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책 처음으로 | 사전 | 자유게시판 | 회원자료 | 로그인

 
사전프로젝트 - 맑스주의사상사전,인물대사전, 정치경제학사전
처음으로 > 정치 > 정치비평 ( 23 권)
 


* 목차보기
* 이 책에 대한 의견
* 의견쓰기
* 이분류의 목록으로

* 이 책의 PDF 정보
1 -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18 MB)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앙드레 고르 지음 , 이현웅옮김
출판사 - 생각의나무
초판일 - 2011-08-29
ISBN - 9788996693604
조회수 : 2884

● 목 차

서론 = 8

1장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1. 마르크스의 포롤레타리아
헤겔적 신의 헌현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의 종교로 = 17
분리된 의식 = 21
정교주의적 사고의 뿌리 = 25

2. 집단소유의 불가능성
수공업에서 추상적 보편노동으로 = 27
실존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이상적 프롤레타리아 = 29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의 일시적 단계 = 34
프롤레테르들과 분리된 권력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 36
공장 훈련에서 군대의 이데올로기로 = 40
생산의 속박에 대한 수용 혹은 거부 = 42

3. '자본'의 복제품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름으로 행하는 억압 = 47
물화(物化)에서 원한으로 = 50
국가에 대한 요구 = 54
전위된 사회 = 59
주체의 점진적 소멸 = 60

4. 노동자의 권력?
생산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로부터 노동의 가부장적 조직화 = 65
공장에서 권력이 사라지다 = 68
작업장 대표단의 경험 = 72
비(非)권력의 세계 = 75
권력은 곧 조직의 구조다 = 76


2장 개인적 권력과 기능적 권력
슘페터 유형의 기업가 = 81
가장 능력이 뛰어난 자의 성공에서 정형화된 기능으로 = 83
기구의 전권 = 86
관료 = 88
퓌러가 당신을 시스템에서 해방시켜준다 : 파시즘의 유혹 = 90
포퓰리즘으로부터 절대국가로 = 93
권력과 혁명 = 99


3장 사회주의를 넘어서

1. 역사적 주체의 죽음과 부활 : 후기산업사회 프롤레테르들의 비계급
노동의 폐기로부터 계급의 해체로 = 107
해방된 주관성 : 사회 아닌 사회 = 114

2. 후기산업사회의 혁명
개인의 우위성 = 121
외부적 억압으로서의 사회 = 122
우스꽝스러운 허구 : 민주주의적 '계획' = 124
시간 해방 = 128
후기산업사회의 혁명과 페미니즘 = 132

3. 이원론적 사회를 위하여
1) 기술적 필요와 도덕적 요구
축소불가능한 개인 = 144
도덕과 관계가 없는 규칙들과 관계가 없느 도덕 = 147
자율성 없는 도덕은 존재하지 않는다 = 149
2) 실제적 형태의 자율성과 타율성 : 두 영역
자율적인 활동을 위해 존재하는 타율적인 노동 : 마르크스와 일리히 = 152
시공간의 이원론적 조직화 = 156
지식의 사회화로부터 노동의 평범화로 = 158
자주관리의 한계들 = 162
효율성을 찬성하기 위해, 자급자족을 반대하기 위해 = 163
두 영역의 변증법적 관계: 교대 = 167

4. 필연성의 영역과 국가
필연성 영역의 확장 : 기구들의 성장 = 169
필연성의 거직 폐기 : 종교적 숭고화, '사랑의 의무', '가족' = 173
필연성을 한정하기 : '법', '국가', '계획' = 180
두 영역의 항구적 대립: 정치의 공간(빈 공간) = 187

후기 : 파괴적 성장과 생산의 저성장 = 195

부록
1. 진보에 의한 커다란 손실 = 207
2-1. 실업의 황금시대 = 218
2-2. 노동하지 않으며 살아가기? = 241
3. 정보화 : 어떤 사회? = 251
4. 덜 일하고, 더 잘 살기(미셸 롤랑과의 대화) = 266
5. 이원론적 유토피아 = 276

