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책 처음으로 | 사전 | 자유게시판 | 회원자료 | 로그인

 

       ■ 의견바로가기

[모택동 ] (Mao Tse-tung)

1893년 중국의 호남성 상담현에서 태어나 1976년 9월 9일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맑스주의의 실천가로서, 어떤 경우에는 그가 말년에 맑스주의적 원칙에 입각한 혁명을 수행한 지도자로서 그의 위대성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한편 그가 실제로 어떤 독창적인 이론적 기여를 했는가, 그렇다면 그러한 이론적 기여가 맑스주의의 발전을 도모한 것인가 악용한 것인가에 대한 활발하면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독창적이고 중요한 것을 실행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거기에 역점을 두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듯 새로운 것이 맑스주의와 조화를 이루는 것인가 또는 그렇지 않은가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그것이 맑스주의적임에는 틀림이 없다. 모택동은 '농민 혁명가'로서 찬사를 받기도 하였으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일반적으로 정통적이라고 간주되는 그 이상으로 농민에게 큰 역할과(무엇보다도) 어느 정도의 우선성을 부여하였지만, 그가 맑스주의에 반하는가 순응하는가의 문제는 우선 중국 사회 전체의 구조와 거기서 그가 유추한 결론을 고찰함으로써 비로소 가장 정확하게 밝혀질 수 있겠다.
모택동이 혁명활동을 시작했던 1920년대의 중국은 물론 경제적으로 매우 낙후된 국가였다. 이것은 노동자계급(또는 전위)의 헤게모니에 관해서 무엇을 이야기하든, 중국의 공산당은 혁명적 대의를 지지하는 최대의 유일한 사회세력을 이루는 농민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중국 사회는 (트로츠키가 상정했듯이) 자본주의가 지배적이지도 않았으며, 또 단순히 '봉건적'이거나 '반봉건적'이지도 않았다. 중국에는 제한적이지만 급속히 성장하는 도시 노동자와 더불어 중국인 자본가 또는 '민족 시민계급', 소수이면서도 막강한 힘을 지닌 지주계급, 농민(부농과 빈농, 소작농과 자작농), 기능공과 행상에서 외국 자본에 봉사하는 매판자본가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범주의 관료, 군국주의자, 승려, 산적, 시골의 유랑인 등이 있었다. 이렇듯 복잡한 사회구조는, 각기 다른 역사적 배경에 속하는 중국 내외의 영향으로 형성된 요소들과 계층들이 혼재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의 결과는 변증법에 대한 모택동의 해석에서 매우 커다란 역할을 한 ‘주요 모순’과‘주요 모순의 주요 측면’이라는 개념에 잘 나타나 있다.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지만, 맑스는 19세기의 영국과 프랑스에 관해‘오늘날 어떤 모순이 가장 일차적인가?’라는 문제를 전혀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중요한 모순은 노동자계급과 시민계급 사이의 모순이며, 그 모순이 사회주의 혁명에 의해 해결될 때까지 항상 그 상황이 유지된다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여겼다. 그와 반대로 모택동은 자신이 맑스주의적 분석으로 간주하는 것에 비추어, 중국과 세계에서의 결정적 고리를 어디서 끌어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을 자신의 가장 긴급한 실천적 과제로 보았다. 물론 어느 의미에서 볼 때, 그는 맑스에 의해서 개괄되고 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농민뿐만 아니라 다른 계급과 집단도 민주혁명의 단계에는 참여할 수 있으며, 해당 국가의 여러 계급들의 형태는 외국의 지배라는 사실에 영향을 받는다고 했던 레닌(그리고 스탈린)에 의해서 발전된 분석 노선을 답습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이러한 개념들을 체계화하여 정립하였으며, 그것으로부터 그가 일반적인 타당성을 부여한 철학적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실천은 일차적이며 이론은 이차적이거나 부수적이다 라는 그의 관점과 함께 그가 혁명에 접근하는 차원이었다. 이것은 모택동과 그의 사상에 대한 서로 상반된 해석을 낳게 하였다.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는 그의 전술과 기술의 유연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1960년대 이후 소련의 맑스주의자들처럼), 모택동이 1938년과 1945년 그리고 1950년대 초에 '민족 부르주아지'에게 양보했던 점을 들어 투항주의자이거나 전체적으로 무원칙한 기회주의자, 또는 그 양자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그가 계급투쟁과 노동자계급의 가치를 강조하고 최후까지 무자비하게 혁명을 수행했다는 점을 중요하게 보는 사람들은 그를(특히 1950년대 후반 이후)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모든 주요 지도자나 이론가들 중에서도 가장 철저했다고 기술하였다.
