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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들
리처드 오버리 지음 , 조행복옮김
출판사 - 교양인
초판일 - 2008-12-25
ISBN - 9788991799394
조회수 : 221

● 목 차

프롤로그_독재 체제 비교

1장 독재에 이르는 길
독일의 구세주 대 혁명의 수호자 / 혁명을 지키는 마키아벨리 / 독일에 내려준 신의 선물 /레닌을 잇는 유일한 지도자 카리스마와 의지의 승리 / 개인 지배, 제2의 혁명 / ‘민족 혁명’의 최대 수혜자 / 법 위에 선 독재자

2장 지배의 기술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와 독일적 민주주의 / 초헌법적 권위 / “나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지도자 명령입니다” / 지배자와 하수인 / 위기를 통해 완성된 체제 / 예외적 권위의 결과

3장 개인 숭배
“우리에겐 천재 독재자가 필요하다”/ 개인 숭배의 사상적 ? 역사적 배경
지도자 신화의 탄생 / 대중적 독재 체제와 성스러운 영웅 / 계산된 숭배의 효과

4장 당 지배 국가
독재자 지도력의 원천 / 공산주의청년동맹과 히틀러유겐트 / 숙청과 정치 교육
경쟁하는 당과 국가 / 전체주의라는 용어의 오류

5장 테러 국가
국민의 동의를 얻은 국가 폭력 / 게슈타포와 엔카베데 / 죽음의 행렬
부르주아 제5열과 민족의 반역자 / 악의 평범성

6장 유토피아 건설
위대한 도시 프로젝트 / 계급 없는 유기적 공동체 / 새로운 인간의 창조
스타하노프, 사회주의 건설의 새 영웅 / 사회학적 유토피아 대 생물학적 유토피아

7장 독재와 윤리
새로운 도덕 질서 / “종교를 박멸하라”/ 예수인가, 히틀러인가 / 법 위의 국가 / 도덕 없는 도덕의 왕국

8장 동지와 적
대중은 왜 저항하지 않았는가? / 혁명의 적이 된 노동자 / 노동자들의 순응
42번이나 실패한 히틀러 암살 기도 / 스탈린의 최대 적수 트로츠키 / 침대 속으로 제한된 사생활

9장 문화 혁명
“민중이 이해 못하는 예술은 필요없다” / 사회주의 리얼리즘, 민족주의 리얼리즘
예술가들의 운명 / 대중 참여 인민 문화 / 정치의 미학화

10장 경제의 종속
서로 닮아간 명령 경제 / 마르크스의 ‘혁명’, 히틀러의 ‘정복’ / 정치는 명령하고 경제는 복종한다
민족 투쟁에 봉사하는 경제 / 대공황을 이겨낸 과격한 자립 경제 / 제3제국의 약탈 경제학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잡종 경제

11장 군사 초강대국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다” / 총력전의 내적 논리 / “사회 전체가 전선이다”
정치에 종속된 군대 / 전쟁이 낳은 두 아들

12장 총력전
화해 불가능한 이념 전쟁 / 전격전과 방어전 / 전대미문의 소모전 / 파멸을 향한 돌진
가장 잔인한 보복, 전투의 야만화 / 절멸 전쟁 / 소련이 승리한 이유 / 정복 대 방어의 도덕적 차이

13장 민족과 종족
체제 대결의 희생자 / ‘네이션’이라는 복잡한 개념 / 국제주의에서 애국주의로
내부의 적에 대한 두려움 / 생물학과 피의 은유 / 종족 전쟁, 공포의 표현 / 배제에서 학살로

14장 수용소 제국
‘교정과 갱생’의 굴라크 / 돌아올 수 없는 수용소 / 학살수용소와 노동수용소
두 수용소의 내부 / 수용소 내의 권력 구조 / 공포의 산물, 강제수용소

에필로그_스탈린과 히틀러, 20세기의 쌍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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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역사상 최악의 라이벌, 히틀러 대 스탈린
두 독재 체제의 작동 비밀을 파헤친 기념비적 비교사 연구

20세기 세계사에서 히틀러와 스탈린을 빼고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역사상 가장 폭력적으로 인명을 학살한 ‘20세기의 쌍둥이 악마’로 불리는 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은 수천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역사상 가장 파괴적이고 치명적인 독재 체제를 지휘했으며,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거대하고 가장 소모적인 전쟁을 벌였다. 수많은 독일인과 러시아인들이 열광적으로 그들을 지지했으며, 그들이 대표한 가치를 옹호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 제2차 세계대전과 제3제국 연구로 이름을 알린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은 20세기 세계사에서 전무후무한 독재 체제를 수립했던 히틀러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을 시작부터 끝까지 밀착해 보여주는 독보적인 비교사이자 두 독재자의 정치적 전기이다.

