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의 PDF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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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위 '통일운동'과 혁명적 국제주의의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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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위준 지음 |
출판사 - 전진 |
초판일 - 1992-0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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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15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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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서문 = 9
Ⅰ. 민족문제에 대한 인노련 사상의 기초 = 19
1. 이른바 '계급적 관점'이란 인노련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20
2. 통일운동 비판에서 보여준 민족주의에 대한 허용과 인노련의 혼란 = 68
Ⅱ.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의 정세 = 103
1.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 = 107
2. 다시 한번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에 대하여 = 113
3. 현대남한의 민족생활은 어떠한가 = 116
4. 민족생활 내부에서 계급투쟁은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가 = 118
1) 남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과제와 부르조아지의 투쟁방향 = 122
2) 총괄해 보자 = 129
Ⅲ. 전술상의 기회주의와 그 결과 = 133
1. 민족주의의 전술적용(1) = 134
2. 인노련의 '개선' 또는 동요 = 173
3. 민족주의의 전술적용(2) - 구체화 = 181
4. 맑스주의자의 항의(테제) = 214
5. 비판을 마치면서 = 224
결론 =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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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
최근 잇달아 중대한 정치적 사건을 우리는 경험하였다. 의원비리사건, 보안사 사찰사건, 수서특혜분양사건, 걸프전쟁, 기초의원선거, 그리고 백골단에 의한 한 학생의 타살사건 등 모든 계급, 계층에 걸쳐 짇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던 중대한 사건들이었다. 매 사건들은 그것이 지니는 전국적(곧 전 계급적) 중요성과 더불어 다음 두 가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 한편으로는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일련의 토대에서의 변화가 있었으며 남한 자본주의의 이 태도에서의 변화과정은 새로운 정세를 낳고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새로운 정세의 의의란 그것에 의해 각 계급들간의 이해 관심사가 변화한다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계급투쟁에 있어서 일련의 변화된 태도를 요구한다는 것, 우리가 고려해야 할 조건이 더욱 많아진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사건들의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대중들의 자생적인 활동성의 고양에도 불구하고 혁명가로서 우리 자신들은 대중의 혁명적 의식성과 조식성을 육성시키고 그들은 단일한 혁명적 사회주의의 정치군대로 모집하는데 아무런 한 일이 없다는 쓰라린 진실을 증명하였다. 혁명가들은 대중을 정치적으로 대변하는 데 실패하였으며 정치적으로 자신을 대표할 수 없는 계급, 다시 말해서 자신의 혁명적 당을 갖지 못한 계급은 계급투쟁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다는 진리, 다시 말해서 대중의 온갖 희생과 몸을 아끼지 않는 투쟁에도 불구하고 기껏해야 부르조아 야당이나 급진적인 쁘띠부르조아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세력에 머물 뿐이라는 것도 다시 한번 증명하였다. 어째서 매 사건이 전국민적인 의의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노동대중의 정치적 각성, 계급의식적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했는가에 대해 모든 맑스주의 혁명가는 경고받아 마땅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우리 운동상의 결함에 대하여 그것이 여전히 이론적 문제에 있어서의 비과학성, 사상적 빈곤에 연유한다고 단언한다. 