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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김상봉 지음
출판사 - 꾸리에
초판일 - 2012-03-19
ISBN - 9788994682051
조회수 : 1529

● 목 차

머리말

1. 바보같은 물음
-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

물음의 시작
기업이 된 국가
자유로운 시민, 예속된 노동자
국가보다 더 커져버린 기업
만남이 성장해 온 역사
기업을 폴리스(polis)로
노동자에 의한 잉여가치의 관리
세 가지 변화
시장과 자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서

2. 자유와 소유 그리고 권력
-근본 개념들의 새로운 규정

다른 사람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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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경제학자들은 결코 말하지 않는 기업의 소유와 경영에 관한 진실. 자본주의 경제학은 물론이고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도 정면으로 묻지 못했던 자본주의 내부로부터 자본주의의 극복의 길 찾기를 시작하는 것, 이 책의 의미는 한마디로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이 책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오늘의 자본주의를 금융자본주의라 하든 어떻게 이름 붙이든 그것을 작동시키는 지배원리는 주식회사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자본의 소유권을 당연시하고 전황을 방치하는 한 민주주의는 껍데기로 남겨질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민주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제시하고 ‘다른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책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정치와 경제 영역으로 따로 나누어서는 안 되며 삶의 총체성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로 사고될 수 있을 때 죽은 민주주의는 다시 그 실체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의 경영자를 왜 노동자가 직접 선출하면 안 되는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인간의 자유가 자본에 영구히 종속되는 모순을 극복하는 ‘다른 민주주의’의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 책을 다음과 같은 지은이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기업을 참된 의미의 생산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노동자들에게 경영권을 돌려주는 일이다. 이를 위해 많은 일을 할 필요는 없다. 누구에게 부당하게 피해를 줄 필요도 없다. 필요한 것은 하나의 법률조항, 바로 이것이다!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

책내용중에서

“원래 철학이라는 학문의 특징은 그것이 현존의 사회질서 속에 특정한 분야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것은 어려운 말이지만, 요컨대 경제학이 현존질서 속에서 경제현상이라는 대상을 차지하고 정치학이 정치분야를 갖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철학은 현존 사회질서 속에 그 귀속성을 갖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철학이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현존 질서 속의 일부가 아니라 그 현존질서 전체, 즉 그 ‘통째’이다. 따라서 다른 분야의 학문이 자칫하면 현존질서 전체를 주어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 그 일부분으로서 자신의 문제에만 골몰하는 것과 달리 철학은 현존질서 전체가 과연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가를 정면에서 문제 삼게 되며, 때로는 잘못된 현존질서 속에 매몰되지 않고 그것과 대등한 처지에서 대결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철학을 ‘세계관의 학문’이라 부르는 이유이고, 철학이 다른 학문분야들의 ‘통괄자’로서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이유이며, 그리고 나아가서는 역사 속에서 철학이 많은 박해를 받아온 이유이다.”(서준식, “옥중서한”)-8-9쪽- 마늘빵

철학은 언제나 세계 전체 또는 존재 전체를 생각하는 보편적 학문이다. 당연히 철학이 탐구해야 할 그 전체 속에는 경제도 포함된다. 그리고 그 영역에 속하는 주식회사 역시 하나의 존재자로서 철학적 성찰의 대상일 수 있다.-9쪽- 마늘빵

철학자는 무엇을 보든 존재에서 무에 걸쳐 있는 삶의 전체 지평으로부터 그것의 존재 의미와 진리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 -9-10쪽- 마늘빵

주식회사는 오늘날 우리의 삶을 가장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지평이자 존재의 진리가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장소이다.-10쪽- 마늘빵

독재 아래 있는 자는 자기 삶의 주인이라 할 수 없으며, 그렇게 타인의 후견과 보살핌 아래 있는 사람을 자유인이라 할 수도 없다. -23쪽- 마늘빵