<독재자들>은 두 체제의 작동 비밀을 토대에서 구조까지 동시에 분석한 최초의 비교사 연구서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독재 탄생의 역사적.사회적 배경에서부터 개인 숭배, 대중 선동, 국가 테러, 총력전에 이르기까지 독재의 모든 층위를 속속들이 해부하여 보여준다. 또한 히틀러.괴링.힘러.괴벨스, 스탈린.부하린.몰로토프.예조프 같은 최상층부터, 때로는 열광하고 때로는 숨죽인 채 독재 체제를 살았던 보통 사람들과 단지 유대인이거나 사소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강제수용소 안에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어야 했던 최하층에 이르기까지, 히틀러와 스탈린 시대를 살았던 다양한 계층의 복합적인 정신 세계와 삶의 모습을 낱낱이 드러낸다. 역사적 상상력을 강하게 자극하는 이 책은 “독재 체제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독재 체제는 어떻게 작동했는가?” “독재자와 민중을 그토록 강력하게 묶은 힘은 무엇이었는가?” “두 독재자의 대결에서 스탈린이 승리한 이유는 무엇인가?” 같은 중요한 질문들에 명쾌한 해답을 내놓는다.

왜 히틀러는 스탈린과의 대결에서 패했는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는 연합국에 패하지 않았다. 히틀러의 적수는 결코 처칠이나 루스벨트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치 독일을 꺾은 세력은 미국과 영국이 주축이 된 연합군이며 1944년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전쟁의 승패를 가른 상징적 전투였다고 알고 있지만, 독일군이 동부 전선에서 소련군에게 패하지 않았다면 세계의 운명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마지막 순간 베를린을 점령한 것은 스탈린의 붉은 군대였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두 독재자는 서로를 잘 알고 있었으며, 상대 국가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행동했다. 전쟁이 일어난 후 두 독재자는 잠시 동안이나마 자신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협력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보았다.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독일인과 함께했다면 우리는 무적이었을 것이다.” 1945년 2월에 히틀러는 과거에 자신이 선택했을 수도 있는 대안을 평가하면서 자신과 스탈린이 “양측에서 공히 냉철한 현실주의의 정신을 지녔다면 영구적으로 동맹할 수 있는 상황을 창조했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했다. 다행히도 인류는 이 소름 끼치는 협력에서 벗어났다. 두 사람의 야심이 결합하지 않고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왜 히틀러와 스탈린의 정면 대결에서 히틀러가 패했을까? 1930년대 독일은 군수 생산과 경제에서 모두 소련에 비해 월등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오랫동안 전쟁을 준비했는데 어떻게 소련이 승리할 수 있었던 걸까? 나폴레옹이 추위 때문에 러시아에서 물러났듯이 독일군도 혹독한 추위 때문에 패할 수밖에 없었다거나 소련군이 인해전술로 밀어붙여서 성공했다는 통설도 있고, 스탈린이 발군의 리더십을 발휘해 전 소련 인민을 총력전에 동원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식의 설명도 있다. <독재자들>은 독일과 소련의 기록보존소에서 1990년대 이후에 발굴된 수많은 통계 자료,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부터 지금까지 두 독재 체제를 분석한 기념비적 연구들, 독재 체제를 살았던 실존 인물들의 증언과 기록 들을 토대로 이 같은 일방적이고 모호한 설명에 쐐기를 박는다. 저자는 여러 물질적.정신적 요인 중에서도 두 독재자가 전쟁 수행 노력에서 보인 지도력의 차이가 전쟁의 승패를 가른 핵심 요인이라고 분석한다. 즉 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이 결정적 요인이었던 것이다.
두 독재자가 직접 맡았던 최고사령관의 책무를 이행한 방식이 전투의 운명을 바꾸는 데 영향을 끼쳤다. 두 사람은 최고사령관 역할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두 사람 모두 전쟁이 지속된 4년 내내 단 하루도 전쟁 수행 노력을 벗어 던진 적이 없었다. ……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스탈린은 자신이 군사 전략가로서 한계가 있음을 인식했고 직업 군인들의 조언에 더 많이 귀를 기울였다. 이것이 1942년 늦여름의 전환점을 만들었었다. …… 반면 히틀러는 자신의 전략적 역량을 점점 더 강하게 신뢰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독일의 군 지도자라는 자신의 소명을 종족의 폭력적 자기 주장이라는 이상에 근거한 독재 체제의 핵심 목표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스탈린에게 최고명령권은 우선 정치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 12장 총력전.738~741쪽에서