모택동의 전술과 사상의 일반적 원칙과 관련된 그러한 두 가지 평가에는 진실이 깃들어 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문제점은 모택동이 '노동자계급'의 의미를 어떻게 인식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물론 그는 최소한 1920년대 이후, 맑스주의가 도시 노동자에게 부여한 선도적 역할을 깨닫고 있었으며, 원칙적으로 그러한 철칙을 인정하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노동자계급'이라는 용어에 대한 그의 이해는 중국식 표현인 무산계급(無産階級)의 문자상의 의미에 의해 어느 정도 채색되었다. 그러나 그는 도시 노동자계급 혁명의 헤게모니를 일관되게 인정하였다. 종종 강조되어 오긴 했지만 보다 중요하고 의미 있는 문제는 노동자계급의 객관적 본질과,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기, 또는 노동자계급의 가치 사이의 관계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모택동은 일찍이 1928년, 농촌 부랑자들과 기타의 구성인자들이 혁명적 실천에 참가함으로써 노동자계급 전위의 전사로 변형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경향은 반세기 동안 줄곧 그의 사고에 일관된 것이었다. 그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1966∼67년의 '문화 대혁명'에서 특히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모택동은 (종종 주장되는 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계급에 대한, 그리고 특히 노동자계급에 대한, 전적으로 주관적인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객관적 기준과 주관적 기준을 부분적으로는 편의상으로, 그러나 또 역사에서 주관적인 힘의 중요성에 대한 자신의 신념에 의해 형성된 복잡하고 변화하는 틀 속에 결합시켰다. 이러한 폭넓은 논제에 관해 아더 코헨(1964)은 모택동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스탈린이 1938년과 1950년의 저서에서 그 길을 열 때까지) 상부구조가 역사적 변혁에서 '지도적이고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견해를 제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최근에 발견된 1937년판 원본 '모순론'은 모택동이 스탈린에 앞서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음이 입증되었다. 이것은 중국 스스로도 '자유주의적'이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기에 모택동의 사상과 당의 정책에서 나타나고 있는 경향의 원류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국의 맑스주의자들이 주관적 힘에 대한 과도한 강조를 비난하고 있음에 반해, '인간의 의식적 행위'는 역사적 힘으로서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보편적 견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 덧붙여져야만 하겠다.
상황에 따라 '주요 모순'을 구분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모택동이 강조한 의미에 관해 앞에서 언급한 점과는 별도로, 그의 변증법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헤겔과 맑스의 세 개의 법칙을 하나로 환원시킨 점이다. 즉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이 그것이다. 이것은 1937년의 '모순론'에 이미 나타나 있는데 여기서 그는 대립물의 통일의 법칙은 '사유의 기본 법칙'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이 법칙을 부정의 부정 법칙과 양의 질화 법칙보다 상위 개념으로 파악했음이 분명하다. 1964년에 그는, 자신은 부정의 부정을 '믿지 않으며' 또한 양의 질화 법칙은 단지 대립물의 통일에 해당하는 하나의 특수한 경우일 뿐이라고 하면서, 이상 두 개의 법칙을 분명히 거부하였다. 모택동의 사고가 이렇게 전개된 것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전통적인 도가(道家)사상에서 온 음양(陰陽)의 변증법의 발로라고 하며, 또 다른 학자들은 스탈린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어떻든 간에 이것은 논리적으로 볼 때 우리 모두에게 조금씩이라도 내재해 있는 수정주의적 경향과는 반대로 역사 발전을 모호하고 불확실한 과정으로, 그리고 지속적이며 점진적인 혁명의 진보를 마치 기적과 같은 것으로 보려는 점차 증대되는 모택동의 경향과 일치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면 모택동이 맑스주의에 기여한 긍정적 측면은 무엇인가? 