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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 (3 MB)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
김지하 지음
출판사 - 동광출판사
초판일 - 1984-11-25
ISBN -
조회수 : 2390

● 목 차

동짓날 밤 자시에

제1부 譚詩

櫻賊歌 = 13
糞氏物語 = 38

제2부 戱曲

金冠의 예수 = 93
구리 李舜臣 = 143

제3부 評論

諷刺냐 自殺이냐 = 171
民族의 노래 民衆의 노래 = 191

제4부 對談

民衆은 生動하는 實體 =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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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김지하의 문예이론에 대하여
- ‘흰 그늘’의 미학을 중심으로

1. 김지하와 ‘흰 그늘’의 길

김지하는 1970년대 이래 우리 시사의 대표적인 시인으로서 활발한 시작 활동과 더불어 문예미학과 생명론에 관한 깊은 문제의식을 지속적으로 개진해왔다. 물론 그의 문예미학과 생명론은 자신의 시 창작의 형식론과 내용가치의 밑그림으로 작용해왔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이론적, 사상적 문제의식과 저술 활동은 단순히 시 창작의 부가적 차원을 넘어 민족미학과 생명론의 현재적 재창조를 선도해온 위상을 지닌다.
그의 문예미학론은 1970년「풍자냐 자살이냐」를 발표하면서 전통민예의 잠재적 가능성과 의미를 날카롭게 제기한 이래,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1970),「민중문학의 형식문제」(1985)등을 거쳐 『율려란 무엇인가』(1999),『예감에 가득 찬 숲 그늘』(1999),『탈춤의 민족미학』(2004),『흰 그늘을 찾아서』(2005)등으로 이어지면서 우리 민족민중민예의 생성, 의미, 구성 원리, 미래지향적 가치 등에 대한 천착을 매우 폭넓고 다채롭게 보여주었다.
한편, 그의 생명론은 문예미학과의 연속성 속에서 전개된다. 창작판소리「오적」등에서 보듯 전통 민중민예 양식과 세계관이 그의 초기 문학세계에서부터 기본 바탕을 이루었으나 1970년대 군사정권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과 투쟁의 역정이 전면화 되면서 잠복기의 양상을 보이다가 1980년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구체화된다. 1980년대 시집 『애린』(1986)연작을 마디절로 『별밭을 우러르며』(1989),『중심의 괴로움』(1994)을 거쳐『흰그늘의 산알 소식과 산알의 흰그늘 노래』(2010)에 이르기까지 심화, 확장되어온 치유, 소통, 생태적 상상이 이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와 같이 그의 시 세계를 통해서도 구체화된 생명사상론은 우리나라의 전통 종교, 철학, 예술, 과학 등에 중심을 두면서 서구의 다양한 학문적 성취를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방법을 통해 지속가능한 생명 발전을 위한 보편적인 생명학의 지평을 열어나간다. 특히 그의 『김지하의 화두』(2003),『생명과 평화의 길』(2005),『촛불, 횃불, 숯불』(2010),『디지털 생태학』(2010)등은 문명적 전환의 동력을 현재적 삶 속에서 발견하고 평가하고 의미화 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 글에서는 김지하의 생명의 세계관에 입각한 문예미학의 핵심적인 내용가치와 구성 원리에 해당하는 ‘흰 그늘’의 미의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가 1999년부터 언급하기 시작한 ‘흰 그늘’의 미학은 그동안 자신이 추구해온 문예미학, 철학, 인생론 등의 성격과 가치의 총체적인 표상이다. 다시 말해, 그에게 ‘흰 그늘’은 스스로의 자전적 인생론과 문예미학론, 사상론에 대한 귀납적인 의미 규정이면서 동시에 인생론, 사상론, 문예미학의 방향을 결정하는 연역적 명제이다. 그는 ‘흰 그늘’의 반대일치의 역설이 생명의 생성 및 진화론의 원리에 상응한다는 점을 규명하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전통적인 생명문화의 구성원리라는 점을 민족 민중 종교, 사상, 민예 등은 물론 동서양의 과학, 생명학을 넘나들면서 분석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흰 그늘’의 미학이 민족미학의 핵심원리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생명학의 원형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흰 그늘’의 미학은 생명 지속적 발전을 지표로 하는 21세기 문명적 가치의 기준이며 원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김지하의 ‘흰 그늘’의 미학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해 보기로 한다. 이러한 작업은 그의 ‘흰 그늘’의 미학에 대한 이해이면서 동시에 그의 문학적 삶과 생명사상의 요체를 이해하는 데 유효할 것이다.