1941년 여름부터 1945년 봄까지 독일과 소련 사이에 벌어졌던 피비린내 나는 길고 혹독한 전쟁은 두 독재 체제 중 어느 하나의 생존을 결정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그 전쟁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이념의 전쟁이자, 어느 한쪽이 완벽하게 파괴되어야 끝날 수 있는 전쟁이었다. 결국 히틀러는 패했고 포로가 되기보다 자살을 택했다. 스탈린의 체제는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그 승리를 바탕으로 더욱 강력해졌다.

그런데 왜 히틀러는 세계대전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스탈린의 체제를 뿌리 뽑는 일에 골몰했던 것일까? <독재자들>에서 저자는 두 체제가 서로 상대를 파멸로 이끌기까지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두 체제의 성립 배경과 작동 방식,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지향 같은 좀 더 근본적인 원인에서 찾는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대결은 그들이 체제의 지배자로 올라선 순간 이미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거의 숙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혁명의 수호자 대 독일 민족의 구세주

히틀러는 정말 인간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역사가 낳은 괴물인가? 스탈린은 사후에 터져 나온 증언들처럼 동료 볼셰비키에 비해 지적으로 한참 떨어지는 사이코패스에 불과했나? 두 독재자가 저지른 소름 끼치는 행위를 정신 착란의 결과라고 보고 싶지만, 두 사람은 결코 정신 이상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두 사람은 보기 드문 강철 같은 의지와 비범한 정치적 에너지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두 독재자는 각기 다른 이유로 역사의 대리인으로 자처했으며, 대중 역시 그들을 운명의 지도자로 받아들였다.

혁명의 아들, 혁명을 지키는 마키아벨리
스탈린은 위장의 귀재였다. 누구는 텅 빈 정신밖에 보지 못했지만, 그 안에는 정보에 밝고 신중하며 빈틈없이 조직된 지성이 있었다. 스탈린은 어리석지 않았다. 스탈린은 엄청난 독서광이었는데, 질문과 논평을 적고 밑줄을 그으며 비판적으로 책을 읽었다. 1930년대에 스탈린의 장서는 4만 권을 넘었다. …… 스탈린은 자신이 속여 넘기고자 한 사람들은 겸손하게 대했지만, 아랫사람에게는 화를 잘 냈고 저속하고 야비했으며 냉담하거나 횡포를 부렸다. 그리고 사사로운 이유로 적으로 규정한 자들에게는 무자비하게 잔인했다. 스탈린은 본래 복수심이 강하고 불안정했을지도 모른다. 카메네프에 따르면 스탈린은 시베리아 유형 중에 마키아벨리에 관한 책을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스탈린은 정치인으로서 사람을 쓰고 학대하는 것을 고급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 1장 독재에 이르는 길 P.50~51쪽에서

스탈린은 일찍이 내전기에 볼가 시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을 때 “51퍼센트를, 다시 말해 혁명을 구할” 수 있다면 기꺼이 49퍼센트를 희생하겠노라고 말했다. 스탈린의 모든 행위에 일관되게 지속된 한 가지 요소는 혁명이 살아남도록 하는 것과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지켜내는 것이었다. 스탈린에게 권력은 단순히 권력을 위한 권력이 아니라 혁명과 혁명이 대표했던 국가를 보존하고 확장하기 위한 권력이었던 것 같다. …… 스탈린의 생존 본능, 마키아벨리식 정치는 자기 중심적 가학증에 사로잡힌 인간이 아니라 10대 때부터 자신의 삶을 바쳤던 핵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이 아는 무기를 사용했던 한 인간을 보여준다. 소비에트 사회에 일편단심이었던 결과는 아득히 비참했지만, 스탈린에게 그러한 결과는 틀림없이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절박한 역사적 명령으로 정당화되었을 것이다. - 1장 독재에 이르는 길 P.54~55쪽에서