노동자의 자유와 주체성은 그가 자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형성항는 주인이 될 때 비로소 실현된다. 하지만 공장이나 기업 내에서 어떤 노동자도 ‘홀로주체’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의 자유로운 자기형성은 동료 노동자와의 만남 속에서 생산활동의 ‘서로주체’가 되어 그것을 공동으로 결정하고 형성하는 활동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24쪽- 마늘빵

우리 시대에 기업은 단순히 고용계약에 의해 노동자가 자기의 능력과 시간의 일부를 투여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단순한 거래의 상대가 아니라, 노동자의 삶 또는 사회적 존재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존재의 지평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31쪽- 마늘빵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간의 참된 만남을 방해하는 지배체제는 결국 자유를 열망하는 인간의 손에 해체될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의 엄연한 철칙-41쪽- 마늘빵

국가를 기업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기업은 국가로 만들자는 것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기업을 노동자가 주권자인 민주공화국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58쪽- 마늘빵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의 마지막 목적은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므로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자기를 도구적으로 희생하면서까지 이윤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아무리 많은 이윤이 남는다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유로운 이윤추구의 극한은 생명의 소진이다. 이윤추구의 욕망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생명에 대한 욕구를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노동자 경영권이 보편화될 때 우리가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생산과 노동의 균형점이다.
-66쪽- 마늘빵

시장은 우리가 서로 수동성을 공정하게 교호나하고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장소일 때 자유의 장소가 된다. 그러나 시장에서 실현되는 경제적 자유란 것이 결과적으로 타인을 더욱더 결핍 속에 빠뜨려 자기의 결핍을 채운다거나 자기의 자유를 항구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타인을 노예 상태에 빠뜨림으로써 실현되는 것이라면, 그런 종류의 시장경제를 가리켜 자유라고부르는 것은 강도의 자유나 도둑질의 자유처럼 언어의 남용일 것이다. -74쪽- 마늘빵

많은 사람들이 기업의 소유관계를 바꿈으로써,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업의 주인을 바꿈으로써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겠다는 유혹에 빠지는 까닭은 내가 보건대 인간의 자유가 소유에 기초한다는 전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노동자가 기업을 소유할 때만 기업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중략) 그런데 이런 식으로 소유를 통해서만 자유를 확보하려 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자유가 무엇인지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오해란 자유를 선택의 능력이나 권리로 생각하는 것이다. -100-101쪽- 마늘빵

노동자가 기업의 노예가 아니라 기업의 자유로운 주인이 되기 위해 기업을 반드시 소유해야 할 필요는 없다. (중략) 자유가 사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형성하는 활동에 존립하는 한에서, 자유는 자기가 하는 활동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의미한다. -105쪽- 마늘빵

권력은 언제나 인격적 만남에서 발생하는 현상이요, 만남은 내가 사물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타인과의 관계로서, 권력은 오직 이 만남에 의해 만남을 위해 정립되는 한에서만 정당서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120쪽- 마늘빵

경영권은 정치적 권력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권력이다. 그런데 이런 권력은 타인의 인격 전체가 아니라 반드시 타인의 일부를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이다. 그것은 대개 어떤 일을 위해 타인의 능력을, 즉 타인의 정신적 육체적 노동력을 도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이다. 하지만 그 일부가 타인의 인격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까닭에 이런 권리는 사물에 대한 권리가 아니라 인격에 대한 권리이다. 그리고 타인이 행사하는 권력 아래 있는 사람은 적어도 그 권력행사의 대상으로서는 도구적 존재이다. 이 권리가 무제한적으로 확장된다면, 이는 타인의 인격 자체를 완전히 도구화하고 사물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것은 인간을 노예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인간이 어떤 근거에 따라 어떤 범위와 한계 내에서 도구적으로 쓰일 수 있는가 하는 물음과 같다. -123-124쪽- 마늘빵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은 다른 어디도 아니고 사물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뒤섞어버린 데서 비롯된다. 즉 소유할 수 있는 것과 소유할 수 없는 것을 구별 없이 뒤섞어서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의 뿌리인 것이다. -130쪽- 마늘빵