이론과 사상에 있어서 뿌리깊은 낡은 쁘띠부르조아 사상이 여전히 운동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며 대다수 혁명가들이 모든 방면에 걸쳐 그것과 인연을 완전히 끊는데 주저하고 있고 심지어 그것을 옹호하고 있다. 운동발전의 시기로 볼 때 노동운동의 발전, 대중의 자생성은 이미 그 생명에 불을 지피고 있으나 맑스주의자들은 여전히 자신의 임무에 관한 이론적 해결, 이론적 통일에 못미치고 있다. 일단 이 문제가 해결되고 난다면 그 임무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그것을 위해 혁명가들은 실천적으로 조직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실제상의 조직, 전술계획으로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뿌리깊은 쁘띠부르조아 사상과 그것에 기초한 조잡하고 기회주의적인 혁명노선에 의해 방해받고 우리가 그것과 모든 인연을 끊고 분리하는 데 실패한다면 이 시기 전체를 청산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뿌리깊은 쁘띠부르조아 사상의 생명력은 때로는 혁명노선의 이름으로 유포되고 때로는 소위 전술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왔다. 1900년대 초 러시아에서의 쟁점은 “전제주의를 타도하는 과정에 다양한 사회계층이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며 또 필수적인가”(『무엇을 할 것인가』) 즉 프롤레타리아는 전제주의를 타도하는 혁명적 투쟁의 대열에 다양한 반정부적 제계층을 결집시킬 수 있으며 과연 프롤레타리아는 그들을 적극 지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을 수행하는 데 유일하게 올바른 전술계획은 광범한 정치폭로와 정치선동을 조직하는 계획이었다. 경제주의와 자생성에의 굴종의 경향의 대변자들은 이와같은 쟁점에 관해 명백히 반대의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광범한 정치폭로와 정치선동을 조직하기 위한 계획에 반대하였으며 자생적 조직을 옹호하며, 유일하게 정치폭로의 조직을 가능케하는 혁명적 조직 육성을 거부하는 조직상의 기회주의로 나아갔다. 그러고나서 “멘셰비키들은 조직상의 기회주의로부터 전술상의 기회주의로 나아갔다.” “1905년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은 멘셰비키와의 근본적인 전술적 차이들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것”이며 기회주의 전술과의 체계적 투쟁문헌이었다. “프롤레타리아의 임무라는 관점에서 부르조아 혁명 전반을 평가함에 있어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근본적 차이”는 무엇인가? “볼셰비키는 민주주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지도자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멘셰비키는 ‘극단적인 반정부 세력’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역할을 끌어내렸다. 볼셰비키는 성공적인 혁명이란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혁명적・민주주의적 독재’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면서, 혁명의 계급적 성격과 계급적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규정했다. 멘셰비키는 언제나 부르조아 혁명을 그릇되게 이해하더니 마침내 프롤레타리아의 역할은 부르조아에 종속되고 의존해야 한다는 견해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러한 원칙의 차이가 어떻게 실제 활동에 반영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볼셰비키는 불리긴 두마를 보이코트하였고, 멘셰비키는 동요했다. 볼셰비키는 위테 두마를 보이코트했다. 멘셰비키는 동요했고 대중에게 투표는 하되 두마를 위해서는 하지는 말라고 호소했다. 멘셰비키가 제1대 두마에서 카데트내각과 카데트정책을 지지하였던 반면에 볼셰비키는 ‘좌익 집행위원회’를 지지하는 선전을 수행하는 한편 입헌적 환상과 카데트의 반혁명성을 단호하게 폭로하였다. 더욱이 볼셰비키가 제2대 두마선거에서 좌익블럭을 위해 일한 반면 멘셰비키는 카데트와의 블럭을 요구했다.(이상 『논문 모음집 <12년>에 대한 서문』 중에서 인용, 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러시아에서 전술상의 쟁점, 기회주의와의 갈림길은 러시아 혁명이 부르조아 혁명인가 아닌가의 여부에 있지 않다. 우리가 본바대로 부르조아 혁명 전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특히 부르조아 혁명을 추진하는 지도계급의 문제, 혁명의 계급적 성격을 이해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구체적 의미에 따라 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사상, 프롤레타리아의 독자성,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를 정식화하였다.
오늘날 남한 사회의 혁명 전반을 평가함에 있어,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프롤레타리아의 독자성, 민주주의 전위투사로서의 프롤레타리아, 프롤레타리아와 민중의 민주주의 독재(정권) 따위를 마치 쟁점인양 암기하면서 쁘띠부르조아 사상과 쁘띠부르조아 혁명이론 전반을 얼마나 왔으며, 전술적 기회주의의 길로 또한 운동을 인도하려 한 점을 생각하면 실로 치가 떨리지 않을 수 없다.