전쟁이 낳은 복수의 화신, 독일에 내려준 신의 선물
혁명이 스탈린을 만들었듯이, 전쟁이 히틀러를 만들었다. …… 비정상적이고 잔인한 전선에서 혹독한 시절을 보낸 젊은 병사에게 패배는 분명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히틀러는 휴전하던 밤에 독일을 연합국에 넘긴 자들에게 불같은 분노가 일었다고 썼는데, 이는 과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후 전 생애 동안 히틀러의 정치 행위를 보면 그는 자신의 심리 상태와, 자신이 대면하려 애썼던 역사적 현실을 전혀 구분하지 못했던 것 같다. 히틀러는 국민의 패배를 개인이 직접 당한 굴욕처럼 받아들였다. 히틀러는 거의 미치광이에 가까울 정도로 통제할 수 없는 복수심을 품었다. - 1장 독재에 이르는 길 P.57쪽에서

히틀러는 자신이 누린 권력을 신이 독일 민족에게 내려준 선물로 여겼다. 그것은 무기력과 수치심에 빠진 독일을 구원하는 데에만 써야 할 권력이었다. 히틀러는 1937년 11월에 열린 당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나를 찾아냈다는 사실이, 수백만 명 중에서 나를 찾아냈다는 사실이 우리 시대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을 찾아냈습니다. 이것이 독일의 운명입니다.” 히틀러는 자신을 독일의 구세주로 여겼다. …… 스탈린이 혁명을 지켜내기 위해 일로매진했듯이, 히틀러는 독일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일로매진했다. 스탈린이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데 자신이 꼭 필요하다고 확신했듯이, 히틀러는 자신이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역사의 도구라고 확신했다. - 1장 독재에 이르는 길 P.70~71쪽에서

독재 체제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히틀러와 스탈린은 모두 자신의 노력으로 저항을 물리치고 독재 체제를 구축해야만 했다. 스탈린과 히틀러 두 사람 모두에게 출발점은 당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 장악만으로는 히틀러와 스탈린이 휘두른 어마어마한 권력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 당 장악 이후에도 두 사람은 각각 한 차례씩 위기를 극복한 후에 비로소 개인 지배를 확립할 수 있었다. 스탈린과 히틀러는 완벽한 독재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대중의 지지를 내세웠고, 자신들이 정치적 안정의 원천이자 혁명적 질서의 대변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런 인식은 널리 퍼져 있었는데, 심지어는 열렬한 전향자가 아닌 사람들도 공유했다. 두 사람의 독재 확립은 공교롭게도 1934년에 일어난 두 건의 살인 사건으로 분명히 확인되었다.

레닌을 잇는 유일한 지도자
1924년에서 1929년에 이르는 5년이 스탈린의 이력에서 결정적인 시기였다. 이 기간 동안 스탈린은 서기장 지위를 이용하여 동료들을 몰아냈다. 스탈린의 첫 번째 무기는 죽은 레닌의 유산을 훔치는 것이었다. ……
스탈린은 당기구의 직원 임명 과정을 점차 장악하는 방식으로 당의 프롤레타리아화를 촉진할 수 있었다. 스탈린 지지자들은 조직과 직책 할당을 맡은 중앙위원회와 서기국의 여러 자리를 차지했다. 스탈린은 언제나 각 위원회와 회의 내의 힘의 균형을 세세한 부분까지 민감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스탈린의 당기구가 고분고분해졌다고 보는 데는 다소 과장이 있을 수 있다. 모든 관직은 공식적으로는 스탈린이 아니라 중앙위원회가 임명했다. 스탈린이 충성스러운 새 당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시종일관 정치적 이익이나 야심을 뒤로 하고 당을 전면에 내세우는 유일한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심어준 것이 주효했다.
- 1장 독재에 이르는 길 P.73, 75쪽에서

