사를 여러 단계로, 즉 간 단계마다 서로 다른 사회 경제적 구조들을 지니면서 동시에 어떤 논리적 유형에서는 다른 단계를 뒤따르는 것으로 구분하면서, 맑스와 엥겔스는 흔히 단일한 과정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되는 4가지 '생존양식'―수렵, 목축, 농업, 교역―에 관한 18세기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었다.《독일 이데올로기》(제1부, 제1절)에 나타난 그들의 첫 개괄은 아주 단순하며 유럽 역사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것은 첫째, 원시 공산주의 또는 부족 시대, 둘째, 노예제에 기초한 고대 또는 고전 시대, 셋째, 봉건주의 시대, 그 다음 자본주의 시대라는 4가지 시기로 단순화였다.《정치경제학 비판》서문에서 맑스는, 지금은‘아시아적’이라고 불리는 최초의 시대와 함께, 이러한 연속성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러나 전자본주의적 경제구조에 관한 출판되지 않은 노트(《요강》pp.471∼514)에서 맑스는 자신에게 좀 더 복잡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발전과정을 입증할 만한 자료를 찾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생산체계의 유형을 순서대로 나열하거나 한 유형이 어떻게 다른 유형에 의해서 대치되었는가를 설명하기보다는 모든 가능한 유형을 확인하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개의 활력과 주도권의 특질이나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단계가 안고 있는 경제적 요인에 중점을 두었다. 이것은 분명히 그에게서 유럽은 발전한데 비해 아시아는 일정한 정도 이상은 발전하지 못했다는데 대한 관심의 일부였다. 그는 이에 대한 두 가지 원인을 찾아냈다. 즉 아시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시민생활의 발상지인 고대 지중해 도시와 그리고 그가 '슬라브적' 또는 동구적인 것과 대조하여 '게르만적' 이라고 불렀던 초기 서유럽에서의 일련의 토지 소유권(그는 공동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인 소유로 생각했다)이 바로 그것이다.《요강》에서 그가 가장 관심을 보였던 전형적 예는 토지 쟁탈을 위한 무력투쟁에 의해서 지배되는 지중해 세계를 장악했던 로마의 경우였다. 그는 농민이 과잉인구로 변천되는 것과 정복전쟁이 과두 정치적 노예경제를 초래하는 사실을 주목하였다. 왜 이 단순한 맬더스적 인과관계가 다른 곳, 특히 아시아에서는 유사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는가 하는 것은 그가 제기하지 못한 문제였다.
엥겔스는《반듀링론》(제2부, 제4장)에서 원시 생활로부터 직접적으로 노예제를 도출하였으며, 그것으로부터 노예제가 한발 앞선 것으로 보았다. 나중에, 모건의 원시 씨족 연구에 대한 맑스의 열정에 공감하여 그는 그것을 '이방인' 또는 씨족사회의 해체와 아테네 폐허 위에서 국가의 출현을 분석하는 데 이용하였다. 그는 이러한 변화를 상품 교환의 발달에서 나오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상품은 상품 생산자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화폐가 순환함에 따라 상품 생산자 대부분은 채무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자극 아래서 분업이 증가하고 상인계급이 대두함에 따라, 야만시대의 '상위 단계'는 문명의 문턱에 이르게 되었다(《가족의 기원》제5부, 제9장). 라파르그는 자신의 선례를 따라 이 이론을 생생하게 일반화시켰으며, 원시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에 이르는 역사의 연속적 시기를 추적했다. 그의 임무는 새로운, 보다 향상된 공산주의에 대한 기초를 닦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사회를, 마치 모든 인간이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것처럼, 똑같은 길을 걸어나가는 것으로 생각했다(1895, 제1장).
맑스 자신은 어느 곳에서나 기대되는, 고정된 연속상태에 대한 어떠한 믿음도 강력히 거부하였다(Otechestvenniye Zapiski의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 초안, 1877년 11월). 그리고 그는 만년에 이르러 미르나 러시아 공동체의 정체적인 원시 공산주의에서 현대 사회주의로의 직접적 발전이, 유럽과 같은 유리한 조건이 주어진다면, 가능하다고 일시적으로나마 상정했었다. 결국 그와 엥겔스 이후의 맑스주의자들에게는 이 점에서 많은 수수께끼가 남겨졌다. 플레하노프는 유럽적 순환을 상세히 설명했지만, 아시아는 수로(水路) 통제에 기초한 국가권력을 공고화하는 지리적 기후적 환경 때문에 그들의 공통된 출발에서부터 다른 방향으로 이행한 것으로 서술했다. 그러나 1931년에 명백한 '아시아적' 양식이라는 개념은 시대구분의 문제에 대한 재검토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 소련 학자들에 의해서 거부되었다(Dirlik 1978, pp.180∼1, 196∼8 ; Enteen 1978, pp.165ff). 그와 함께 맑스가 그 원인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던 아시아의 장구한 정체성에 대한 수수께끼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스탈린은 하나의 생산양식은 '결코 한 지점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으며' 노동자 대중이 중요한 동력을 이루는 변화와 발전의 상태에 있다고 선언하였다. 연구 분야는 이제 하나의 보편적 유형의 가정에만 한정된다. 이 가정은 봉건제 이외에는 씨족과 자본주의 공장 사이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지만, 보편적 유형의 필요부분으로 간주되지 않는 노예제에 의해서 단순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쿠시넨이 편찬한 교과서(1961)에는 노예제가 포함되어 있으며, 생산의 발전은 항상 똑같은 내적 법칙에 따르는 까닭에 지역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노동자 대중은 기본적으로 같은 길을 걸어간다'고 단정하고 있다(p.153). 한편, 모순되게도 '정체와 퇴보로 이어진 많은 시기들' 그리고 적지 않은 문명의 붕괴에 대한 공백이 발견되었다(p.245).