맨위로맨위로

책 소개

저자 앙드레 고르(Andre Gorz)는 불치병에 걸린 아내를 20여 년간 간호하다 생전에 함께 약속한 대로 파리 교외 시골마을의 작은 집에서 잠자듯 침대에 나란히 누워 오랜 삶을 자유의지로 마감한 앙드레 고르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사상가이자 뛰어난 언론인이었다. 1949년 파리로 이주해 《파리 프레스》, 《렉스 프레스》의 경제전문기자이자 탐사취재로 뛰어난 성과를 얻은 후 저 유명한 《레탕 모데른》에서 사르트르의 뒤를 이어 주간을 역임했으며, 이후 《누벨 옵세르바퇴르》를 창간했다. 1960년대 이후 신좌파의 주요 이론가로 활동하며 68혁명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일자리 나누기와 최저임금제의 필요성을 역설한 선구적인 노동이론가이자 생태주의를 정립한 대표적 이론가다. 1980년대 이후 산업시대의 노동중심성이 종말을 고하고 글로벌 경제, 정보화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예견했으며, 사르트르는 그를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고 평가했다. 대표작으로 『배반자Le Traitre』(1958), 『생태학과 정치Ecologie et politique』(1975), 『생태학과 자유Ecologie et liberte』(1977), 『노동의 변모, 의미의 추구Metamorphoses du travail, quete sens』(1988), 『현재의 참상, 가능한 부Miseres du present, richesse du possible』(1997), 『D에게 보낸 편지Lettre a D.: Histoire D’un Amour』(2006), 『에콜로지카Ecologica』(2008)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20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가장 순결한 영혼’이라 불렸던 앙드레 고르!
정치적 생태주의에서 노동해방에 이르는 그의 모든 사유를 핵심적으로 드러내어
30여 년간 전 세계 지식인의 사람다운 삶에 대한 열망의 상징으로 자리한 명저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맑스와 함께 맑스를 넘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노동운동에 대한 놀라운 비판!

이 책은 1980년에 출간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뛰어넘는 예지에 가득한 성찰로 점철되어 있어, 앙드레 고르가 당대에 왜 그토록 뛰어난 평가를 받았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추앙받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출간 이후 노동운동가와 수많은 사상가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고, 아직까지도 노동문제에 대한 비판서로 최고의 반열에 우뚝 서 있다.

“도린, 나는 당신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당신의 재를 뿌리기도 싫다오. 우리는 둘 중 누구도 상대방보다
더 오래 살기를 원치 않으며, 서로 자주 이야기했듯이 다시 태어난다면 우리는 다시 같이 살아갈 것이오.”