노동자를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고 참된 의미에서 기업의 시민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기업의 소유권을 자본가의 손에서 국가의 손으로 이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소유권과 기업의 지배권, 즉 경영권을 분리시키기 않으면 안 된다. -131쪽- 마늘빵

시계의 통일성은 외적 강제에 의한 것이요, 한 송이 꽃의 통일성은 부분들의 자발적 결합에 의한 것이지만, 이 자발성은 맹목적인 것이다. 이에 반해 공동체의 통일성은 의식된 자발성에 기초한다. -285쪽- 마늘빵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재벌의 주식회사는 이런 거짓된 존재의 최종적 현실태이다. 너와 내가 만나 세계를 더불어 형성하는 활동 속에서 자유를 완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지배해야만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는 주체는 세계 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들려 하고, 자기는 자본으로 만들려 한다. 지배하기 위해서는 소유해야 하며, 소유하기 위해서는 상품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고팔 수 있는 상품이 되어야 하며, 나의 모든 능력은 그 상품을 구매하고 생산할 수 있는 자본이 되어야 한다. 상품이 될 수 없는 세계의 부분은 나의 지배권 속으로 들어오지 않은 타자, 그리하여 언제라도 나의 자유를 위협할 수 있는 타자이다. 그리고 자본으로 전환될 수 없는 내 존재의 모든 부분은 쓸모없는 잉여일 뿐이다. 그리하여 이런 세계에서 모든 것은 자본과 상품의 관계 속에 용해되어야 한다. -297쪽- 마늘빵

정신은 세계를 비추는 한에서 내용을 얻게 된다. 하지만 정신이 텅 빈 거울을 비추게 되면, 그것은 어김없이 거울처럼 공허한 원초적 자기에게로 퇴행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잠옷 입은 이건희가 거울을 볼 때, 처음에는 거울이 이건희를 비추지만 나중에는 이건희가 거울을 비추게 된다. 그 둘은 아무런 내용 없이 공허하다는 점에서 똑같기 때문이다. 이건희는 그런 자기 방을 모형으로 만들어 자기 생일날 손님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는데 이는 마냥 뜻 없는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방은 또한 우리가 사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텅 빈 거울이 거울을 비추고 있는 방, 그리하여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엘리베이터처럼 공허하게 서로를 비추고 있는 세계, 움직이지 못하는 거울들이 서로를 비추면서 무한히 자기를 복제하고 증식하는 세계가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이다.-302쪽- 마늘빵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320쪽- 마늘빵

참된 의미에서 정치는 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임 있는 주체로서 형성하는 활동에 존립한다. -328쪽- 마늘빵

출판사 서평:
왜 사장은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면 기업이 망한다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다’라고 했다. 이는 허세가 아니라 왕권신수설이라는 제법 심오한 이론에 의해 뒷받침된 확고한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지난 시대의 농담이 되었지만, 그 시대에는 오늘날 우리가 삼성이 이건희의 것이라 해도 조금도 의심하지 않듯이 대다수 사람들이 왕이 국가의 주인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생각의 힘은 무서운 것이어서 철학자들이 왜 국가가 왕의 것인가 묻기 시작했을 때, 왕의 절대적 지배도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그 동요는 혁명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기업을 그렇게 민주화하지 못할 까닭이 있을까?