남한 사회의 혁명전반에 대한 쟁점은 이렇다. 낡고 부패하여 수명을 다해가는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주의 전야에 다다른 현실적 기초아래에서 자본주의를 끝장내고 부르조아의 지배를 일소하는 과정에 다양한 사회 제계층이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며 또 필수적인가? 자본주의를 끝장내고 부르조아 지배를 일소하는 혁명적 투쟁의 대열에 다양한 사회 제계층을 결집시키기 위해 프롤레타리아는 그들을 적극 지도할 수 있는가, 또 반드시 해야만 하는가? 이 투쟁이 단지 부르조아의 독점적 지배에 이러저러한 제한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배를 완전히 뒤집어 엎는 투쟁인 한 빈농 반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점증하는 저항, 도시의 빈곤계층, 반정부적 세력을 혁명적 투쟁으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직접적 동맹군으로 조직하기 위해 어떠한 관점과 내용의 정치폭로와 정치선동의 조직화가 요구되는가? 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 독자성,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 민중민주주의 따위를 속절없이 뇌까리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적극적 역할을 단지 반제적이고 반독점, 반파쇼적인 제한된 선동 또는 의도적으로 혼란된 선동으로 격하시키는 것이 혁명노선 또는 소위 전술의 이름으로 용서되어야 하는가? 압도적 대다수의 도시와 농촌의 빈농과 반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점증하는 고통과 저항이 단지 파쇼적 또는 민족적 억압의 산물로 간주되는 것이 팔짱을 낀 채 허용되어야 하는가? 만약 그와같은 것이 허용된다면 압도적 인민의 고통이 낡고 부패해가며 사멸해가는 자본주의 자체에 직접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사소하고 하잘것없는 조치의 부족 때문이라는 기회주의적이고 현실의 계급투쟁을 외면한 모든 뿌리깊은 쁘띠부르조아 사상을 통째로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이미 현실의 인민의 저항, 농민의 저항, 노동자와 도시빈민의 저항이 모든 허황된 관념을 박살내었으며, 자본주의와 부르조아의 지배가 존속하는 한 그들의 해방은 불가능하며 그들에게 닥친 횡포와 억압으로부터 단 한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수차례에 걸쳐서 증명되어 왔지 않는가?
소위 전술의 이름을 거들먹거리면서, 소위 민주주의 과제를 잠꼬대처럼 흥얼거리면서, 이미 자생적으로 투쟁을 개시하였으며 자본주의로부터 억압을 직접 피부로 절감하고 있는 근로인민대중의 의식성을 ‘모든 반정부적 계층을 지지한다’라는 가면 아래 뻔뻔스럽게도 부르조아 민주주의 의식 또는 쁘띠부르조아 민주주의 의식으로 억지로 제한하기 위해 사회주의적 정치활동을 내팽개치고 있는 것이 뿌리깊은 쁘띠부르조아 사상의 발로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대중의 활동성과 의식성을 끌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반파쇼 반제 반독점 의식으로 혼란시키며 대중을 사회주의적 군대로 모집하고 육성하는 프롤레타리아 임무를 거부하는 것이 사상상, 전술상의 기회주의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등. 남한 사회의 혁명 전반에 대한 쟁점은 바로 이러한 일련의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남한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임무는 오로지 계급투쟁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자본주의를 끝장내고 일체의 착취를 일소하여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역사적 투쟁대열로 뛰어들 수밖에 없다. 또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조건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저항세력을 단일한 사회주의적 군대로 결집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선전, 선동, 조직화에 나서는 것이어야 하며 이것에 관한 그 어떠한 동요, 주저, 제한도 그리고 그와 같은 행위를 합리화하려는 그 어떠한 근거도 단죄되어 마땅한 것이다.
만약에 남한에서 이러저러한 정치적 격변의 지그재그를 거쳐 위로부터뿐만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격변이 일어나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그리고 그 결과 성공된 혁명이라 간주될 수 있다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와 도시와 농촌의 반프롤레타리아 혁명대중의 동맹에 직접 의지하고 모든 인민의 지지를 받는 프롤레타리아의 무장,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주의적 독재를 의미한다고 단언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남한 사회 혁명 전반에 관련된 쟁점들이다.