불치병에 걸린 아내를 20여 년간 간호하다 생전에 함께 약속한 대로 파리 교외의 시골 마을의 작은 집에서 잠자듯 침대에 나란히 누워 오랜 삶을 자유의지로 마감했던 앙드레 고르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사상가이자 뛰어난 언론인이었다. 그는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 석학 장 폴 사르트르가 창간한 〈레탕 모데른〉 지(誌)의 주간이자 전문기자, 탐사취재의 대가로 명성을 날렸으며,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창간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고르는 1960년대 이후 신좌파의 주요 이론가로 활동하며 68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자리 나누기와 최저임금제의 필요성을 역설한 선구적인 노동이론가이자 생태주의를 정립한 초기 이론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1980년대 이후 산업시대의 노동중심성이 종말을 고하고 글로벌 경제, 정보화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예견하였으며, 사르트르는 그를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 평가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노동운동에 대한 통렬한 비판
이 책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은 1980년에 출간된 앙드레 고르의 저작이다. 그럼에도 시대를 뛰어넘는 예지와 사회문제를 냉철하게 분석하는 성찰로 점철되어 있어, 당대에 그가 왜 그토록 뛰어난 평가를 받았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추앙받고 있는지를 여실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이 책은 출간 이후 노동운동가와 수많은 사상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아직까지도 노동 문제에 대한 비판서로 최고의 반열에 우뚝 서 있다.
이 책에서 고르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를 고찰하며, 노동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생산관계와 생산수단의 폐기가 아닌 임금노동 자체의 폐기를 주장하고 있다. 이미 노동계급이 자본의 복제품으로서 지배질서 속에 편입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고르는 자본주의의 생산수단이 분할, 조직, 그리고 요구하거나 허용하는 과업의 등급화를 통해 지배의 수단이 되어버린다고 말한다. 군인들이 조직과 규칙의 양식을 송두리째 바꾸지 않는 한 군대를 장악할 수 없듯이, 노동계급 역시 자신을 구조화하고 기능적으로 분할하고 지배하는 생산수단을 바꿀 수는 없다. 만약 그 생산수단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장악한다 하더라도 노동계급은 결국 똑같은 지배체제를 재생산하는 기능적 부르주아지가 될 것이다.
고르는 이 책이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라고 이야기한다. 고르는 마오이스트들, 신화적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그들의 원초적인 숭배, 중국 농민을 대상으로 마오쩌둥이 만들어낸 토지 몰수 전략을 도시화된 선진국에서 실현하려는 강변에 일침을 가한다. 그것은 천박한 마르크스주의가 귀결되어 나타난 자본주의의 사회민주화, 그리고 월급제 노동을 영광스럽게 떠받드는 행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고르는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사회주의를 넘어서’ 다다라야 할 공산주의의 진정한 모습과 그것에 이르지 못하고 시대가 갖고 있는 엉망진창의 시스템을 열거하며, 자본주의 안에서 사회적, 역사적으로 특유한 형태에 복속된 노동, 즉 일자리 노동, 상품으로서의 노동을 폐지하자고 강하게 주장한다.
고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이상 노동계급이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며, 대신 비노동자, 노동시장 분화에 의해 주변화된 자, 노동할 수 없는 자, 자동화로 인해 직장을 잃은 자, 다시 말해 비계급을 혁명의 주체로 내세워 임금노동을 거부하고 자활노동을 창조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 비계급은 노동의 소멸과정에 따라 생산현장을 떠나게 된 사람들 혹은 지적 노동의 산업화(자동화와 정보화)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에 못 미치는 일자리를 얻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노동, 곧 노동의 존엄, 가치화, 사회적 효용, 욕망에 토대를 두었던 구(舊)사회가 해체되며 나타난 산물이다. 이들은 자본주의사회 내에서의 노동계급처럼 단결하는 존재도,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기를 열망하는 존재도 아니다. 그들은 자유와 개인적인 고유한 공간을 가장 중요시하며, 바로 그러한 성격 때문에 자연스럽게 모순적인 사회 시스템을 해체하고 전복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서론에서]
자본주의는 비정상적 상태에서도 계속 작동하는 법을 알며, 심지어 그런 상태에서 새로운 힘을 끌어낸다. 왜냐하면 해결될 수 없는 그 문제들이 본래의 힘이기 때문이다. 노동계급 정당들이 국가권력을 갖는다 하더라도 그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을 것이다. 생산양식, 생산력, 생산관계의 본성이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누가 혹은 무엇이 그 생산양식, 생산력, 생산관계를 변화시킬 것인가. 이것이 오늘날 마르크스주의 위기의 기원에서 발견되는 근본적 물음이다. (……)
실제로 자본주의는 발전하는 동안 대부분 생산수단의 주인이 될 능력이 없고 직접적으로 의식하는 이해관계로 인해 사회주의적 합리성을 따를 수 없는 노동계급을 양산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 있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 자본주의적 합리성과 관련해서만 기능하는 생산력에 따라 이해관계, 능력, 자격조건을 결정하는 노동계급(임금노동자)을 만들어냈다.
다른 합리성으로 자본주의를 넘어서고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일은 이제 노동계급 자체를 포함해 모든 계급의 해체를 상징하거나 예고하는 계층에게서 올 수밖에 없다.

나이 든 활동가들의 고질적 병폐 중 하나는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으른 탓이기도 하지만 바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기를 돌아보며 반성할 시간이 부족한데다 공부하지 않으니 자칫 아집만 늘어날 수도 있다. 머리 없이 가슴만으로 운동하는 병폐에 빠질 수 있다. 그러한 비판들을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앙드레 고르의 책을 손에 잡았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깊게 들여다보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넓게 보는 것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내는 것이다. 더불어 미래도 예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혁명기의 마르크스, 대공황 이후의 케인스, 신자유주의의 하이에크의 시대를 넘어 금융위기 이후 경제학이 폴라니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일컬어지는 요즈음 앙드레 고르의 저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을 담당하는 계급이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규정하고 가정과 일터, 사회와 정치 영역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기존 노동운동 개념의 오류들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그의 분석은 현실사회에서 충분히 실현 가능할 뿐 아니라 마르크스와 결별하지 않은 채 그를 뛰어넘고 싶은 활동가들에게도 충분히 귀감이 될 만하다.
_ 하종강(전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 노동과꿈 대표)