2. ‘흰 그늘’의 미학의 내용과 성격

김지하의 문예미학은 물론 인생론과 사상론의 요체는 “흰 그늘”의 모순형용으로 표상화 된다. 그러나 그의 문예미학론에서 ‘흰 그늘’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것은 1999년부터이다. 그는 이때부터 그동안 꾸준하게 추구해온 자신의 민족민중문예 미학은 물론 어둠의 세력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에서 어둠의 세력까지 순치시켜 포괄하는 살림의 세계에 대한 시적 삶의 역정을 “흰 그늘”이라는 감각적 표상으로 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는 생명의 존재 원리와 전통문화예술이 내재하고 있는 생명의 이치를 “흰 그늘”의 미학 속에서 규명하고 있다. 그에게 “흰 그늘”은 생명시학을 추구해온 자신의 시적 삶에 대한 인식이면서 동시에 생명학의 인식 방법론이며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점은 ‘저항’에서 ‘생명’을 끌어낸 자신의 시적 삶과 생명학에 대한 인식론이 연속성을 이루는 면모로 파악된다.
한편, ‘흰 그늘’의 미학은 1990년대 중반부터 그가 언급해 온 ‘그늘’의 미의식의 연장선에 놓인다. ‘그늘’의 미의식이 역동적이고 입체적인 감각으로 표상화 된 것이 ‘흰 그늘’로 파악된다. 따라서 ‘흰 그늘의 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늘’의 미의식에 대한 이해의 선행이 요구된다. ‘그늘’이란 주로 판소리에서 통용되는 용어로서 그 일반적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판소리 용어에 그늘이라는 말이 있다. 판소리 가락을 오랜 수련을 통해서 잘 삭혔을 때 시김새가 붙었다, 시김새가 좋다고 하거니와 시김새가 좋은 광대의 소리에서 빚어지는 미적인 운취를 ‘그늘’이라고 한다. ‘그늘’이란 시김새 좋은 판소리에서 빚어지는 웅숭깊은 여운, 여유, 멋을 이르는 말이다. 비유컨대 노래의 씨를 뿌려 싹이 트게하고 비바람을 견디며 자라게 하여 거목을 가꾸는 과정을 광대의 경우에 있어서 시김새를 획득하는 과정이라고 비유한다면 거목으로 자란 나무가 울창하게 가지를 뻗어 온갖 새들을 그 품에 안는 너그러운 여유, 그것이 곧 그늘이라 하겠다. 그런데 그늘이라는 말은 판소리의 경우만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성숙해가는 과정에 있어서 윤리적 미덕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그야말로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해간다. 이렇게 성숙한 사람, 여유 있는 사람을 일러 그늘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그늘’의 의미를 요약하면 ➀ 광대의 잘 삭힌 시김새에서 배어나오는 운취, 멋, 웅숭 깊은 여운 ➁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서 도달하는 인간적 성숙함 등으로 정리된다. 여기에서 시김새란 신산고초의 삶의 직접적인 표출이 아니라 인욕정진을 통해 육화된 소리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그늘’이란 판소리는 물론 사람의 내면에서부터 배어나오는 유현하고 그윽한 미감을 가리키는 보편적 용어로 통용된다.
김지하는 이와 같이 비교적 추상적이고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그늘’에 관한 미의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여 자신의 문예미학으로 끌어온다. 다음과 같은 그의 언급은 시적 언어와 이미지의 내적 근원으로서의 ‘그늘’의 의미와 가치를 집중적으로 전언하고 있다.
그늘이란 몽양(蒙養)이라 했을 때의 ‘몽(蒙)’즉 태고무법과 같이 얽혀지고 설켜져서 말로는 규정되지 않고, 해명되지 않는, 애매하고 불확실하고 통괄적인 것 같으면서도 뭔가 그 안에 들어 있는 날카로운 어떤 것이지요.(……) 그늘은 어떻게 생기느냐 하면 두 가지인데, 우선 삶의 신산고초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피나는 수련의 경과에서 나옵니다. 신산고초라는 것은 삶에 투항하고 야합하는 사람에게는 생기지 않습니다. 삶의 장애들을 어떻게든지 이겨내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신산고초가 따르는 것이지요. 수련도 마찬가지입니다. 피투성이로 계속 반복하고 노력하여 장인적인 수련을 거치는 동안에 문득 얻어지는 익숙한 답 혹은 달관의 세계에 이르는 과정이 수련이지요. 공부 없는 사람은 그늘이 생기지 않아요.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늘지게 하는 것은 뭐냐 하는 건데, 그것은 한(恨)입니다. 한은 그늘로 나타납니다. 그늘은 실제 이미지를 동반합니다. 그것은 악이기도 하고 선이기도 하고 맑기도 하고 탁하기도 하고 온갖 것이 다 복합된 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한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 그늘이 언어에서의 이미지의 모태입니다. 그늘은 밖에서부터 들어온 이미지가 아니라, 자기 삶을 통해서 생성된 이미지이지요.
위의 인용문에서 명시하는 ‘그늘’의 실체는 ① 애매하고 불확실하게 얽히고 설킨 태고무법(太古無法)의 혼돈한 기운. ② 신산고초의 체험적 삶과 자기 수련의 경과를 통해서 쌓일 수 있는 것. ③ 자기 삶의 내재적 원리를 통해 생성된 이미지의 모태 등으로 요약된다.