남한 사회의 혁명이 직접적인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사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로막기 위해, 사회주의 혁명이론을 왜곡하고 그것을 현실적인 이해로부터 추상적 이해로 전락시키기 위해, 사회주의 혁명 자체란 모호하며 전술적으로 무대책하리라는 혐오감을 조장하기 위해, 쁘띠부르조아 사상에 의지한 혁명가들이 은연중에 또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어떤 짓을 일삼아 왔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남한 사회에서 정치투쟁을 통해 격돌한다면 ‘당분간’ 또는 ‘어쨌거나’ 소위 민주주의를 둘러싸고 벌어질 것이며 사회주의를 둘러싸고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해왔다. 따라서 남한사회에서 어떻게 하든지 소위 민주주의 혁명을 지나가야 할 것이며 그것을 도외시하거나 뛰어넘고자 하는 것은 정치적 무기력증에 다름아닐 것이라고 주장해 오고 있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는 민주주의 요구를 가장 가열차게 벌여나가는 것이 임무라고 떠들어왔다. 그 문제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이렇다.
80년 이래로 광주항쟁, 87년 6월 항쟁 등 크고 굵직한 위로부터의 정치적 격변(따라서 계급에 따라 이것이 혁명이라 간주될 수 있을만한)을 겪어왔다. 프롤레타리아와 인민은 이 과정에 크고 작은 희생을 바쳤고 적과의 투쟁에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면서 피를 흘렸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와 인민에게 그 어떠한 실제적인 해방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피어린 희생은 기만당하여 사소한 정치적 개량을 호소하고 그것에 머물 것을 강요하는 급진주의자의 지지세력이 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우리는 앞으로도 이와 유사한 몇 번의 정치적 경험을 할지도 모르며 그에 관한 어떠한 장담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사건이 이렇게 전개되고 결론지어졌던 것은 ‘민주주의 혁명의 불가피성’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도단이며 프롤레타리아와 인민에 대한 완전한 기만이다.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성, 조직성, 프롤레타리아의 인민에 대한 적극적 지도, 이 모든 것을 가능케할 강력한 노동자당, 이 중 우리는 어느 것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다. 이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와 인민의 저항이 부르조아의 지배를 끝장내리라고 우리는 믿지 않으며 지배계급의 위로부터의 정치적 개량, 또는 한걸음 양보하여 쁘띠부르조아의 급진주의자의 집권(우리는 여기에 감히 민중당의 집권도 추상적으로 포함한다), 부르조아와 쁘띠부르조아 급진주의자의 연합정권 등등의 수많은 허다한 정치투쟁의 스펙트럼이 도래하지 않는다고 감히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소위 혁명가들이 지금처러 끊임없이, 끈질기게 정치폭로와 정치선동을 현실 계급투쟁으로 빗나가면서 ‘민주주의 관점’으로 제한하기를 중단하지 않으며 프롤레타리아와 인민의 진정한 혁명군대로의 발전을 가로막는 한 그와 같은 민주주의적 정치투쟁으로 계급투쟁이 결론지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로부터 숨통이 죄일대로 죄인 인민들이 나날이 투쟁의 파고를 높여가고 있을 때 그들에게 ‘여러분, 당신들은 지금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투쟁하고 있습니다’라며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면서 수 백번이고 대중을 기만하는 한 계급투쟁이 부르조아 민주주의 날개 아래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며 소위 ‘민주주의 혁명의 필연성’이 또한번 증명되었다고 떠들고 다니지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열성적인 실천가, 맑스주의 혁명가가 계급의식적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그와 같은 쁘띠부르조아적 근성을 뿌리 뽑기 시작하고 대대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에 입각한 일관된 전술 계획을 모색하기 시작하고, 정치선동의 민주주의적 제한에 철퇴를 가하고 그것에 제한당하지 않고 모든 사건 하나 하나에 대한 폭로를 사회주의 혁명의 견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모든 역량을 투입하기 시작하고 대중운동에 구체적인 사회주의적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대중운동이 혁명적 대중운동으로 전화하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기 위해 이 길에 더 많은 진정한 투사들을 결집시키면 시킬수록 계급투쟁에 의해 수행되는 정치투쟁이 단지 위로부터의 이러저러한 개량, 쁘띠부르조아의 집권 또는 그와 유사한 상황으로 정치투쟁의 발전이 귀착될 가능성을 더 많이 봉쇄할 수 있을 것이며 그에 따라 소위 ‘민주주의 혁명의 불가피성’이 기만이자 거짓임을 더 확실히 폭로할 수 있을 것이다.