또 다른 소비에트 이론가인 글레저만[Glezerman]은 역사법칙은 파기될 수 없으며, 여러 단계가 발생하는 순서는 변경될 수 없다는 점에는 동의하면서도 노예제 시대와 같은 일정한 단계를 빼버릴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숙고하였다. 즉 그는 불변의 연속이라는 원리는 제국주의가 자본주의를 식민지에 강요함으로써 필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서 허용된 것으로서 이것은 제 2 인터내셔날에 해악을 끼쳤다고 보았다(1960, pp.202, 206). 레닌으로서는 중국이 자본주의라는 오랜 준비 기간을 거치지 않고서 사회주의로 도약할 수 있다는 견해를 비웃었으리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중국에서의 민주주의와 나로드니즘, 1912년 7월). 그러나 서구 맑스주의는 최근 몇 년간 더욱 더 융통성 있고 변화 가능한 과정을 생각하는 경향으로 기울고 있다. 따라서 고든 차일드는 근동(近東)으로부터 야금술을 배우는 유럽의 경우와 같이 어떤 목표로 이끄는 준비단계를 꼭 거치지 않고도‘목마 넘기’(leapfrogging를 하는 많은 예를 들었으며, 반면에 가로디[Garaudy]는 맑스주의가 부자연스럽게 적용됨으로써 무의미해진다고 하면서, 모든 인류에게‘절대적이고 완전한 진리’로 받아들여진‘5단계론’을 고수하였다(1969, p.46). 이탈리아의 멜로티[Melotti]도 단선적 도식을 제국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또 다른 인물이지만 반면에 그는 그의 견해에서 몽테스키외, 헤겔 그리고 영국 고전 경제학자들로부터 이끌어낸, 유럽과 아시아라는 두 개로 분리된 서로 다른 발전의 길이 있다는 가정을 부인했다(1972, pp.46, 156). 그 대신 그는 모든 원시 공산제도에서 유래하는, 평행적이면서도 상호 작용하는 다섯 개의 길이라는 복잡한 도식을 제시하고 있다(pp.25∼6).
이 모든 문제와 함께 변화의 역학과 또한 변화가 왜 다양한 길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가, 또는 극히 오랜 기간이 지나도록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가 하는 문제는 교묘하게 제쳐놓고 있다. 또한 중세 봉건주의의 출현은 하나의 선행자로부터가 아니라 후기 로마와 이교도의 복잡한 결합에서 비롯된다는 등의 다양한 견해로까지 확대되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봉건주의로부터 발생한 자본주의에 대하여 기술했는데, 그것은 중요한 도시적 요소를 지닌 봉건주의의 특수한 유럽적 형태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자주 관찰된 바와 같이 유럽에서조차 그들은 그 과정에 대해 상세하게 언급하지 않았으며, 이행을 일으킨 봉건주의 내부 모순에 대해서도 별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유럽의 중세에서 현대로의 이행은 맑스주의 역사가들에게 모든 문제 중에서 가장 어렵고도 흥미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다.
이것은 이제 자신들의 관점의 제안은 유럽 이외의 지역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인도에서 그들은 적어도 자본주의의 초기 형태는 영국 정복에 의해서 역사과정이 단절되었을 때 싹트게 되었다는 가정(이에 대한 적절한 증거는 결여되어 있지만) 아래서, 장기적 정체에 관한 맑스의 설명을 거부해 왔다. 일련의 아시아 맑스주의자들에게 보편적 결론은 서구의 강요에 분개하기는 커녕 유럽과의 동등성을 주장하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 1930년 중국에서 논쟁이 벌어졌으며 고립된 '아시아적 사회'라는 생각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기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 가운데 고대 중국에서 그리고 로마에 상응하는 노예제 시기를 찾아내는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관련자료]
Dirlik, Arif 978: Revolution and History The Origins of Marxist Histography in China, 1919-1937.
Enteen, George M. 1978: The Soviet Scholar-Bureaucrat. M. N. Pokrovski and the Society of Marxist Historians.
Evans, M. 1975: Karl Marx.
Glezerman, Grigory 960: The Laws of Social Development.
Hilton, R. H. ed. 1976: The Transition from Feudalism to Capitalism.
Kuusinen, O. ed. 1961:
■ 인접어

바덴 봉기
바르멘
바뵈프주의
바우어
바쿠닌
발전단계
배타주의 - 이기적 배타주의
버날
범슬라브주의
범죄


뒤로
■ 의견

 



HOME - 후원방법 안내 - CMS후원신청 - 취지문 - 사용 도움말 - 회원탈퇴하기

2002 노동자 전자도서관 "노동자의 책" 만들기 모임
120-702 서울시 중구 정동 22-2 경향신문 별관 202호 44
laborsbook@gmail.com
모바일버젼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