이를 다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①의 문면에서 ‘그늘’이란 아직 작품의 형상으로 실체화되기 이전 단계의 층위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규정될 수 없고, 보이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없음’이면서 동시에 예술 작품의 미적 생성이 가능하도록 작용하는 이면의 중심적인 힘이라는 측면에서 ‘있음’의 존재, 즉 ‘없음’의 ‘있음’에 해당하는 활동하는 무(無)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②에서 ‘그늘’이란 “삶에 투항하고 야합하지 않는” 사람에게생성된다는 것은 ‘그늘’의 내용적 성격을 암시해 준다. 즉, ‘그늘’은 현실적 삶을 진실하게 실현해 나가는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는 생명의 원상, 본질, 본디 성품을 그 내용적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다. ③은 ‘그늘’이 예술작품의 형상적 이미지를 형성시키는 내적 토대, 근원적인 씨앗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즉, 그늘은 예술작품을 창작, 생성, 생기시키는 원천으로서 작용한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그늘’이란 예술 작품을 생성시키는 이면의 생성의 기운과 에네르기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생명적 에네르기란 신산고초와 수련을 통해 체득한 개인, 사회, 역사, 더 나아가 우주적 차원의 현묘(玄妙)한 생명적 본질과 근원을 핵심적인 내용으로 한다.
이렇게 보면, ‘그늘’의 성격은 칼 융(C. G. Jung)의 심원한 무의식으로서의 ‘그림자’와 유사한 범주에서 비견된다. 칼 융의 ‘그림자’는 집단무의식의 ‘태고 유형’에 해당하는 바, 무의식 속에 버려진 열등한 인격이며 자아의 어두운 면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의식은 사고, 감정, 감각, 직관 등의 심적 기능으로서 개인이 자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영역이다. 무의식은 개인 무의식과 집단무의식으로 구별되는 데, ‘그림자’는 집단 무의식의 ‘태고 유형’ 중의 한 요소로서 동물적 본성에 가깝다. 의식이 지나치게 ‘그림자’를 억압하면, ‘그림자’는 투사를 통해 왜곡된 인식을 외부에 투영한다. 자기 자신의 결점을 스스로 자각 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결점을 남에게 전가하여 공격하는 양상은 이러한 문맥 속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그림자’는 이를 대면하는 태도에 따라 병리적인(pathological) 힘이면서 창조적 생명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무의식에 버려진 그림자가 적절하게 의식화되면 어떤 일을 추진하고 생산하는 강한 힘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따라서 무의식을 대면하는 태도와 이를 생산적으로 의식화하는 노력이 중요하게 요구된다. 이렇게 볼 때, 칼 융의 집단 무의식론에서 ‘그림자’는 악이면서 선일 수 있으며 예술적 창조의 에너지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늘’과 상통한다. 또한 ‘그림자’를 어떻게 대면하여 의식화할 것인가 하는 점이 선과 악의 성향을 결정하는 관건이라는 점은 ‘그늘’을 직접 표출하느냐, 인욕정진을 통해 삭혀(삭힘)내느냐에 따라 미학적 성취 여부가 결정된다는 점과도 연관된다. 그러나 ‘그림자’가 의식 세계와 상대되는 집단무의식에서 태고 유형에 속하는 원시적 충동에 근간을 두고 있는 점은 ‘그늘’이 신산고초와 인욕정진의 결과물로서 의식과 무의식이 혼재하는 점이지대에 근간을 두고 있다는 점과 변별된다.
한편, ‘흰 그늘’에서 ‘흰’의 의미는 무엇일까? 먼저 이에 대한 김지하의 전언을 직접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늘 앞에 ‘흰’은 왜 붙었을까요? ( ------) ‘흰’은 우리말로 ‘신’도 됩니다. 머리가 흰 할아버지보고 ‘신할아비’라고 하죠. 우리 전통 사당패 놀이 같은 데 가끔 신할아비가 나옵니다. 머리가 하얗습니다. , 한, 불, 이런 것들이 전부 흰 빛, 성스럽고 거룩한 초월성, 소위 ‘아우라’올시다. ‘흰’입니다. 그늘이 어두컴컴하면서도 그 안에 서로 대립되는 것들이 이리저리 얽히는 과정이라면, 그 안에 숨어 있는 성스러운, 거룩한, 일상과는 전혀 다른 새 차원을 ‘흰’이라고 합시다. 그 차원이 드러난 차원으로 떠올라오는 것을 ‘흰 그늘’이라고 합니다.
인용문에서 ‘흰 그늘’의 ‘흰’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를 요약적으로 이해하면, ① ‘흰 그늘’의 ‘흰’은 초월적 아우라로서 어둠의 혼돈과 얽힘의 ‘그늘’과 대조된다. ② ‘흰 그늘’의 ‘흰’의 출처는 그늘이다. 그늘 속에 숨어 있는 성스럽고 거룩한 것의 승화가 ‘흰 그늘’이다.