부르조아 지배의 타도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집권이라는 사회주의 혁명의 이 대중적 길은 엄청난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험난한 길인 것이며, 노동계급과 근로인민은 허다한 정치적 격변의 정치적 실생활을 겪을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길을 미리부터 피해갈 수 있다거나 또는 사회주의 혁명이 이러한 역사적 지그재그 운동을 원칙적으로 피해갈 수 있다는 생각은 망상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이론에 대한 기회주의자의 도전행위이다. 우리가 이러한 험난하고 복잡한 길을 겪을 각오를 할 때에만 비로소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으며 매 시기, 매 정세마다 사회주의 혁명에 입각한 정치선동의 조직화 문제를 의미있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에 입각한 계획된 전술이라는 요체는 단 한순간도 변경되지 않을 것이며 당면 혁명에 대한 기회주의적 노선과 소위 전술이라는 이름아래 행해지는 온갖 합리화 책동 역시 단 한순간도 정당화되지 못할 것이다.
끝으로 민주주의에 관해 말하자면, 우리는 모든 민주주의를 부르조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로 엄격하게 구분할 것이며 모든 반정부적 계층과 마찬가지로 일반민주주의의 요구를 제출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그러한 요구를 사회주의적 요구로 확대하는 조건에서 행할 것이며, 만약 어떤 이유에 의해서 이 조건이 침해된다면 일반민주주의적 요구의 제출조차 철회할 각오를 숨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동계급운동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며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기만에 대중을 밀어 넣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세의 변화, 시기의 변화, 각 계급들의 태도의 변화에 따라 정치연합의 형성과 정치연합의 붕괴, 분리의 허다한 과정을 각오해야 하며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활동영역을 확대하려는 노력을 맹렬하게 추구하면서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생존조건에 대해서도 한순간도 한눈을 팔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모든 허다한 요구와 쟁점을 무조건 사회주의 혁명의 요구를 위해 활용할 것이다.
우리는 이론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특히 실천적, 정치적 문제에 관한 우리의 실제적 경험과 능력이 얼마나 미숙한가를 익히 통감하고 있다. 그 결정적 원인은 우리가 아직 사상적 빈곤의 이 시기 전체를 청산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다니고 있는데 기인한다는 것이 자명하다. 그와 같은 능력은 오직 우리가 사회주의 혁명에 입각한 계획된 전술을 실행에 옮기는 일에 대대적으로 착수할 때에만 비로소 극복되어 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의 본문은 아직까지 이론적 모색, 실천에 옮기기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쓰여졌으며 많은 동지들과 토론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에 입각한 철두철미 일관된 전술계획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이러한 시도를 통해 더 많은 동지들과 실천가들, 계급 의식적 노동자들이 이 길을 향해 나아가는 데 굳게 손을 잡게 되는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90년 하반기부터 준비되기 시작하여 지금에 걸쳐 쓰여졌다. 주로 민족문제에 관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이하 인노련이라 한다)의 사상, 전술을 비판하는 것으로 되어있으며 그 과정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사상적 견지와 그에 입각한 전술계획의 모색을 시도하였다. 언제나 통감하는 것이지만 사회주의적 정치활동을 수행하고자 하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우리가 직접 알고 있는 또 모르고 있는 동지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 왔던 것은 사실상 사회주의적 정치선동을 해야 하는가 여부가 아니었다. 고통은 실제로 어떻게 선동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고 그에 대한 훈련과 준비, 여건, 환경의 결함에서 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실제적인 선동의 수행만이 조직화와 대중의 의식성과 조직성에 의미있는 변화를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공연한 사회주의 난동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하 사노맹이라 한다)에 의해 이미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하였으며 단지 사회주의적 선동만이 운동의 승리를 보장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인에 머물렀다. 실제적인 선동으로의 전화에 관한 한 사노맹은 어떠한 길을 제시해주지 못했으며, 더욱이 잘못된 혁명이론 때문에 해악하기 조차한 것도 있었다. 그러므로 사노맹에 대해 우리는 비판적 견지에 서 있다. 그러나 우리의 비판적 견지는 인노련이 가하고 있는 사노맹 비판의 견지와는 정면으로 대립한다. 인노련은 1)사회주의를 외치는 것이 선동은 아니다 2)사회주의를 외친다고 대중이 사회주의 투쟁으로 일어서리라 보는가 3)인노련과 노동계급 등은 이미 사회주의적 실천을 해왔다 4)사노맹은 추상적이고 시적이며 단지 감각적인(따라서 소위 비과학적인) 언사만을 유포시켰다 등이 비판의 주를 이룬다.