분열된 민족주의 진영을 통합한 히틀러, 카리스마와 의지의 승리
히틀러는 스탈린과는 매우 다른 맥락에서 당을 장악해 나갔다. 히틀러는 공식적 의미에서 ‘집단 지도 체제’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1924년 12월에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출소한 뒤 히틀러는투옥 중에 상실한 확고한 당 지도자 지위를 회복하기를 바랐다. 히틀러는 스탈린과 달리 권력을 장악할 전망이 전혀 없어 부단히 활동해야 할 정당을 다루어야 했다. 반면 스탈린은 집권당의 고참 당원이었다. …… 히틀러는 당 조직을 둘러싸고 일부 당 관료들이 주장한 정당 민주주의를 거부했다. 히틀러가 생각하는 운동은 전적으로 자신이 독일의 잠재적 구세주라는 생각에 근거해 있었다. 구세주의 사상과 정치 행위는 타인의 의지나 조언을 따라서는 안 되었다. - 1장 독재에 이르는 길 P.83, 85쪽에서

키로프 살해와 ‘수정의 밤’ - 법 위에 존재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자
두 사람은 언제 독재자가 되었나? 역사적으로 명백하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 1934년을 전환점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다. 스탈린과 히틀러는 정치 생명이 끝날 수도 있었던 위기를 넘기고 10년이 지난 뒤에 각각 당대회를 장악했다. …… 그러나 개인 독재 시대가 열렸음을 알린 신호탄은 1934년의 두 대회가 아니라 두 건의 살인이었다. 첫 번째는 돌격대 수장인 에른스트 룀 살해였다. 룀은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1934년 7월 1일 오후에 뮌헨의 슈타델하임 감옥 독방에서 사살되었다. 두 번째는 인기 있었던 레닌그라드 공산당 서기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이었다. 키로프는 1934년 12월 1일에 스몰니 학원에 있는 집무실로 걸어가는 도중 암살당했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두 사람의 죽음을 자신들이 이제 법 위에 있음을 증명하는 기회로 삼았다. 이렇게 제한 없는 개인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두 사람의 권위를 독재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본질적인 요소였다. - 1장 독재에 이르는 길 P.106~108쪽에서

독재 체제는 어떻게 작동했는가?

소련과 독일 모두 독재 체제 내내 형식적으로는 헌법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두 체제를 설명할 때 너무나 자주 간과하는 사실이다. 물론 헌법이 존재했지만 어느 독재 체제도 사실상 제한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히틀러와 스탈린의 개인 통치는 기존 절차나 헌법상 규범을 무시한 노골적인 전제주의는 결코 아니었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헌법 기구가 존재한 탓에 결과적으로 초헌법적인 권위나 기존의 헌법 조항들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왜곡하는 지도자 개인의 권위를 발전시켜야 했다. 두 독재 권력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두 독재자의 통치는 ‘일당 체제’와 ‘국가 폭력’의 도움으로 원활히 작동하고 유지되었다. 특히 당은 두 체제의 중심적인 제도였다. ‘일당 체제’는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에 유럽에서 나타난 독특한 현상이었다. 히틀러는 독일의 지도자였던 기간보다 당의 지도자였던 기간이 더 길었고, 스탈린의 개인적인 권위는 국가의 고위직이 아니라 당 서기장이라는 지위에서 비롯되었다. 지도자와 대중을 결합시키고 나아가 대중 사이로 깊숙이 파고들어가 감시하고 독려하고 위압했던 대중 정당의 활동이 없었다면 두 독재 체제 모두 상상할 수도 없었다.
두 독재 체제를 말하면서 국가 테러를 빼놓을 수는 없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통치기에 억압을 위한 억압은 없었다. 억압의 목적은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복종을 얻어내려는 것이 아니었다. 억압은 두 체제에서 중요한 정치적 과제를 현저히 위협한다고 여겨진 집단이나 개인을 표적으로 삼았다. 소련의 경우에 이는 국내외의 반혁명적 부르주아로 추정한 적들로부터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보호하는 것이었고, 독일에서는 생물학적 오염과 정신적 부패의 명백한 위협으로부터 독일 민족이나 독일 종족을 보호하는 것을 뜻했다.