이러한 ‘흰 그늘’의 미의식을 판소리의 실예를 통해 언급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술적으로 그것은 피를 몇 대접씩 쏟는 독공의 결과로 슬픔과 기쁨, 웃음과 눈물, 청승과 익살, 이승과 저승, 사내와 계집, 나와 너 등 온갖 상대적인 것들을 함께 또는 잇달아 하나로 또는 둘로 능히 표현할 수 있는 성음인 ‘수리성’을 ‘그늘’이 깃든 소리라고 한다. ( ------ ) 바로 이 같은 ‘그늘’도 귀신울음소리(鬼哭聲)까지 표현할 정도래야 진정한 예술로서 지극한 예술(至藝)에 이르고 지예만이 참 도(道)에 이르는 것이다.
귀곡성까지 가려면 ‘그늘’만으로는 부족하다. 우주를 바꾸려는 신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시켜야 하는 데 그러자면 그늘이 있어야 하고 그 그늘만 아니라 거룩함, 신령함, 귀기(鬼氣)나 신명(神明)이 그늘과 함께 있어야하며 그늘로부터 ‘배어나와야’한다.
인용문을 바탕으로 판소리에서 ‘흰 그늘’을 요약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늘’은 신산고초의 삶에 대한 분노나 폭발이 아닌 ‘삭힘’으로 인욕정진할 때 깃들 수 있다. 이러한 ‘그늘’에는 서로 상대적인 것이 연속성을 이룬다. ‘흰 그늘’은 이러한 그늘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 도달된다. 판소리에서는 ‘귀곡성’이 이에 해당한다. ‘귀곡성’은 그늘로부터 신령함, 귀기(鬼氣)나 신명이 배어나올 때 가능하다. 이 경지를 ‘흰 그늘’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흰 그늘’의 미학은 ‘그늘’에서 초월의 아우라가 상승하는, ‘그늘’의 지극한 경지를 가리킨다. 즉, 중력과 초월, 속과 성, 지상과 천상의 통일이 사람을 통해 성립된 경지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예술의 지극한 경지를 가리키는 ‘흰 그늘의 미학’에서 세계변화의 동력을 찾을 수는 없을까? 다시 말해, ‘흰 그늘의 미학’을 우주변화의 미의식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계기성은 없을까? 이러한 물음 앞에 1850년 충청도 연산의 연담 이운규가 제시한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 즉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는 문구가 떠오른다.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에서 천심월(天心月)은 주역에서 가리키는 “우주핵으로서 한울님의 마음”을 뜻한다. 여기에서의 천심월이 인간의 존재핵, 황중월(皇中月) 즉 사람 마음의 최심층과 일치한다면 우주변화의 힘으로서의 ‘그늘’의 미의식을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김지하는 천심월이 인간 마음의 가장 심층부에 내재한다는 논리를 적극적으로 규명한다. 『천부경』에 등장하는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 즉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이 하나를 이룬다는 논리나 『삼일신고』에 나오는 강재뇌신(降在腦神), 즉 신은 머리(뇌) 속에 내재한다는 논리를 통해 이를 설명한다. 이렇게 보면,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는 것은 그늘로부터 숨은 신령이 드러남을 통해 우주를 변화시킨다는 것인 바, 곧 ‘흰 그늘’을 가리킨다. 따라서 ‘흰 그늘의 미학’은 궁극적으로 우주변화의 원리까지 닿아 있게 된다.
그렇다면, 우주변화의 원리를 추동할 수 있는 ‘흰 그늘의 미학’의 구체적인 예술적 양상은 어떤 것일까? 김지하는 이에 대해 한민족 생명 문화의 원류에 해당하는 풍류도에서 찾아낸다. 고조선 단군에서 발원하여 신라의 화랑으로 이어진 한민족의 심원한 민족종교이며 사상에 해당하는 풍류도의 최고의 문헌적 자취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鸞郞碑序)」이다. 그 일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國有 玄妙之道 曰 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나라에 깊고 오묘한 도가 있으니 가로대 풍류라 한다. 그 가르침을 세운 내력은 『선사』에 상세히 실려 있으며, 실로 삼교를 포함한 것으로 뭇 백성과 접촉하며 교화하는 것이다.)
김지하가 최치원의 「난랑비서」에서 가장 주목하는 지점은 ‘접화군생(接化群生)’이다. 그에 따르면, ‘군생’은 ‘뭇 삶’ 즉 인격, 비인격, 생명, 무생명을 포괄하는 일체우주만물을 뜻하고 ‘가까이 사귄다’는 ‘접(接)’은 널리 이롭게 하는(弘益) 공공성과 소통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접화군생(接化群生)’이란 인간의 우주만물에 대한 친밀한 관여로서 인간에 대한 사회적 공공성인 천지공심(天地公心)의 실현을 가리키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와 같은 접화군생을 예술미학에 대응시키면 모든 삼라만상을 사귀어 감화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이를 또한 연담 이운규가 제시한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과 연관시키면, ‘흰 그늘의 미학’은 모든 삼라만상의 심층에 내재하는 ‘천심월’을 감화시켜 우주생명의 질서를 열어가는 차원에 이를 때 완성된다는 것으로 파악된다. 여기에 이르면 ‘흰 그늘의 미학’의 세계변화의 계기성이 마련된다.