세상은 갈수록 힘든데 이 ‘병든’ 사회구조를 바꿀 주체는? 전통적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노동계급이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전복시켜 노동해방을 이룬다고 했다. 그러나 고르는 논쟁적인 이 책에서 앞 명제가 실제와 거리가 먼 당위라 본다. 그렇다고 그가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이란 목표를 포기한 건 물론 아니다. 자본 합리성에 충실한 ‘정상적’ 톱니바퀴로서의 노동계급과 이별할 뿐이다. 그렇다면 돌파구는? 생산력의 가열찬 발전? 아니면 노동계급의 계몽과 프롤레타리아 의식? 그도 아니면 이 책처럼 ‘맑스와 함께 맑스를 넘어’갈 것인가?
_ 강수돌(고려대 교수,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의 저자)
--------------------------------------------------------
책속으로:
프롤레타리아는 누구인가.
자본주의에서 생산력은 발전하는 동안 자연세계와 이 세계의 신비가 있던 자리에 자동화된 공정, 공장, 가공된 생산품들의 기술화된 세계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산업세계에서 한 계급이 출현하는데, 그 계급의 구성원들은 특정한 개인적 이익을 얻기 위해 일하지도, 특정한 개인적 수단을 이용해 일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특정한 개별성도 지니지 않고 다른 노동자를 대신해 무슨 노동이든 할 수 있다. 그들은 빠른 시간 안에 보편적 결과물을 생산하기 위해 즉각 사회화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기술을 이용한다. 이들이 바로 프롤레타리아이다. (p.23)

계급적 존재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그는 노동력을 지닌 다른 인간과 무한하게 교체 가능한 존재로서 착취를 당하지만, 또한 무한하게 교체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 자신과 완전히 동일하게 전적으로 소외된 타자들과 마찬가지로 하찮은 ‘타자’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프롤레테르들과 힘을 합해 착취자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하찮은 노동량을 실현하는 수단으로서 자신에게서 소외되어 있는 한에서는 자신의 존재로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 (p.50)

자신이 객관적으로 생산과정의 톱니바퀴와 같다는 사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주체적 권력을 가진 연합한 생산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이 두 사실의 차이점을 인식할 능력이 노동자의 조건에 본래적으로 내재해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떤 조건에서 그 능력이 생겨나고 발전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지금껏 대답을 제시하지 않았다. (p.64)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대로의 사회시스템은 우리로 하여금 거대한 기계적?관료적 조직들의 노예가 되도록 만들고 있고, ‘자본’의 권력 또한 자신의 공무원들의 중개를 통해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자본’의 전 기능과 관계에 종지부를 찍지 않은 채 그 공무원들을 몰아내겠다고 하는 건 분명 그 부르주아지를 단지 다른 부르주아지로 대체하겠다는 것이다. (p.80)

산업, 과학, 기술의 발전에 의한 ‘진보’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국가를 궁극적 ‘선’, 정치를 종교나 심지어 도덕과 동일시하던 실증주의적 개념은 죽었다. 오늘날 우리는 ‘선한’ 정부, ‘선한’ 국가, ‘선한’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회는 그 조직화를 통해서는 결코 ‘선하게’ 되지 않고 단지 그 조직화가 개인들에 제공하는 자율-조직화의, 자율성의, 협력의, 자발적 공간들에 의해서만 ‘선하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p.191)

우리는 바로 이런 상황에 있다. 이제 더 이상 생산하기 위해 노동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하기 위해 생산해야 한다. 출산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미래에 그 아이들이 생산에 걸맞은 소비자들이 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더 많은 아이들을 낳으라고 부추긴다. 이 논리를 따라가면, 우리는 전쟁의 경제학, 나아가서는 전쟁 자체에 대해 옹호하는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까지 생산력이 소비력을 초월했을 때 인간과 기계들을 완전 고용할 수 있는 유일한 효율적인 방법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p.232)
-------------------------------------------------------
독자서평:
전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상위 1%를 위해 희생해온 99%에 속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한 사람들은 세계 질서를 향하여 마음껏 분노하기 시작했다. 과거 같았으면 특정 정치 세력에 기댄 불순 세력 따위로 이들을 매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그와 같은 시도가 행해지고 있긴 하나 사실 어린 아이의 응석과도 같아 보일 뿐 이전처럼 크게 설득력이 느껴지진 않는다. 거리로 나선 사람들의 면모를 본다면 더욱 이는 분명해진다. 하나의 집단으로 묶기엔 그들의 정체성이 너무도 복잡하다. 집 없고 직장 없는 노숙자들과 언제 해고될지 몰라 전전긍긍 중인 비정규직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가 화이트칼라의 안온한 삶이 보장된 듯한 대학생들도 시위에 가담한 상황이다. 심지어 아이 유모차를 끌고 거리로 나선 아기 엄마와 이름만 들어도 ‘아, 그 회사’라며 감탄사가 터져 나오는 곳에서 버젓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까지. 이 다채로움을 어찌 단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저자의 이력 중 가장 독특한 것은 그의 죽음에 관한 부분이었다. 불치병에 걸린 아내를 간호하다 제 의지를 발휘해 죽음마저도 선택한 저자에게 자살했노라는 비난은 차마 던질 수 없었다. 어쩌면 그의 삶이 내내 숭고함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런 저자의 작품이라는 인식을 하고 읽어서일까? 맑시즘을 다루고 있는 많은 책들과 ‘프롤레타리아여 안녕’는 다소 그 방향이 달랐다. 크게 두 계급이 존재하고 하나의 계급은 다른 계급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이러한 이론의 형태에 의하면 우리 사회는 참으로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고 ‘단결’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잘만 활용한다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질서의 사회를 창조하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많은 이들은 추측해왔다. 그런데 사실 노동자가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자각하는 것만도 실제 사회에선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노동은 생산과 전혀 유대감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완제품을 놓고 보았을 때 노동자의 노동은 그 완제품의 극히 일부를 차지하는 부품에만 국한되어 있다. 사회가 계급적인 이해관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제 밥줄을 포기하면서까지 개혁에 동조하는 게 쉬울 수 있겠는가?