“나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 스탈린의 관습적 권위
스탈린은 자신이 독재자라는 점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 기자인 유진 라이언스가 1931년에 스탈린 앞에서 “당신은 독재자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솔직하지 못한 답변을 했다. “아니오, 난 독재자가 아닙니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명령을 내릴 수 없습니다. 당이 결정을 내리면 당이 선택한 기관인 중앙위원회와 정치국에서 집행합니다.”……
스탈린은 비밀경찰에 지령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법 위에 존재했다기보다는 법 밖에 존재했다. 이것은 스탈린이 국가의 형식적인 헌법 위가 아니라 헌법 밖에서 관습적으로 정책을 승인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관습적 권위는 은밀하고 독단적이었어도 많은 사람들이 그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에 복종해야만 존립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본격적으로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던 1930년대 중반 훨씬 전부터 이렇듯 막강한 지위를 누렸다. 그러므로 공포는 스탈린의 예외적 권력의 토대였던 여러 요인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다. - 2장 지배의 기술 P.131, 137쪽에서

“지도자 명령입니다” - 히틀러의 초헌법적 권위
히틀러는 국가가 집단 지도 체제로 통치된다는 겉치레를 오래 전에 포기했다. 대신 히틀러는 스스로 명령과 지령을 내렸고 이는 법의 효력을 발했다. 체제의 나머지 전체가 그렇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938년에 한스 프랑크는 이렇게 썼다. “법률의 공식화에서 지도자의 역사적 의지가 실현된다.” 프랑크는 계속한다. ‘지도자 명령(Fuhrererlass)’은 법률적으로 “국법의 필수적 조건에 구속되지 않는” 긴급조치로 공포할 수 있다. 체제의 나머지 전체는 히틀러의 명령을 특별한 범주의 법률로, 실질적인 의미에서 의회의 다른 공식적 법률보다도 더 큰 권위를 지니는 것으로 보았다. …… 1941년과 1942년에 유대 종족 학살에 관료들이 표명한 이의는 “지도자의 명령이다.”라는 답변으로 잠재웠다. - 2장 지배의 기술 P.139~140쪽에서

독재자와 민중을 그토록 강력하게 묶은 힘은 무엇이었나?

히틀러와 스탈린은 두 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열광적 지지에 힘입어 권력을 유지했다. 두 사람이 받은 열광은 대체로 두 사람이 내보인 구세주와 영웅의 이미지와 그 이미지에 수반된 권력에서 나왔다. 그러나 두 독재 체제가 등장한 맥락에서도 그러한 열광을 설명할 수 있다. 두 나라의 주민들은 오랫동안 정치적 불안정과 내전, 폭력, 경제적 궁핍의 시절을 보냈다. 위기는 심각했고 오래 지속되었으며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한 위기의 결과로 구원의 염원이 싹텄다. 두 지도자는 주민들의 심리적 불안정과 지도자 이미지가 전해준 확신을 이용했고 그 힘을 등에 업었다. ‘정상적인’ 정치인들이 무능하거나 배신자이거나 단순히 패배자로 밝혀진 세계에서, 두 독재자를 향한 대중의 동의와 열광은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인 허구였다.
독일과 소련의 통치자와 피치자는 약속된 새 시대를 실현하기 위해 함께 투쟁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공모했다. 두 독재 체제는 공모의 수립에 의존했다. 그 공모는 적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공모 관계는 소수를 선택하여 적으로 규정하고 파멸시킬 때 작동했다. 위협당한 자들의 지위가 체제에 포함되고 보호받고자 했던 나머지 사람들의 합리적 욕구를 확인해주었기 때문이다. 두 독재자는 공포를 이용해 자신들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고 나아가 나라 전체를 ‘동지’와 ‘적’으로 갈라 지배할 수 있었다.

대중은 왜 저항하지 않았나?
어느 체제의 국민도 그저 수동적이거나 무기력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국민은 반대하거나 열렬하게 찬양하는 대신 자신들의 기대를 가능한 현실에 맞추었다. 반대하거나 저항한 무리는 사람을 움찔하게 만드는 금제와 국가의 무자비한 억압에 맞닥뜨렸다. 너무나 많은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정치에서 자유로운 삶의 측면에 집착했다. 그러나 탈정치화한 생존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그런 삶마저도 이따금씩 터져 나온 저항이나 불찬성의 사건들로 중단되었다. 대중이 독재 체제에 보인 반응은 열광적이었거나 적대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중하고 기회주의적이었다. 조건부였으나 어쨌거나 폭넓게 승인을 받은 체제가 시의 적절하게 경계를 늦추지 않는 상황에서 대다수가 보인 행동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복종하고 본심을 감추는 습관은 빠르게 익힌 만큼이나 독재 체제가 사라지자마자 없어졌다. 반대와 저항은 예외적이었으며, 용기 있는 행동이었고, 쉽사리 꺾였다. 순응은 같은 편을 뜻했고, 불순종은 배제를 뜻했다. 그렇게 엄한 윤리적 선택을, 그것도 가장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맞이했을 때, 대다수는 적이 아니라 동지가 되는 편에 섰다. - 8장 동지와 적 P.502쪽에서