이 책은 아주 ‘바보 같은’ 물음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왜 기업의 사장은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라는 질문이다. 예를 들어, 서양에는 많은 교향악단이 주식회사였고 또 지금도 주식회사이다.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교향악단의 노동자가 연주자들이라면, 경영자는 지휘자이다. 그러므로 지휘자를 교향악단의 단원들이 선출한다는 것은 주식회사 경영자를 종업원들이 선출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다른 모든 주식회사도 교향악단처럼 운영되면 안 될 까닭이 있을까? 이 질문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먼저 경제·경영학자들이나 법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들이 주식회사에서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설명하는 것을 들어보면, 마치 담합이라도 한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한다. 즉, 현대의 거대 기업은 주식분산이 잘 이루어지고 주주의 수가 엄청나게 많아지고 항상 변동하기 때문에 주주들이 경영에 참여할 수 없고 전문경영인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 맞는 것일까? 실상은 이렇다. 주식회사에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주식이 너무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주식의 소유와 기업의 경영권 사이에 아무런 필연적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주식을 전혀 소유하지 않은 사람도 주식회사의 경영을 맡을 수 있고, 반대로 모든 주식을 소유한 사람도 경영을 남에게 맡길 수 있는 것이다.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로는 이런 것이 있다. 주식회사에는 사외이사를 두게 되어 있다. 하지만 왜 주주들은 회사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없고 주주가 아닐 수도 있는 사람을 그것도 절반 이상이나 이사진에 임명해야 할까? 학자들은 그 까닭을 기업경영의 독립성을 위해서라 한다. 얼마나 터무니없는 설명인가? 이것은 마치 국정의 독립성을 기하기 위해 국회의원의 과반수를 외국인으로 뽑는 것과 똑같다. 국가의 경영을 위해 국민의 대표를 뽑는 데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어떻게 주식회사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가?

지은이는 말한다. “더 이상 속지 마라,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가 아니다.”라고. 이 대답에서부터 이 책의 궁극적인 답변이라 할 수 있는 ‘노동자 경영권’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데 이르기까지 지은이는 자본주의의 변천이 오늘날의 기업국가에까지 이른 역사적 과정(1장), ‘자유와 소유 그리고 권력’의 개념에 대한 철학적 성찰(2장), 주식회사의 소유권과 경영권에 대한 법철학적 규명과 다른 나라의 사례분석(3장과 4장), 나아가 노동자 경영권의 근거(5장과 6장)를 밝히는 과정을 샅샅이 수행해 간다.
이 과정에서 주식회사의 소유와 경영에 관한 경제학자들의 지금까지의 거짓말들과 신화는 여지없이 벗겨진다. 소유와 경영의 일치는 실은 신화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아직도 경제학자들은 대기업 ‘오너’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지분은 이건희 개인은 1.86퍼센트, 순환출자한 기업 지분을 다 합쳐도 15.9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건희는 삼성전자에 어떤 경영상의 지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그는 ‘오너’로 불린다. 피터 드러커의 말처럼, 국내의 상장대기업들의 현황을 보아도 기관투자가들이 절대지분을 형성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국내 최대의 기관투자가인 연금기금은 종업원들의 ‘유예된 임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진보적이라는 일부의 경제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기업의 소유주가 없어지면 혼란이 야기되는 것처럼 이야기 한다. 그래서 출자총액제한 등 ‘기업구조개선’은 주장하지만 기업을 유례없는 독재체제로, 전근대적 제왕체제로 만들어온 재벌의 경영권을 문제 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주장을 할라치면 반대한다. 인류의 역사가 정치적으로 공화주의로 발전해온 것이었다면, 그렇다면 정말로 왕이라는 절대 소유자가 사라진 국가가 과연 혼란스러워졌을까? 우리는 이렇게 경제학자들에게 속아왔다.
그들은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세계가 휘청거릴 때에도 가장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발전하는 나라는? 독일이다. 그런데 독일에는 노동자가 경영진의 1/3에 반드시 참석한다. 노동자평의회는 노동자들만으로 구성되는데, 5인 이상의 사업장에서 설치된다. 사업주는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씩 작업장평의회와 만나 작업장 내의 현안문제들을 논의하여야 한다. 해고를 하려면 노동자 평의회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독일은 전후부터 이런 체제로 유지해왔다. 국내의 사례는 없을까? 1960년 경동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키친아트는 2000년 4월 법정관리 퇴출명령을 받았다. 남은 노동자들은 체불임금, 퇴직금, 위로금 등 76억 원을 모아 ‘키친아트’ 브랜드를 인수, 키친아트㈜를 세웠다. 노동자 기업으로 탈바꿈한 뒤 연매출 700억 원대의 탄탄한 기업으로 성장한 키친아트는 해마다 주식 배당금 10퍼센트를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면 기업이 망한다고? 경제학 또는 경영학적 지식이 전무한 사람이라도 이 책을 두세 번 곱씹어 읽어보면 그러한 거짓말을 더듬거리지 않고도 통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지금까지 경제학의 헛소리를 걷어내는, 노동하는 인간의 존엄을 위한 경제학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는 물음 하나. 그렇다면 왜 경제학자도 아닌 철학자가 이러한 길고 고된 작업에 나섰을까? 그것은 세계 전체 또는 존재 전체를 생각하는 보편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경제·경영학의 부분적 관심을 넘어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적 원리가 되어있는 주식회사를 삶의 전체 지평으로부터 성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 기업(주식회사)은 단순히 고용계약에 의해 노동자가 자기의 능력과 시간의 일부를 투여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단순한 거래의 상대가 아니라 노동자의 삶 또는 사회적 존재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존재의 지평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의 기숙사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 회사의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하루 종일 노동하고 다시 기숙사에서 잠드는 노동자에게 기업은 더도 덜도 아니고 세계이다.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고 기업이 우리의 삶을 보다 본질적으로 지배하게 되면서 일어난 하나의 필연적 결과이다. 그것은 단지 공간적인 의미에서 노동자가 공장 내의 기숙사에 거주하기 때문에 생긴 일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가 어디에 거주하든, 그의 삶은 점점 더 철저히 기업의 생산 과정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삶의 근본적 조건으로서의 기업이 오늘 한국에서처럼 재벌에 의해 생사여탈권이 주어진 억압적 공간이라면?