3, ‘흰 그늘’의 모순어법과 생명의 논리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흰 그늘의 미학’은 ‘흰’과 ‘그늘’이라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연속성을 이룬 반대일치의 형용모순으로 이루어진다. 드러난 질서는 상극이지만 보이지 않는 질서는 상호 의존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드러난 질서는 ‘아니다’이지만, 그 이면의 보이지 않는 질서는 ‘그렇다’이다. 김지하는 ‘흰 그늘의 미학’이 지닌 이와 같은 ‘아니다 그렇다’, ‘그렇다 아니다’에 해당하는 역설의 논리가 생명의 생성 및 진화론의 논리와 동일성을 지닌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렇게 되면, ‘흰 그늘’은 생명의 존재론의 감각적 표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흰 그늘’의 역설을 동학의 「不然其然」편의 이중적 교호작용과 연속성 속에서 파악한다. “불연기연(不然其然)”, 즉 ‘아니다 그렇다’는 변증법적 세계관과 뚜렷하게 차별된다. 변증법의 전개과정이 테제와 안티테제가 진테제라는 합목적적인 제 3의 지양과 통합으로 향하는 삼진법의 구도로 설명되는 것과 달리, “불연기연”은 보이는 차원 밑에 숨어 있던 보이지 않는 차원이 드디어 보이는 차원으로 차원변화 하는 이진법적 양식이다. 다시 말해, “숨은 차원은 드러난 차원을 추동, 발전, 변화, 수정, 개입, 보조하다가 드러난 차원의 해제기에 숨은 차원 스스로 드러난 차원으로”가시화 되는 것이다. 이때 드러난 차원은 ‘아니다’이고 숨은 차원은 ‘그렇다’이다. 이러한 이중적 교호작용의 역설적 원리는 생명 생성론의 다양한 국면에 적용되는 데, 드러난 질서와 숨겨진 질서 사이의 ‘아니다 그렇다’의 관계, 드러난 질서 내부의 대립적인 것 사이의 기우뚱한 균형을 이룬 ‘아니다, 그렇다’의 관계, 근원적 질서가 새로운 현상의 드러난 질서로 생성하기 시작했을 때 그 새질서를 지배하는 대립과 상호보완성의 역설 등이 모두 해당된다.
한편, 김지하의 변증법에 대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과 문맥을 같이 한다. 아도르노에게 헤겔의 변증법이란 부르조아적 이상론에 입각한 주관과 객관의 비동일성을 동일화하는 개념화이며 유형의 더미라고 파악한다. 따라서 그에게 테제와 안티테제가 진테제를 향해 지양, 극복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허구이다. 이미 부재하는 진테제를 향해 간다는 것은 합목적적인 형식론에 그칠 뿐이다. 그는 헤겔의 변증법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허구적인 개념화를 차단하고 개별화를 강조하는 부정의 변증법을 내세운다. 김지하의 변증법에 대한 인식 역시 이와 연속성을 지닌다. 그에 따르면, 정반합(正反合)에서 정반(正反)의 이중성은 동의하지만 합의 과정은 정반의 숨어 있던 차원이 살아 생동하여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동일 현실의 연장선에서 인위적으로 조직하고 취합하는 데 그친다는 것이다. 즉, 변증법은 드러난 질서의 표면에만 주목하는 데 그치면서 숨은 질서의 동력을 봉인하는 과오를 반복했다고 본다.
그러나 불연기연의 역설은 드러나고 숨겨지는 중층적인 이중생성, 내면으로부터 솟아나는 새로운 질서의 잠재적 가능성을 포괄해 낼 수 있다. “생명 운동이나 정신운동 심지어 물질운동까지도 그 기본 구조는 이중적”이며 “디지털 같은 것이 뇌의 모방이면서 이진법원리의 집결”이다. 이와 같이 ‘아니다 그렇다’, 즉 불연기연(不然其然) 의 이진법적 모순 어법이 생명의 생성원리라는 점은 동학에서 제시한 진화론을 통해 볼 때, 더욱 구체적으로 분명해진다.
동학의 진화론은 다윈의 적자생존론을 극복한 것으로 평가되는 테야르드 샤르댕의 생명의 자기조직화론과 상응하면서 동시에 이를 넘어서고 있다. 김지하의 이 점에 대한 명료한 해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진화의 내면에 의식의 증대가 있고inward consciousness
진화의 외면에 복잡화가 있으며outward complexity
군집은 개별화한다union differentiates
2)안으로 신령이 있고內有神靈
밖으로 기화가 있으며外有氣化
한세상 사람이 각자각자 사람과 생명이 서로 옮겨 살 수 없는 전체적 우주유출임을 제 나름나름으로 깨달아 다양하게 실현한다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테야르 드 샤르댕의 진화론의 요체를 요약한 1)은 찰스 다윈의 약육강식의 투쟁론과 도태설의 적응론으로 설명한 진화론을 부정하고 생명의 자기조직화와 자기 조절기능을 바탕으로 한 창조적 진화설을 제시한 논의로 평가된다. 테야르 드 샤르댕의 이러한 우주진화의 3대 법칙은 수운 체제우가 1860년 4월 5일 주창한 본주문 2)에 대응된다. 1)의 진화의 내면에 의식의 증대가 있다는 것은 2)의 안으로 거룩한 우주적 신령함이 있다는 것에 대응하고, 1)의 진화의 외면에 복잡화가 있다는 것은 2)의 밖으로 신령한 기(氣)의 외화가 실현되고 있다는 것에 대응된다. 그런데 문제는 1)과 2)의 세 번째 항목의 차이이다. 1)의 군집은 개별화한다고 정리한데 반해 2)는 이 세상의 사람들이 제각기 개별적인지만 그 이면에 전체성을 실현한 개별자라는 점이 강조된다. 우주의 제 3 진화 법칙에 해당하는 김지하의 설명을 직접 전언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생명 모든 물질, 모든 의식은 먼저 전체 군집에서 발생하며, 그 이후에 서서히 개별성을 찾아 개별화하고 특수화한다는 법칙이다. 이것이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생물학의 정설이며 생물발생이론의 통설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최근의 세포 생물학과 생물학의 새로운 입론과 발견에 의해 반대로 뒤집혔다. ( 중략 ) 근원적인 생명 내면의 자유 활동에 의하여, 바로 그 자유에 의하여 생명개체들은 진화를 선택하며 발생과정에서 먼저 다양성, 다산성 혹은 돌연변이 등의 다양한 기제를 통해 개별화한다. 그리고 이 개별화 과정에서 개별적 생활 형식, 물질단위 속에 더욱 생동하며 확장하는 깊은 우주적 전체성을 실현함으로써 무질서하면서도 자발적 형태로 자유롭게, 또는 종잡을 수 없이 매우 독특한 형태로 다양하게 결합, 연계해 그물망, 즉 네트워크를 만들어간다.
인용문에서 보듯, 김지하는 진화의 원리란 개별화를 통해 전체적 유출을 실현하고 자유로운 네트워크를 이룸으로써 우주화하는 분권적 융합의 양상을 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수운 최제우의 이론은 서양의 생물학 보다 100여년 앞선 선견지명을 드러낸 것으로 평가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볼 때, 우주 생명학의 기본이 되는 생명 진화론 역시 ‘흰 그늘’에 상응하는 모순어법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체 속의 숨은 차원으로서의 전체성을 자각하고 자신의 양식에 맞는 분권적 융합의 형태로 자기의 생명형식을 조직화한다는 것은 앞에서 강조한 드러난 질서에서의 ‘아니다’와 숨은 질서에서의 ‘그렇다’가 서로 연속성을 이루는 반대일치의 양상을 지닌 경우이다. 따라서 ‘흰 그늘’은 모든 생명의 존재론과 진화론의 감각적 표상으로 정리된다.