저자의 이번 책은 그 이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제가 ‘사회주의를 넘어서’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저자가 바라던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자본가에 대한 반대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라 불리어온 이들을 향해서도 반대한다. 아니, 좀더 명확히 표현하자면 프롤레타리아가 하나의 권력으로 세력화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한다. 현대 사회는 개인이 중심에 놓인 사회이다. 사측에서 회사의 부흥을 위해 개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폭력일 수 있듯 계급투쟁과 노동해방이라는 대의적 차원에서 요구되는 희생도 개인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 따라서 기존의 방법과는 많이 다를지라도 개개인의 자율성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우리 사회는 나아가야 한다. 수치로 표현되는 많이 지수들이 긍정적인 방향을 보일지라도 서민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듯 노동집단 전체 차원에서 보았을 땐 무언가 획득을 했더라도 내 자신의 삶에서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은 죽은 해방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날 거리로 나선 사람들의 존재는 분명 희망적이다. 우린 비로소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내기 시작한 셈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정치를 잊지 말 것을 우리 자신에게 요구한다. 여지껏 정치는 소수의 권력층이 제 지배를 견고히 하기 위한 도구로써 활용되어 온 측면이 강하다. 시민들이 행사한 표에 의존해 그들의 지위가 결정되지만, 그들이 시민들의 이해관계를 제대로 대변하고 있다고 믿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정치의 사명은 권력의 행사가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타율성의 영역은 축소되고 자율성이 영역은 커지도록 의무와 경영방식들을 국가에 위임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사명이다. 거리로 쏟아진 사람들도 알고 보면 스스로 정치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본으로부터, 국가 지배기구들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오는 역할을 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제 자신의 자율성의 증대를 도모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의 움직임을 현 정당들이 혹은 새로운 정당이 창출되어 흡수하지 못한다면, 즉 정치 영역에서 현재의 흐름을 짓밟는 데에만 몰두한다면 시민들은 정당을 불신하게 될 것이요, 정치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우리가 그토록 증오해온 절대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결론은 ‘사회주의’라는 체제와는 동떨어져 있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체제를 택하느냐 보다는 구성원들의 자율성을 증대할 수 있는 무언가인 것이다.


특정 명칭을 사용해 미래를 그릴 수 있길,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두려워한 나머지 사회주의 안에 미래를 가두어왔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불러 왔다. 하지만 저자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인류는 꼭 제시된 방향으로만 나아가야 하는 법은 아니다. 지금 우리의 움직임이 무엇을 낳게 될지 우리로선 알지 못하지만, 희망처럼 부상해온 프롤레타리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어쩌면 더 짜릿한 미래를 우리에게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당신이 당신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세상의 도래를 꿈꾼다면 외쳐보아도 좋은 그 말을 외쳐본다.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맨위로맨위로


● PDF 원문 파일 정보

PDF문서를 보기 위해서는 개발사인 Adobe사에서 제공하는 소프트웨어인 Adobe Reader(한글판)를 다운받아 설치하셔야 합니다.
1 -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18 MB)


● 이 도서에 대한 의견들 맨위로맨위로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하세요.

뒤로 | 목차보기 | 이분류의 목록으로

맨위로맨위로


HOME - 후원방법 안내 - CMS후원신청 - 취지문 - 사용 도움말 - 회원탈퇴하기

2002 노동자 전자도서관 "노동자의 책" 만들기 모임
120-702 서울시 중구 정동 22-2 경향신문 별관 202호 44
laborsbook@gmail.com
모바일버젼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