“공장의 폴리스polis화. 폴리스로서의 공장. 즉, 하나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단위로서의 공장. 이때만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왜 사장은 선거를 통해 뽑으면 안 되는가? 공장은 하나의 폴리스여야만 한다. 그 속에서 삶의 모든 본질적인 욕구가 실현될 수 있는 폴리스가 아니면 안 된다.”―<철학의 연습을 위한 짧은 메모들>(1987. 11. 23.)

방금 인용한 글은 이 책은 지은이가 독일로 건너가 유학하기 시작한 이듬해부터 쓰기 시작한 지은이의 철학노트에서 편집자가 발견한 글귀이다. 1987년 6월 항쟁과 그 뒤 이어졌던 7·8월의 노동자 대투쟁의 소식을 들으면서 지은이가 ‘공장의 폴리스화’를 상상하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경이로운 발견이었다. 슬프게도 그 이후의 ‘문민정부’ 그리고 또 이은 ‘민주정부 10년’ 동안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기업지배국가의 완성으로 이어지는 슬픈 역설이 탄생했지만.

이 책은 시류에 편승한 즉흥적인 착상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체제에 내재한 근원적인 모순을 응시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길을 20년 넘게 모색해온 한 철학자의 집중된 성찰의 소산이다. 저자가 독일에 유학하던 1987년 당시 ‘왜 사장은 선거를 통해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20여년 넘게 이어져온 집중된 성찰의 소산이다. 책의 결론은 한두 마디로 정리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그 위험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다음과 같은 지은이의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을 참된 의미의 생산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노동자들에게 경영권을 돌려주는 일이다. 이를 위해 많은 일을 할 필요는 없다. 누구에게 부당하게 피해를 줄 필요도 없다. 필요한 것은 하나의 법률조항, 바로 이것이다!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 앞서 독일의 한 오케스트라의 예를 들었지만, 만일 주식회사가 이 오케스트라처럼 된다면 이 세계에 넘쳐흐르는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아름다운 음악소리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철학자의 오랜 꿈과 사유의 분투로 태어난 이 책은 날이면 날마다 생사의 벼랑 끝으로 밀려나고 있는 이 땅의 노동자들에게 건네지는 소중한 선물이다.

저자 김상봉: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독일 마인츠 대학에서 철학, 서양고전문헌학, 신학을 공부했다. 민예총 문예 아카데미 교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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