4. ‘흰 그늘의 미학’ 과 한민족생명문화의 구성 원리

앞에서 살펴 본 바대로, ‘흰 그늘의 미학’은 생명예술론이면서 동시에 생명 생성론과 진화론의 논리와 상응한다. 그렇다면, 생명적 삶의 양식론 역시 ‘흰 그늘의 미학’과 상응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김지하가 한민족생명문화의 구성원리를 ‘흰 그늘의 미학’으로 읽어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로 보인다. 그의 생명사상은 ‘흰 그늘’에 상응하는 한민족 전통문화의 가치를 규명하고 평가하고 의미화하는 작업과 직접 연관된다. 따라서 그가 「흰 그늘의 미학 (초)」에서 한민족생명문화의 원류를 다채롭게 추적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는 전통문화의 생명적 원형에서 미래문화의 비전을 읽어내고자 한다. 그에게 특히 주목되는 한민족의 생명문화원류의 대표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요약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단군신화의 원리와 ‘흰 그늘’의 미학과의 상응관계이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웅은 영적 존재가 육적인 인간 세상에 내려온다는 점에서 이중적 교호작용, 즉 혼돈적 질서의 산물이다. 또한 굴속에서 쑥과 마늘을 먹고 백일을 견딘 이후 사람이 된 웅녀 또한 육의 영적 전환이라는 역설의 산물이다. 한편, 환웅과 웅녀의 결합 역시 지상으로의 하강과 천상으로의 상승의 만남이라는 모순 통합을 드러낸다. 이렇게 보면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의 주체가 혼돈적 질서의 자기조직화로서 ‘흰 그늘’의 모순어법에 상응된다.
다음은 고조선 시대의『천부경』에 대한 해석이다. 특히 김지하는『천부경』에서의 삼사성환오칠일(三四成環五七一: 셋과 넷이 고리를 이루어 다섯과 일곱이 하나가 된다)의 원리에서 탈춤, 판소리, 시나위, 민요, 풍물, 굿, 춤사위 등 전통 예술을 일관하는 한민족과 동아시아 예술의 미학원리를 읽어내고 있다. 그 핵심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셋과 넷, 혼돈의 질서, ② 고리를 이루어, 끝과 처음이 확장순환하는 고리의 시간관, ➂ 고리 속의 무궁, 고리 속에서 형성되는 ‘무궁무궁’의 차원 변화, ➃다섯과 일곱이, ➄ ‘한’으로 하나가 된다.
인용문에 대한 김지하의 해석을 요약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의 삼사성환(三四成環)에서 셋(三)은 천지인 삼극의 혼돈한 우주관의 표현으로 역동, 변화, 생성의 리듬이다. 사(四)는 둘의 배수로서 균형, 안정, 정착, 질서를 가리킨다. 한국 전통사상, 문화와 한국음악의 구성원리를 보면 ‘셋’의 삼수분화론, ‘넷’의 이수분화론이나 사수분화론으로 나누어지는 데, 삼사성환은 이 둘이 서로 교호작용을 하여 고리를 이룬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혼돈의 질서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우리 민족사상사에서 동학의 패러다임인 ‘혼원지일기(混元之一氣)’, ‘태극 또는 궁궁’(太極又形弓弓)의 원리와 연속성을 이룬다. 이러한 동학의 논리 또한 ‘흰 그늘’에 상응하는 창조적 역설의 생성론에 해당된다.
그리고 셋과 넷이 어우러져 고리(環)를 만든다는 것은 셋과 넷이 엇걸려서 ‘공소의 미’, 빈터, 무, 공, 허를 이룬다는 것이다. 다음 인용문은 엇걸이의 ‘고리’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에 용이하다.
혼돈의 질서가 역동과 균형의 엇걸이로 고리가 만들어지는 빈 마당의 지점에서 웃음과 눈물, 무의식과 의식, 칠식(七識)과 팔식(八識), 할미와 영감, 중과 창녀, 익살과 청승, 저승과 이승, 싸움과 사랑이 서로 부딪히고 어울리는 복잡한 그늘이 굿(제의), 불림(초혼)이 섞여들면서 초월성, 아우라, 희망, 화해, 상생의 신명들이 드러나 흰 빛을 뿜으며 제의적인 성스러운 넋풀이가 진행된다.