이러한 비판은 사회주의적 정치활동, 정치선동의 조직화에 대한 적극적 비판이 결코 아니며 그것을 부정하기 위한 비판의 견지에 서 있다. 인노련은 사회주의의 혁명적 선동의 절박하고 제 일차적인 요구를 ‘과학적 사회주의의 선전’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인노련이 ‘과학적 사회주의 선전’에 열성을 기울였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인노련이 단지 일반적인 선전, 궁극적 목표로서의 선전에만 머물기를 요구해 왔으며 당면 정치적 과제로서의 사회주의 혁명 요구, 선동으로의 전화에 대해서는 완강히 거부해 왔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아마도 인노련은 '사회주의자임을 잊지 않으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자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 일테지만 그러한 맹목적 원전암기가 곧 인노련을 후진적 대열로 끌어내리고 있으며 기회주의로 인도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울러 과학적 사회주의 선전 자체에 관해서도 인노련식의 교육과 강의가 허다한 부분에서 왜곡되어 전수되고 있음을 아울러 우리는 목격해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 두는 것으로 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회주의를 외친다고 대중이 사회주의 투쟁으로 일어서지는 않는다. 그러나 진정 사회주의 혁명으로 대중이 일어서길 원한다면 오직 모든 방면에 걸쳐 사회주의 혁명적 정치선동을 무조건 확대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사회주의적 정치활동을 하고자 결심한 실천가들이라면 우리의 사노맹과 인노련에 관한 일반적 견해에 완전히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노련에 대한 본문의 비판적 내용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하겠다. 여기서는 인노련의 4가지 글을 다룬다.
1) 『노동자의 길』(이하 노길이라 한다) 30호 / 88.8.20일 자 「현재의 통일운동에 대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주로 인노련의 사상적 근원을 밝히기 위해 전문이 이용되었다.
2) 『노길 40호』 / 89.8.22일 자 「길머리에」에서는 인노련의 혼란, 객관적 상황에 대한 일면적이고 주관적 이해의 단편을 지적할 것이다. 발췌인용.
3) 『노길 41호』 / 89.9.28일 자 「노태우의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을 비판한다」에서는 남한 혁명에 대한 현실과의 괴리에 처하게 된 인노련이 재확인 될 것이다.
4) 유인물 / 90.8.15일 자 「민족의 통일문제에 대한 노동자의 견해」에서는 인노련식의 전술관의 쁘띠부르조아성, 무의식성, 사태 추이에 단지 굴종하는 경제주의적 경향을 밝힌다. 전문인용.
(인노련으로부터 인용된 전문은 모두 2자간 들여쓰기로 처리하였다.)
이러한 민족문제에 관한 인노련의 견해비판을 통해 올바른 프롤레타리아의 임무와 혁명적 사회주의적 전술을 가급적 대조시키고자 노력하였으며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전술을 끌어내는 데 얼마나 볼품없는 경지에 놓여있는지 자기반성을 하고자 하였다.
한가지 독자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문건은 88~90년의 긴 기간을 단일하게 취급하고 있으므로 실제로 사건의 평가에 관한 한 올바르지 않다고 과거의 인노련의 견해를 비판하는 것은 금지사항이다. 지나간 뒤에 누군가를 잘못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것이며 그 당시에는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사정에 놓여 있다고 봐야 한다. 다만 우리는 과거의 문건이 90년대 인노련의 견해의 사상적 기초임을 인노련 스스로 주장하였고, 따라서 그러한 한에서 그 문건들을 검토했던 것이다.
독자와 동지들이 비판에 매몰되지 말고 사회주의적 선동을 조직하기 위한 실제적 길에 대한 실마리를 얻는데 이 글이 도움을 주는가의 여부에 더욱 냉엄한 시선을 던져주기 바랄 뿐이다.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데 있다.---저자의 글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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