첫째는 '대중노선' 이라는 개념이다. 물론 이것은 이론상으로 나마도 혁명투쟁(1949년 이전)이나 국가 운영(1949년 이후)을 실제로 인민 스스로에게 넘겨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주의와 소련의 전통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아래로부터의(엄격한 제한과 당의 지도 하에) 민주적 참여의 요소를 도입하고 있다. 둘째는 그가 때때로 정확한 지도 하에 동원될 때 자연과 사회를 의지대로 변형시킬 수 있다는 대중의 능력을 예외적일 정도로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마치(대부분의 서구 맑스주의자들에게서 역사철학에 인간의 변혁은 경제적 및 기술적 진보를 수반하고 또한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지, 결코 일종의 부산물과도 같이 그러한 진보로부터 단순히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상을 도입(혹은 또 겹쳐놓듯이)하였다는 데 있다. 대체로 레닌(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독재)과 스탈린(4계급 블록)으로부터 이끌어 낸 1949년을 전후한 부르주아의 혁명 참여와 관련된 그의 사상은 비노동자계급적 요소들을, 아시아에서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의 통합을 진일보시킬 정도로, 중국의 혁명 과정에 통합시켰다(물론 어떤 사람은 이것을 잘한 것으로 볼 것이며 또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관료주의에 대한 대대적인 투쟁을 시작하면서 오히려 이것을 비생산적일 만큼 폭력적이며 부당하고, 또한 무질서하게 이끌어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기서 앞으로 전개될 일정에 문제점을 제기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제 처음에 논의됐던 모택동 사상의 측면으로 되돌아가 보면, 그는 농민에 대한 노동계급의 지도력이라는 맑스주의 및 레닌주의의 원칙을 위배하지 않았다. 즉 그가 1959년에 밝힌 바도 있듯이, 이 관계에서 노동자는 '형(兄)'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는 이 원칙(최소한 그것이 마르크스에게 보여졌던 바와 같은 모든 의미가 그에게 인식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에 중국 사회의 중력의 중심은 농촌에서 발견될 것이며, 농민은 새로운 사회주의 중국의 건설에 능동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결합시키고자하였다. 그가 제기했지만 해결하지 못한 이 문제와, 농촌 중국과 도시 중국 간의 모순은 그가 죽은 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결과야 좋든 나쁘든 간에, 산업화와 농민을 교육시키는 노동자를 통한 구원이라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도식은 모택동이 제시한 방향에서 큰 수정이 없이 채택되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관련자료]

Cohen, Arthur A. 1964: The Communism of Mao Tse-Tung.
hsiung, James Chieh 1970: Ideology and Practice. The Evolution of Chinese Communism.
Mao Tse-Tung 1961-77: Selected Works.
-(1949-1968) 1974: Miscellany of Mao Tse-tung thought.
Schram, Stuart R. 1969: The Political Thought of Mao Tse-tung.
-ed. 1974; Mao Tse-tung Unrehearsed.
-1977: 'The marxist'. In Dick Wilson ed.
Mao Tse-tung in the Scales of History.
Starr, John Bryan 1979: Continuing the Revolution. The Political Thought of Mao.
Womack, Brantly 1982: The Foundation of Mao Zedong's Political Thought.
■ 인접어

메이데이
멘셰비키
명령주의
모순
모스크바 선언과 모스크바 성명
모택동
모택동
모험주의
무신론
무장봉기・군사문제
무정부주의

뒤로
■ 의견

 



HOME - 후원방법 안내 - CMS후원신청 - 취지문 - 사용 도움말 - 회원탈퇴하기

2002 노동자 전자도서관 "노동자의 책" 만들기 모임
120-702 서울시 중구 정동 22-2 경향신문 별관 202호 44
laborsbook@gmail.com
모바일버젼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