혼돈의 질서가 역동과 균형의 엇걸이로 고리를 생성하면서 빈 마당 안에 솟아나는 판으로 ‘무궁무궁’을 체험할 때(빈칸의 우주적 확대, 제로의 체험, 제로의 전개)비로소 리비도 등 무의식의 욕구불만이나 근친상간, 패륜 또는 패배와 회한 같은 중력체험, 귀신의 검은 그림자, 그늘이 탈춤의 마당극과 마당굿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② 고리의 시간관이란 끝과 시작이 서로 맞물려 있는, 그래서 처음과 끝이 없는 순환론적인 시간관을 특징으로 한다. 이를테면, 「천부경」의 “一始無始一”, 즉 한 처음이 처음이 아닌 하나요,에서 시작하고, “一終無終一”, ‘한 끝이 끝이 없는 하나다로 끝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김지하는 성환(成環)에 해당하는 고리의 시간관을 장자의 「제물론(齊物論」편에 나오는 ‘우주의 핵심은 그 고리 속을 얻음을 시작으로 하여 무궁에 응한다’(樞始得其 環中以應無窮)는 논리에 대응시킨다. 따라서 ③무궁무궁은 고리 속을 통해 얻어지는 우주적 무한을 가리킨다. ④ 다섯과 일곱, 귀신(무의식 속의 불온한 침전물인 그림자 따위의 콤플렉스, 한 등등)과 신명(집단 또는 심층무의식, 거룩한 영성, 신령, 흰 빛으로 표상되는 ‘아우라’나 초월성)이 ⑤ ‘한’은 하나를 가리킨다. 작은 것과 큰 것, 큰 것과 작은 것 사이의 관계, 개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전체를 이루는 분권적 융합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살펴본 「천부경」의 ‘삼사성환오칠일(三四成環五七一)’에서 ‘삼사성환’(三四成環) 의 음양의 2수분화론(二數分化論)과 천지인의 3수분화론(三數分化論)의 통합 논리는 김지하가 주창해온 ‘흰 그늘’의 모순어법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생명생성론의 기준으로 해석된다. 특히 그는 이천년대 들어와서 붉은 악마들을 통해 표출된 문화현상을 이러한 모순의 통합 논리의 연장선에서 해석하고 있어 이채롭다. 그가 붉은 악마로부터 주목하는 민족 전체의 고유 문화이며 전세계 인류의 새로운 문화의 기준은 다음 세 가지의 표상으로 요약된다.
① 엇박 ➁ 태극 ➂ 치우천황이다. ➀ 이박 플러스 삼박의 엇박은 음양의 2수분화론(二數分化論)과 천지인의 3수분화론(三數分化論), 즉 안정과 혼란, 질서와 변화의 이중적 교호작용을 통해 개진되는 새로운 차원의 혼돈의 질서, 역동적 균형에 대응한다. 그가 강조해온 천부경의 삼사성환, 동학의 혼원지일기, 태극과 궁궁의 생명 생성 논리가 붉은 악마의 엇박을 통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또한 ➁ 태극은 붉은 악마들이 들고 나온 태극기의 태극을 가리킨다. 태극의 표상은 역학의 음양법으로서 천지음양의 대립과 통일을 가리킨다. 이것은 빛과 그늘, 하늘과 땅, 남성과 여성, 역동과 안정의 통합이다. ‘아니다, 그렇다’의 교차적 생명논리와 모순어법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태극 또한 그가 일관되게 견지해온 생명생성 논리의 핵심원리를 구현하고 있다. ➂ 붉은 악마의 로고인치우천황은 4천 5백년 전에 살았던 신화속의 배달국의 제 14대 천황이다. 치우천황이 유명해진 것은 중국 화화족의 황제와 74회의 전쟁을 치러 승리한 전쟁신이란 점이다. 치우천황과 중국 황제의 긴 전쟁의 주된 배경은 문명적 가치관의 충돌이다. 중국황제가 남방계 정착문화의 영향에 따라 이를 기반으로 중국의 쇄신을 추구했던 것에 반해 치우는 남방계 농경 정착문명과 북방계 유목이동문명의 병행을 추구했던 것이다. 동이의 치우천황이 추구한 유목과 농경의 이중적 결합은 이중적 교호작용의 역동성을 표상한다. 따라서, 이천년대 들어 새로운 문화적 사건으로 드러난 붉은악마의 일련의 행위가 한민족생명문화원형의 현재적 표출로서 해명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민족생명문화의 어법은 ‘흰 그늘의 미학’과 상응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5. ‘흰 그늘’과 네오르네상스의 미학적 원형