악의 평범성 - 국가 폭력에 동의한 보통 사람들
대중의 공모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상당수 고발은 악의적인 의도를 지녔으며 심지어 거짓말이기도 했다. 게슈타포는 동기가 의심스러운 고발들을 위해 미결 서류함을 따로 두었다. 고발자 자신이 경찰 조사의 희생자가 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 두 체제에서 똑같이 국민은 수많은 자기 검열 행위로 협조했다. 이러한 자기 검열은 직장 동료에게 편지에 ‘하일 히틀러’ 서명을 하라고 일러주는 악의 없는 조언부터 유대인 어린이를 보호하고 있는 이웃을 배반하는 일까지 여러 형태를 띠었다. 1936년에 소련에서 일터의 사보타주 방지 운동이 전개되던 중에, 노동자들은 그 일을 직접 떠맡아 관리자들에게 폭로하겠다는 위협을 가했다. 예조프시나 동안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은 정치경찰이 아니라 자신들이 속한 사회 집단이나 동료들에 의해 격리되었다. - 5장 테러 국가 P.318~320쪽에서

무엇이 그들을 가공할 전쟁으로 돌진하게 만들었나?

히틀러와 스탈린은 둘 다 독일과 소련 사이에 중대한 전쟁이 벌어지리라고 예견했다. 히틀러는 많은 유럽인들처럼 볼셰비즘을 서구 문명의 생존을 위협하는 주적(主敵)으로 보았다. 스탈린은 제국주의 세력들이 불가피하게 시장과 자원을 둘러싸고 또 다른 전쟁에 돌입할 것이며 히틀러의 독일은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제국주의 국가라고 믿었다. 두 사람 모두 전쟁을 불가피한 역사적 필연으로 보았기 때문에, 각자 상대방에 대비하여 무장했다. 그 과정에서 독일과 소련은 독재 체제에서 세계 제일의 군사 초강대국이 되었다.
왜 두 독재 체제는 1930년대에 군사 초강대국이 되기 위해 분투했는가? 국제 정세가 불안정했으므로 이를 우려했다는 뻔한 설명으로는 납득하기 어렵다. 두 체제는 더 천천히, 소규모로 재무장을 했어도 외부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래의 전쟁이 제1차 세계대전과 같거나 더욱 힘든 전쟁이 되리라는 생각은 독일과 소련 밖에서도 일반적이었고 1919년 이후 오히려 유럽에서 널리 평화주의를 불러일으켰다. 독일과 소련의 독재 체제에서 독특한 점은 두 체제의 성격에서 비롯한 침투성 강한 군사주의였다. 두 독재 체제는 정치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수립된 군사적 상징물이었다.

화해 불가능한 이념 전쟁
1941년 여름부터 1945년 봄까지 독일과 소련 사이에 벌어졌던 피비린내 나는 길고 혹독한 전쟁은 두 독재 체제 중 어느 하나의 생존을 결정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두 나라 모두 전쟁에 절대적인 명운을 걸었다. 독일과 작은 동맹국들, 그리고 핀란드, 루마니아, 헝가리의 공동 참전국들이 1941년 6월 22일에 ‘바르바로사(Barbarossa)’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시작한 전쟁의 목적은 오로지 소련과 공산주의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공산주의 혁명은 소련이 패배하고 나면 살아남을 수 없을 터였다. 1941년 11월에 스탈린은 방송에서 “독일 침략자들은 소련의 여러 민족들을 절멸시키는 전쟁을 원한다.”라고 경고했다.
독일 지도자들은 소련이 승리하면 국가사회주의뿐만 아니라 독일 민족은 물론 나아가 유럽 문명도 종말을 맞이하리라고 생각했다. …… 1945년 4월, 붉은 군대가 베를린에 가까이 다가오자 히틀러는 일단 독일이 패배하면 “우리의 패배는 철저하고 완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싸움에서, 서로 절대로 화해할 수 없는 두 이념이 대결하는 전쟁에서, 불가피하게 이쪽이든 저쪽이든 완전히 파괴되어야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 12장 총력전 P.679쪽에서

