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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 (caste)

1850년대에 마르크스는 인도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특히 《뉴욕 데일리 트리뷴》지에 실린 그의 논문과 《요강》에 있는 여러 문구들) 그러나 그는 주로 아시아적 사회의 일반적인 특징인 촌락공동체에 있어서 '공동체 소유'의 존재와 인도 사회가 영국 자본주의에 준 충격에 대해 주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카스트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Thorner 1966) '인도에서의 영국지배의 미래'에서 마르크스는 카스트에 대해 주요한 언급을 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 사이, 부족과 부족 사이, 그리고 카스트로 분할된 사회, 즉 모든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혐오감과 제도적 배타성으로부터 발생되는 일종의 균형에 기초를 둔 사회체계'가 '정복될 수밖에 없는 대상'은 아니었던가 라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영향에 대해서, '철도망으로부터 등장한 현대산업은 인도의 진보와 인도의 힘에 결정적 장벽인 카스트에 기반한 세습적 분업을 분해시킬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그 이후 몇몇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카스트제도를 분석하거나 설명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들은 네 개의 계급체계로 광범위하게 분류된 바르나스[Varnas]를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로사스(1943)는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계급사회의 본질을 흐리게 하며, 봉건형태들은 종종 아시아적 사회로서의 인도의 특징을 흐리게 한다고 주장한다.(p. 159) 그러나 로사스는 무수한 소규모 지역 카스트 집단들(jatis)의 존재를 포함한 극히 복잡한 카스트제도는 오직 인도에서만 존재하며, 인도의 발전은 현재의 지식수준을 기초로 해서는 분명하게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p. 162)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에 동조적인 인도 역사가(Kosambi 1944)는 로사스의 설명이 '많은 유용한 내용들을 망각했다.'고 비난한다.(p. 243) 한편 비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은 카스트제도에는 중요한 계급적 요소들이 존재한다고 인식해 왔다. 즉, 스리니바스(1959)는 토지를 소유한 카스트(계급)는 '관례적 신분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지배력을 행사하였다.'고 고찰한다. 또 베테일리(1965)는 '전통 사회에서 50년 전만 하더라도 … 토지의 소유·비소유와 생산조직 내에서의 관계들은 상당한 정도로 카스트와 관련된다.'고 주장한다.(p. 191)
그러나 대체로 학자들은 지역 카스트 집단들을 막스 베버의 관점에서와 같이 신분 집단으로 간주하게 되었다.(B teille 1965, p. 188 →계급 ; 마르크스주의 비판) 즉 생산체계는 그들의 신분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생활양태'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카스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역사의 초기에 우리는 거의 모든 곳에서 다양한 계급으로 인한 사회의 복잡한 배치와 사회계급의 여러 계층을 발견한다.'고 서술하면서 규정지었던 범주에 적용된다.(《공산당 선언》1절) 문제는 그러한 '다양한 계층'과 그것의 특별한 경우로서 카스트제도가 사적 유물론의 범주에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비록 '연구의 지침'(엥겔스는 그것을 1890년 8월 5일 슈미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다.)으로서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개념들에 영향을 받는다 할지라도, 이러한 상황에 어떤 특별한 설명이 필요한가(예를 들면 카스트에 대한 종교의 영향 →Dumont 1967, 힌두교)하는 것이다. 후자의 가능성은 마르크스주의 학자와 비마르크스주의 학자들 모두가 카스트와 계급 간의 밀접한 상호관계를 인식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지지를 받고 있다. 게다가 인도에서는 중요한 변혁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중요한 경제적 이익집단으로 출현한 '카스트조합'(Caste Associations)은 가장 의미심장한 변화 중의 하나이다.(Bailey 1963, pp. 122∼135)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인류학자 및 사회학자들에 의한 카스트 연구는 아직도 초보단계에 있음이 분명하다.

카우츠키 Kautsky, Karl 1854년 10월 16일에 프라그에서 태어나 1938년 10월 17일 암스테르담에서 사망하였다. 카우츠키는 비엔나 대학에서 역사, 경제 그리고 철학을 공부했고 학생신분으로 사회주의 경향의 신문에 글을 썼다. 1875년에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에 가입했고 1880년에 취리히로 이주하여 베른슈타인과 친구가 되었다. 1885년에서 1890년 사이 런던에 머무는 동안 그는 엥겔스와 가깝게 지내면서 함께 일을 했다. 반사회주의법이 폐지된 후에 그는 독일로 돌아왔으며, 사회민주당(SPD)의 지도적인 이론가로서 자리를 굳히고 에르푸르트 계획의 이론적인 부분을 담당했다.(1891) 그는 1917년까지 SPD에 몸담고 있었다. 그 이후에는 분파된 독립사회민주당(USPD)에 가입했다. 1922년에 SPD로 다시 되돌아갔으나 예전과 같은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그는 1934년에 프라그로 이주하였으나 곧 추방되어 암스테르담에서 사망하였다. 카우츠키는 1889∼1914년 사이에 제2 인터내셔날의 지도적인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로서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원리를 수립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신 시대》(1883년부터)라는, 1848년 이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잡지를 편찬했고 처음에는 특수한 문제, 즉 농업문제 그리고 그 후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베른슈타인에 반대하면서 '수정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성'을 옹호하였다. 1880년대에 엥겔스와 함께 활동한 후에 그는 마르크스의 《철학의 빈곤》을 번역하였고, 그 이후에는 《잉여가치론》을 편집하였다. 그는 마르크스의 경제적, 철학적 이론들을 대중화한 수많은 저서들을 썼으며, 마르크스주의를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연구(1908)와 그리고 공상적, 종교적 사유의 본질에 적용하였다. 그의 초기의 지적 향방은 자연과학적 유물론, 특히 벅클, 헥켈, 다윈의 자연과학적 유물론이었다. 그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도 이러한 자연과학적 유물론의 연장선상에서 변화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자연과학적 유물론이라는 그의 견해의 요지를 사회에 적용한 것이 《유물론적 역사 이해》(1927)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보다 결정적인 측면에 대한 그이 접근방식은 마르크스주의를 단순한 분석방법이 아니라, 혁명적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길잡이로 생각했던 사람들과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권력에 이르는 길》(1909)은 '수정주의자들'을 제외하고서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카우츠키의 마지막 저서이다. 이 책에서 카우츠키는 노동계급이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직접적으로 혁명적 행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극히 흥미로운 것은 종주국의 노동계급과 식민지 민족해방운동 사이의 동맹 가능성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대중파업에 관하여 룩셈부르크와 논쟁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점차 마르크스주의 좌파로 빠져들어 갔다.(Kautsky 1914) 제국주의가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는 이론적인 확신에 근거한 세계 제1차 대전에 대한 그의 입장은 레닌에 의해서 비판을 받았다. 볼세비즘에 대한 그의 비판,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반대(1918),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지지는 레닌에 의해서 '변절자'라는 오명을 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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