김지하는 우리 시사에서 보기 드물게 시인이면서 동시에 문예이론가와 생명사상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지속해왔다. 그의 초기의 문예미학은 주로 문예창작의 보고(寶庫)로서의 민중민예의 잠재적 가능성과 민중문학의 형식론에 집중되었다면,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민족민중문화의 전통 속에서 살림의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들어 올리고 논리화하는 데 집중한다. ‘흰 그늘의 미학’은 이러한 그의 사상과 미학적 도정의 감각적 표상이면서 동시에 그가 추구하는 우주 생명학의 인식론이며 실천론이기도 하다. 김지하는 ‘흰 그늘’의 미학의 원리가 생명의 생성 및 진화의 원리이며 생명문화양식의 구성 원리라는 점을 규명한다.
‘흰 그늘’의 미학은 모순의 통합이다. ‘흰’과 ‘그늘’의 상대적 개념이 연속성을 이룬 것이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아니다’이지만 이면적으로는 ‘그렇다’이다. 이와 같이, ‘흰’과 ‘그늘’이 한 몸인 것은 ‘흰’이 ‘그늘’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산고초를 인욕정진의 자세를 통해 삭혀나갈(시김새) 때 생성되는 ‘그늘’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초월적 아우라 혹은 신성성으로서 ‘흰’을 표출하게 된다. 따라서 ‘흰 그늘’은 어둠의 중력과 밝은 초월성, 세속과 신성, 지상과 천상의 가치가 통합된 결정이다. 그래서 ‘흰 그늘’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미학적 계기성을 지닐 수 있다. 연담 이운규가 언급한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影動天心月)’고 할 때 우주의 핵에 해당하는 ‘천심월’이 인간 내면의식의 핵에 해당하는 황중월(皇中月)과 일치하는 지점, 즉 지상과 천상의 가치의 통일은 곧 ‘흰 그늘의 미학’에 대응되기 때문이다.
‘흰 그늘’의 미학의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에 해당하는 반대일치의 역설은 생명의 생성 및 진화론과 연관된다. 생명의 생성 및 진화론은 숨은 질서가 드러난 질서와 서로 추동, 발전, 교감, 수정, 개입 속에서 드러난 차원의 해제기에 숨은 차원이 드러난 차원으로 외화되는 이진법의 양상을 띄기 때문이다. 이점은 동학의 진화론 ‘내유신령 외유기화 일세지인 각지불이자야’(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에서도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또한 ‘흰 그늘’의 미학은 한민족생명문화 양식의 구성원리이다. 단군신화를 비롯하여 풍류도,『천부경』,『정역』, 그리고 동학을 비롯한 민족 종교는 물론 판소리, 탈춤, 시나위 등의 민중민예의 구성 원리 역시 ‘흰 그늘’의 역동적 균형의 이진법적 원리가 면면히 내재되어 있다.
이와 같이 ‘흰 그늘’의 미학은 주로 민족문화전통 속에서 규명되고 검증되고 평가되지만 동시에 세계적 보편성과 미래문화의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그에게 ‘흰 그늘’의 미학은 ‘생명과 평화의 길’의 과정이요 궁극적인 목적의식이 된다. ‘흰 그늘’로 표상되는 이중적인 교호작용과 반대일치의 역설이 궁극적으로는 지속가능한 생명의 발전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21세기 문명적 가치의 원형으로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작게는 인간의 정체성 상실에서부터 크게는 전지구적 생명가치상실의 위기를 맞고 있는 치명적인 현실 속에서 생명과 평화의 길을 열어갈 수 있는 신생의 인식론과 방법론으로 ‘흰 그늘의 미학’이 자리매김 된다. 따라서 그의 ‘흰 그늘의 미학’은 민족 미학의 범주를 뛰어넘어 전지구적 차원의 21세기형 네오르네상스의 원형으로서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홍용희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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