두 독재 체제의 다른 이름, ‘수용소 제국’

‘수용소’는 대중이 두 독재 체제를 인식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이다. 히틀러 체제의 수용소에서 테러와 인종 폭력은 그 순도를 높여 야만스러운 절대성을 부여받았다. 소비에트 체제는 공식적으로는 인류의 진보를 약속했으나 그 과정에서 수백만 명을 노예로 삼았는데, 굴라크는 그런 체제의 정치적 타락과 위선을 상징했다. 하지만 포괄적인 용어인 ‘수용소’가 두 독재 체제의 공통 상징으로서 얼마나 유용하든 간에, 각 수용소 조직의 목적과 구조, 발전은 고유의 독특한 역사를 지닌다. 각 제도 내에도 여러 가지 독립된 유형의 수용소가 있었다. 수용소 내의 상황도 결코 한결같지 않았고 외부 압력이나 환경에 따라 달라졌다. 소련의 수용소는 잔인하고 절망스럽기 짝이 없는 감옥이었지만 독일과 달리 절멸의 중심지라는 계획이나 의도는 전혀 없었다.
수용소는 고립과 제한, 비밀주의와 배타성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더 큰 과정을 반영했다. 수용소는 결코 아둔한 권위주의의 부산물이 아니라 독재 체제가 직면한 자기 자신의 극심하게 확대되고 왜곡된 이미지를 비춘 잔혹한 거울이었다.

공포의 산물, 강제수용소
수용소는 귀속과 배제의 이분법에 뿌리를 둔 이데올로기들의 논리적 결과로서 기능했다. 정치적 배제나 종족적 배제의 희생자들이 대체로 결백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두 체제는 적을 규정했고 그다음 파멸시키거나 없애버렸다. 독일 독재 체제에서 절멸과 파괴의 언어는 글자 그대로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유대계 이탈리아인 화학자 프리모 레비는 친위대가 가스실에서 죽어 나온 재소자들을 소각로에서 화장한 뒤 재를 거두어 친위대 막사 주변의 작은 길과 가도에 뿌리는 것을 보았다. 이는 자신들이 지배하는 비참한 재소자들에게 굴욕을 안겨주고 그들을 파멸시키며 짓밟으려는 충동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그러한 표현은 수용소의 모든 일상과 그곳에서 지속된 잔혹 행위에 명백하게 나타났다. 수용소는 단지 상황과 효용의 부산물이 아니었고 순수한 테러의 표현도 아니었다. 수용소는 두 독재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추진력의 직접적 귀결이었다. 현대의 권위주의 체제 대부분이 그렇듯이, 두 독재 체제는 허물의 할당에, 그리고 구원을 가져오는 적의 파멸에 의지했기 때문이다. - 14장 수용소 제국 P.873~874쪽에서


리처드 오버리 (Richard J. Overy) (지은이)
캠브리지대학과 킹스칼리지 런던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친 적이 있으며, 지금은 엑세터 대학의 역사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21세기 역사와 관련해 방대한 양의 저술을 해왔으며,《더 타임스 세계사 The Times Complete History of the World》의 이전 개정판에서 세 차례 편집을 맡은 바 있다.
리처드 오버리는 지금까지 제2차 세계대전, 히틀러와 스탈린의 독재, 공군의 역사를 주제로 20권이 넘는 저술을 써내며 독자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아왔는데, 최근작으로는《영국의 전쟁》,《독재자들》,《우울의 시대: 영국과 문명의 위기 1919-1939》,《1939: 전쟁 초읽기》등이 있다.
현재 영국 아카데미의 펠로이며, 2001년 군대 역사학에 이바지한 공로로 새뮤얼 엘리엇 모리슨 상을, 2010년 항공 역사에 이바지한 공로로 제임스 두리틀 상을 수상했다. 엑세터의 국가전쟁사회 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고 있다

조행복 (옮긴이)
1966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토니 주트, 티머시 스나이더, 브루스 커밍스, 존 키건, 애덤 투즈 등 걸출한 역사가들의 현대사 저술을 한국어로 옮겼다. 옮긴 책으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폭정』, 『나폴레옹』, 『20세기를 생각한다』, 『재평가』, 『세계 전쟁사 사전』, 『1차세계대전사』, 『독재자들』, 『블랙 어스』, 『전후 유럽』, 『대격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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